소설리스트

35화 (35/75)

#035화

“으아아악!!”

난 본능적으로 아이의 몸을 감싸 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열매가 덮칠 거라고 생각해 등 근육이 움찔거렸지만, 이상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내가 꽉 껴안았던 아이는 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난 상황을 살피기 위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투명하고 푸르뎅뎅한 빛을 내는 보호막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열매들이 이빨로 보호막을 물어뜯었지만 소용없었다.

ㅡ까드득. 까드득.

이빨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막대 과자인 양 부러졌다.

난 따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보호막 안에서 주변을 살폈다.

보호막은 잔잔한 물결처럼 흘렀다. 만졌을 때 촉촉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자세히 살피니 보호막의 출처는 등에서 돋은 날개였다. 투명해진 날개가 나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와…. 날개가 투명해졌어….’

전부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원래 마법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썼던 옛날 기억들이 머릿속에 드문드문 떠올랐다. 물론 거친 질감의 사진처럼 선명하진 않았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도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지금의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속에 뭔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난 계속해서 ‘나’일 뿐이었지만 변한 것은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고 태도였다.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는 품 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리고 방금 전 아이가 했던 것처럼 열매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무래도 따라 하는 거라서 행동은 어설펐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신이 있었다.

보호막에 달려들던 열매들이 동시에 반쪽으로 쩍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됐어!!’

달려들던 열매가 모두 쪼개지자, 커다란 날개가 쭉 뻗더니 포개어지며 등으로 사라졌다.

그때 저 멀리서 반가운 실루엣이 보였다. 사장이었다.

“사장님!!! 어디 있었어요? 걱정했어요.”

“하! 웃겨! 니가 밀었잖아! 너 때문에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확 그냥!!!”

사장이 윽박지르자 나는 움찔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환각을 보는 바람에….”

사장은 바닥에 나뒹구는 열매를 들어서 한입에 와그작 씹었다. 다행인지 사장이 베어 먹은 부분은 열매의 얼굴이 아닌 뒤통수였다.

“이 열매의 이름은 말롬이야. 오랜만에 먹네. 맛이 제법 좋다니깐.”

아삭거리며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분명 열매를 보고 식욕을 느꼈는데, 지금은 반대로 먹는 소리만 들어도 비위가 상했다.

“사장님, 봤어요? 제가 마법 쓰는 거.”

“어.”

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롬을 먹는 것에 열중하며 말했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아! 그리고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을 봤는데요. 뭐랄까…. 생각보다 성격이 나쁘더라고요.”

“왜? 넌 되게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어?”

사장이 입가에 작게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그건 아니더라도, 이렇게 삐뚤어진 애일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어른한테 막 반말하고, 욕하고.”

“엄밀히 말해 어른은 아니지.”

“네?”

“그 아이 말이야. 어린 시절의 너였다면서. 그러니까 걔 기준에 너는 어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뿐이지.”

“아…. 그건 그렇네요.”

동굴 안에서 보는 환각이라지만,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하는 건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내 생각과는 딴판이었지만.

“아무튼 얼른 가자. 아무래도 너한테 너무 버거운 곳을 온 것 같으니까.”

좀 걷다 보니 우거진 풀숲 사이로 낡아 빠진 문이 보였다. 사장이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말고 말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만찬장이 나올 거야. 어떤 음식이 있든 간에 절대 먹어선 안 돼.”

만찬장의 음식이라니, 나는 너무 뻔한 설정이다 싶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좀 뻔한데요? 절대 먹지 마. 절대 뒤돌지 마. 영화나 드라마 보면 주인공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잖아요. 말 안 들어서 꼭 문제 생기고.”

사장이 입찬소리를 하는 나를 못 미덥게 바라보며 말했다.

“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나같이 자제력이 좋고,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닌 이상, 알면서도 속는다고 보면 돼!”

“알겠어요. 음식에 손만 안 대면 되는 거죠?”

“흥! 자신만만한데 어디 한번 보자고. 아무튼 나만 믿고 따라와!”

난 사장의 뒤에 딱 붙어서 만찬장으로 들어섰다.

사장의 말대로 기다란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의자는 테이블의 양 끝에만 놓여 있었다.

고급스러운 식기 위에는 어쩐지 익숙한 음식들이 보였는데, 내가 주로 배달 시켜 먹던 음식들이었다.

허니 듬뿍 치킨, 매운 닭발과 계란찜, 곱창구이, 왕돈까스, 떡튀순 세트, 갈비와 비빔냉면 등등.

아는 맛이 무섭다고, 난 누르스름하게 구워진 닭 껍질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사장이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날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먹지 말라고 했다! 먹기만 해! 아주!!!”

“안 먹어요. 그냥 보기만 하는 거예요. 보기만….”

식탁 위에는 작정이라도 한 듯이 노골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사장은 그 음식들을 대충 훑어보더니 말했다.

“어째 음식들이, 쯧쯧…. 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거뿐이네. 넌 좀 정갈하고 깨끗한 음식을 먹을 필요가 있어.”

