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75)

#036화

“뿌… 뿌리야, 돋아라. 솟아라. 흙을 세게 움켜쥐어라!!”

주문이 끝나자마자 할아범의 발바닥에서 뿌리가 돋아나더니, 다리가 땅 밑으로 푹 꺼지듯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할아범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내 멱살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풀리면서 지팡이를 떨어트렸다.

“너 이 자식… 방금 뭔 짓을 한… 거야!!”

할아범의 하체는 이제 단단한 뿌리가 되어 땅에 깊게 박혔다.

난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찾았다.

할아범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지팡이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하체가 단단히 땅에 고정되어 있어서 쉽지 않았다.

도망치려던 순간 문틈 사이로 식탁 구석에 차려져 있던 미역국과 밥, 김치전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 안 둬!!! 으아아아악!!”

제법 유연했던 할아범이 허리를 최대한 굽혀서 지팡이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지팡이 끝이 살짝 닿았다.

마음이 급해진 난 접시 위에 놓인 김치전을 맨손으로 낚아채곤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당연히 차게 식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김치전은 마치 기름에서 막 꺼낸 것처럼 뜨거웠다.

“하앗! 뜨거!”

만찬장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맨 처음 동굴을 들어왔던 곳이 보였다.

내 등 뒤로 할아범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 문을 세게 닫고, 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던 김치전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 긴박한 상황 중에 김치전 먹을 생각을 하다니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전 가장자리의 탄 맛과 김치의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전의 가운데 부분은 반죽이 충분히 익지 않았는지 밀가루 냄새가 났다.

어쩐지 그 풋내마저도 그리웠던 것처럼 입안에 고소하게 퍼졌다. 난 손에 쥔 김치전을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먹어 봤어. 이거….’

우물거리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볼 위로 난데없이 온기를 머금은 눈물이 흘렀다.

입아귀에 흘러내린 눈물이 새어 들어오면서 입안에 짠맛이 느껴졌다.

“이제 기억나.”

엄마의 김치전이 입안에 들어간 순간 과거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만찬장에 있던 소담한 밥상은 살아생전 엄마가 차려 준 내 마지막 생일상이었다.

*

엄마는 요리에 영 소질이 없었다.

엄마에게 요리란 신선한 재료를 태우거나, 망치는 일에 더 가까웠다.

성게 미역국, 김치전 그리고 찰진 밥은 그런 엄마가 온종일 부엌에서 씨름하며 얻은 값진 결과물이었다.

살다 보면 유독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은 날이 있지 않은가. 불행히도 나에겐 그날이 바로 그랬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날따라 피자가 당겼다.

얼마나 먹고 싶었냐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달콤 짭조름한 불고기 피자가 눈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엄마, 나 이거 말고 피자 시켜 주면 안 돼?”

난 철없이 엄마가 차린 생일상을 앞에 두고 기어코 피자를 시켜 달라고 졸랐다.

엄마 표정에 섭섭함이 0.6초간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피자도 시켜 줄 테니까 대신 이것도 다 먹어. 알겠지?”

“아…. 먹기 싫은데.”

엄마가 피자를 주문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사이, 난 성게 알 미역국을 한술 떴다.

따뜻한 바닷물에 멸치 육수를 섞은 듯한 비릿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역시 맛없어.’

난 마법을 써서 재빨리 성게 미역국이 담긴 그릇을 주방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싱크대에 주저하지 않고 모조리 부어 버렸다.

엄마가 방에서 나왔을 때 난 국그릇에서 입을 떼며 “캬!” 소리를 냈다.

“다 먹었어.”

“벌써?”

“응. 피자는?”

“곧 올 거야.”

난 젓가락으로 김치전 끄트머리를 깨작거렸다.

난 미처 알지 못했다. 이날이 엄마가 차려 주는 마지막 생일상이 될 것이라는 걸.

*

기억은 어떤 형체가 있는 게 아니라서, 아무리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손 치더라도 흘러나오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기억의 파편을 되찾은 난 어지럼증을 느끼며 동굴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빈혈로 어두워졌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자 이번엔 눈앞에 미로가 펼쳐졌다.

‘하아…. 분명 바로 앞에 동굴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봤었는데… 이건 또 뭐야.’

분명 환각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실감 나서 속지 않을 수 없었다.

출구가 있던 방향으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뗐지만, 미로를 빠져나오기는커녕 점점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헉… 헉….”

점점 숨이 가빠 왔다. 단순히 체력이 저하된 것 같진 않고, 공기에 산소가 희박할 때 나타나는 고산병 증상과 비슷했다.

본능적으로 미로 안에 갇혀 영영 동굴 밖으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때 미로 바닥에 잘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보였다. 마치 길을 안내라도 하듯이 길을 따라 한 줌씩 흩뿌려져 있었다.

난 머리카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미로의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있었다.

작은 광장처럼 동그랗게 마련된 곳에 작은 문이 나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문 앞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날 이곳으로 이끌었구나.’

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활짝 열자 어쩐지 익숙한 화장실이 보였다.

엄마는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있었다.

“어… 엄마???”

별안간 나를 벼랑에서 등 떠밀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환상처럼 내 옆에 다시 나타났다.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머리카락은 왜 자르는 거야?”

엄마가 서글픈 기색을 애써 감추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널 지키려고.”

날 지키려고 엄마가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그 순간 사장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장의 어머니도 푸에르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사장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뽑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시 푸에르에게서 날 지키기 위해서?’

화장실에서 나온 엄마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향했고, 난 조심스럽게 엄마의 뒤를 쫓았다.

난 엄마의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엄마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엄마.”

내 앞의 엄마가 실제가 아닌, 기억 속의 모습인 걸 알면서도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엄마를 불렀다. 마치 내가 부르면 엄마가 뒤를 돌아봐 줄 것처럼.

엄마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고, 미로 한가운데 언제 생겼는지 모를 철창살로 된 감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엄마가 감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물쇠가 철컹, 묵직한 소리를 내며 잠겼다.

“엄마!!!”

급히 따라 뛰어갔지만, 이미 엄마는 감옥에 갇힌 뒤였다. 엄마를 목청껏 불렀지만,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응시할 뿐이었다.

“열… 열쇠!! 열쇠를 찾아야 돼.”

난 미고가 한 말을 떠올렸다. 감옥에 갇힌 기억을 되찾기 위해선 내 기억 어디엔가 숨겨진 열쇠를 찾아야만 한다고 했던 그 말을.

감옥 주변으로 보란 듯이 열쇠 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헛수고인 줄 알면서도 열쇠 몇 개를 들어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역시나 맞지 않았다.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하려는 동굴의 수작이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알면서도 당한다더니… 젠장!’

그사이 숨은 더욱 가빠졌다. 숨소리가 갓난아기처럼 사그라들 때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난 열쇠를 찾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미친 듯이 열쇠를 자물쇠에 꽂고, 또 꽂았다.

의식이 점점 아득해질 무렵, 새의 날갯짓 소리가 동굴 벽을 튕기며 점점 가깝게 들렸다.

‘미…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동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고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형!!! 정신 차려요!!!”

미고는 여기서 의식을 잃게 되면, 무의식 속에 영영 갇히게 된다면서 정신 차리라고 계속해서 나를 깨웠다.

“당장 나가야 한다고요. 얼른!!”

난 미고의 품에서 몸을 축 늘어뜨렸지만, 정신은 맹렬히 몸의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미고는 나를 부축한 채 서둘러 동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더 이상 주변엔 미로도, 감옥도 보이지 않았다.

동굴 안에서 내가 보는 것과 미고가 보는 것엔 차이가 있는 듯했다. 미고는 오직 자신의 직감에 의지해서 나를 이끌고 출구를 찾았다.

난 미고에게 몸을 반쯤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미고와 동굴 밖에 있었다. 미고의 차디찬 손이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형, 정신 좀 차려 봐요. 형!!”