테이블 끝쪽에는 사장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음식들이 줄줄이 차려져 있었다.

주로 처음 보는 독특한 빵과 케이크들이었다.

그때 식탁 구석에 흰쌀밥을 소담히 퍼 담은 그릇이 보였다. 그 옆엔 노란 성게 알이 든 미역국이 있었다.

반찬으론 가장자리를 좀 태우긴 했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김치전이 있었다.

난 뭐에 홀린 듯이 미역국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숟가락으로 미역국을 휘휘 저었다.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 국물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 혓바닥이 오그라들었다.

‘먹으면 안 돼…. 근데 이 미역국 어딘지 익숙한데.’

불현듯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유리 파편처럼 튀었다.

기억 속에서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내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침샘이 멈추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난 바닥으로 떨군 고개를 들어 사장을 바라봤다.

“어? 사장님…?”

간신히 유혹을 이겨 내고 바라본 사장은 연초록색의 케이크로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사장을 불렀다.

“사장님! 혹시 먹으려는 건 아니죠?”

잠시 멍하니 있는 듯하던 사장이 다시 케이크로 손을 가져가 생크림을 한 점 찍어 올렸다.

“저더러는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고 하더니! 드시면 안 돼요! 네?!”

사장은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에 묻은 키위 생크림을 쪽쪽 빨아먹었다.

“음~! 맛이 괜찮네. 난 그냥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찍어 먹어 본 것뿐이야.”

“그게 먹은 거잖아요!”

사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또 다른 케이크에 손가락을 푸욱 집어넣었다. 회색으로 바랜 눈동자를 보아하니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런가? 그럼 이미 먹은 거 좀 더 먹어 볼까? 맛이 아주 특이하단 말이지!”

“안 돼요! 정신 좀 차려요!!”

사장은 눈이 뒤집혀서는 양손으로 케이크를 집어서 입에 마구 넣었다.

평소 깔끔 떠는 성격과 달리 입과 볼에 크림이 묻어도 개의치 않았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사장의 입으로 음식이 쉴 새 없이 들어갔다.

“하…. 정말 어쩌려고 그래.”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고 먹기 시작한 사장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직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빨리 나가야겠어. 문이…. 아! 저기 있다.”

난 사장의 손목을 잡고 문 쪽으로 끌었다.

“휴…. 큰소리나 치지 말든가. 나더러 먹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더니.”

지금쯤 사장이 너나 잘하라며 쏘아붙일 때가 됐는데도 조용하자, 난 고개를 돌려 사장을 바라봤다.

사장의 얼굴이 고무 인형처럼 어색하게 변하더니 갑자기 눈썹이 사라졌다.

“뭐, 뭐야?!!”

이어 귀가 사라졌고, 여전히 우물거리는 입 위로 눈과 코, 머리카락이 차례로 사라졌다.

“어…???? 어!!!!”

둥그스름한 살색 피부만 남은 기괴한 사장의 모습에 놀라 난 손목을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사장의 얼굴에 남은 것은 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입뿐이었다.

팔과 다리까지 사라져, 살색의 기다란 소시지처럼 변한 사장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바닥에 작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음식을 먹으면… 지렁이로 변하는 거였어?”

그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의자에 낯익은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악초 할아범이었다.

“어? 할아버지가 왜 여기에….”

악초 할아범은 자못 점잖은 태도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우리 정원에 쓸 지렁이를 여기서 구해 가거든. 비옥한 토양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지. 정원의 과실이 풍성한 것도 다 현혹의 동굴 만찬장에서 얻은 지렁이 덕분이야.”

“아…. 그, 그렇군요.”

난 할아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렁이로 변한 사장을 잡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왜 내 지렁이를 훔쳐 가려고 하지? 난 현혹의 동굴에 대가를 지불하고, 지렁이를 가져가는 거라고.”

할아범의 표정이 소름 끼치게 일그러졌다. 그는 빠르게 걸어와 내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뭉툭하고 커다란 손이 내 주머니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난 심히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끼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거 놔요!! 뭐 하는 거예요!!”

“내놓으라고!! 내 지렁이!!!”

난 간신히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지팡이를 들어 할아범을 향해 겨눴다.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니까 이거 놔주세요.”

내 말이 깜찍하기라도 한 양 할아범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싸워? 너랑 내가? 나랑 싸울 주제는 되고?”

할아범은 계속해서 내 옷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자 분한 듯 소리쳤다.

“어디 있어!! 내놔!!”

약이 바짝 오른 할아범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나온 빛이 전기처럼 온몸에 흘러 들어갔다.

발끝에서부터 마비가 된 듯이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할아범이 얼굴에 주름을 겹겹이 만들면서 씨익 웃었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고 했지만 극심한 고통에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난 지팡이를 쥔 손을 간신히 들어서 할아범에게 겨눴다.

“이거 앙큼한 놈이네. 지까짓 게 뭔 마법을 쓴다고….”

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어머니 수첩에 있던 마법 주문을 외웠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머뭇거리거나 스스로를 의심할 여유 따윈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