내가 힘겹게 눈을 뜨자 미고가 안도하며 날 세게 끌어안았다.

“형… 아직 사장님을 못 찾았어요. 전 다시 들어가 봐야 돼요.”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미고의 손목을 간신히 잡았다.

“사장님… 여기에 있어.”

난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주머니를 뒤져서 지렁이를 꺼냈다.

“이게 사장님이야. 사장님이 만찬장에서 음식을 먹는 바람에….”

지렁이가 바닥에서 괴로운 듯 몸을 오그라뜨리며 꿈틀거렸다.

“이게 정말 사장님이라고요? 하아…. 정말 큰일 났네.”

미고는 작은 주머니에 흙 한 줌과 지렁이로 변한 사장님을 넣었다. 그리고 생수병을 꺼내 물을 아주 조금 부었다.

“시간이 없어요. 40시간 안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계속해서 지렁이 모습으로 살아야 되니까요.”

이제야 숨이 고르게 돌아온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사장님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약방 할매에게 가야 돼요. 원래도 그곳에 갈 계획으로 온 거지만… 약방 할매는 사장님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법을 알 거예요.”

미고가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어서 가요.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약방이 있어요.”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미고는 나를 부축한 채로 걷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마다하는 데도 미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현혹의 동굴에서 벗어나 계속 걷다 보니 돌길은 어느덧 숲길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 어디쯤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미고가 표식 하나 없는 울창한 숲 한가운데서 길을 찾듯 두리번거렸다.

“이전에도 가 본 적 있어?”

“딱 한 번이요.”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주변 식물들의 모습이 점점 기괴해졌다.

“미… 미고야. 저거 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시뻘건 피가 흐르는 나무를 보며 내가 주춤하며 말했다.

“아, 난 또 뭐라고. 블러드 우드 트리예요. 저건 피가 아니라 붉은색의 수액이고요.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면 수액을 내보내는데, 수액은 상처를 덮고 결정화시켜요. 안에 방부제 성분도 들어 있고.”

“아…. 그런 거구나. 그럼 저건 뭐야? 아기 손바닥처럼 생긴 붉은 꽃 말이야.”

“악마의 손 나무예요. 붉은 다섯 개의 손가락처럼 생긴 꽃을 피우는 나무죠. 이름과 다르게 병을 치료하는 약용 효과가 뛰어나요. 이제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약방 할매가 자주 쓰는 나무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그때 우리 두 사람과 주머니 속에 든 지렁이 한 마리 앞에 형광 무지개색으로 보이는, 높이가 70미터가량 되는 큰 나무가 보였다.

“드디어 다 왔다! 레인보우 유칼립투스 나무 꼭대기에 약방이 있어요. 가요!”

우린 벗겨진 나무껍질을 발판 삼아서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약방 할매가 이혼한 뒤로는 저도 처음 뵙는 거예요.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이혼?”

앞서가는 미고 뒤를 정신없이 쫓아가는 와중에 물었다.

“네. 악초 할아범이랑 이혼했잖아요.”

“뭐??? 악초 할아범이랑 약방 할매가 부부였다고???”

“네…. 근데 악초 할아범이 늙은 꽃, 노화랑 바람이 났다나 봐요.”

난 미고의 말에 하마터면 팔에 힘이 풀려 매달려 있던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뭐???”

“노화가 지금 모습과는 다르게 워낙 아름다웠으니까요. 둘 사이에 애도 있을걸요.”

난 미고의 말을 듣고는 결국 나무 기둥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럼 악초 할아범이 ‘아가~ 아가~’ 했던 그 나무가, 그냥 그렇게 부른 게 아니라 진짜 아기였다는 거야? 그게 가, 가능해???”

그때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두 개의 매서운 눈동자가 빛났다.

키가 큰 약방 할매는 튀어나온 광대뼈에 해쓱하게 들어간 볼이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얇은 입술에 웃으면 선홍색 잇몸이 도드라져 보였다.

“남의 이야기를 할 거면 좀 조용히 하든가. 다 들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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