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75)

#037화

미고는 나무 위에 지어진 거대한 오두막으로 한달음에 올라갔다.

“듣고 계신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미고가 할매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말했다. 뒤따라 올라온 난 멋쩍은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할 게 뭐 있어. 사실인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망할 영감이 노화의 환각에 취해서 발가벗은 채로 꽃과 뒤엉켜 있더군. 어찌나 역겹던지….”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이 민망한 마음에 멀쩡한 뒷목을 긁었다.

약방 할매가 악초 할아범과 부부 사이였다니…. 악에 받쳐 몸을 부르르 떨던 악초 할아범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약방 할매가 나와 잠시 눈을 맞추더니, 내 얼굴이 숨은 그림 찾기라도 된다는 양 뚫어져라 보기 시작했다.

“잠깐… 그 눈동자 말이야. 내가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래! 맞아. 너 이다의 아들이구나! 가만 보니 얼굴도 꽤나 닮았어.”

난 굳이 내 소개를 할 필요가 없어졌음에 안도하면서도, 속으로 할매에게 이곳에 온 용건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네. 그게 실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도 엄마가 약방 할매를 만나라고 유언을 남기셔서….”

난 현혹의 동굴에서 기억 일부를 되찾은 이후로 어머니 대신 엄마라는 호칭을 썼다. 어쩐지 이제 이게 더 입에 붙었다.

“유언? 흠…. 그래. 일이 그렇게 된 거군.”

약방 할매가 당최 감정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나뭇가지들을 돌로 빻았다.

“이다가 정확히 뭐라고 하면서 날 찾아가라고 하던가? 갑자기 궁금해지네?”

“저희 엄마가 생전에 약방 할매를 도운 적이 있었나요? 편지엔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약방 할매의 한쪽 입꼬리가 낚싯줄에 걸린 것처럼 슉 올라갔다. 미소인지 조소인지 영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움이라면 도움이었지. 남편이 노화랑 바람난 사실을 맨 처음 내게 알려 준 게 너희 엄마, 이다였으니까.”

“엄마가요?”

이어지는 약방 할매의 설명은 이랬다.

악초 할아범과 노화는 할매를 감쪽같이 속이고 밀회를 즐겼다. 이를 우연히 목격한 엄마가 약방 할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는 것이다.

약방 할매는 엄마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덮쳤고, 결국 못 볼 꼴을 보고야 말았다.

“그 전까지는 우리 참 행복했어. 한때 이다를 원망한 적도 있었어. 아무것도 모를 땐 마냥 행복했었으니까.”

약방 할매는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고마워하는 양가적 감정을 품고 말했다.

“이다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묻더라고. 행복한 거짓과 불행한 진실 중에 뭘 택하겠느냐고. 난 불행한 진실을 택했어. 그러자 이다가 자신이 본 모든 걸 털어놓더라.”

엄마는 반대로 할매가 ‘행복한 거짓’을 택했다면 악초 할아범의 외도 사실은 비밀에 부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은 ‘행복한 거짓’이 아니라 ‘진실한 행복’ 아니겠니. 그 길로 가기 위해서라면 아픔도 별수 없지. 겪는 수밖에.”

노화의 꾐에 넘어간 악초 할아범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악한 넝쿨이 촘촘한 그물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에워쌌다. 물론 그 선택이 온전히 할아범의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저기요….”

나와 할매의 대화에서 쭉 빠져 있던 미고가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좀 급해서요.”

미고가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지렁이가 든 주머니를 할매에게 꺼내 보였다.

‘맞다! 잠시 잊고 있었네.’

할매는 지렁이를 보자마자 용건을 바로 알아차린 눈치였다.

“현혹의 동굴 만찬장에서 뭘 먹은 모양이구만.”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저희 카페 사장님인데….”

잠시 사장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난 더 간절하게 읍소하며 미고의 옆에서 힘을 보탰다.

할매는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더니 결단을 내린 듯이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펼쳤다.

“좋아. 내가 이 지렁이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주지.”

약방 할매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다가 네게 나를 찾아가라고 한 이유도 말해줄 수 있어. 다만 조건이 있지.”

약방 할매는 이미 엄마가 자신을 찾아가라고 한 이유에 대해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조건…이요?”

난 미고와 재빨리 시선을 교환하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혹시 노화를 죽여 줄 수 있겠나?”

물론 노화를 싫어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를 했다. 하지만 왜 굳이 그걸 나에게 시키려고 하는지, 난감한 마음에 고개가 절로 흔들거렸다.

“다른 부탁도 아니고…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건…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게 사람이 아니라 꽃이라고 하더라도요.”

할매가 내 반응이 퍽 실망스러운지 깊게 파인 팔자 주름을 손톱으로 슥슥 긁었다.

“네 사장이란 작자는 영원히 지렁이로 살아도 괜찮은가 보군. 맘대로 해.”

미고와 내가 번갈아 가며 한숨을 쉬었다. 뾰족한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할매의 부탁대로 노화를 죽일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우릴 보면서 혀를 끌끌 차던 할매가 넌지시 말했다.

“죽이는 게 힘들다면…. 그래! 인심 썼다! 노화의 이파리 한 장이라도 떼어 오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이파리요?”

짙은 주황색에, 금수의 가죽처럼 두껍고 질겨 보이던 노화의 잎사귀가 떠올랐다.

쉽지 않을 거 같지만 그렇다고 이마저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사장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아야 했다.

“좋아요. 이파리 한 장 정도라면 해 볼게요. 그러니까 얼른 사장님부터 어떻게 좀….”

내가 제안을 수락하자 할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앙상한 팔꿈치에서 개암을 씹는 소리가 났다.

“따라와.”

할매는 나와 미고를 오두막 뒤편에 있는 작은 화단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삽 두 자루를 우리에게 던졌다.

“땅을 파. 깊이.”

우린 영문도 모른 채 일단 할매가 시키는 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우리 둘 말고도 저절로 움직이며 땅을 파는 삽이 도와준 덕분에 일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성인 한 명이 충분히 들어갈 법한 구멍이 생기자 할매는 잿빛 가루를 우리에게 주며 뿌리라 했다.

“이게 뭔데요?”

“만찬장에 있던 음식에는 독이 들어 있어. 그 독을 해독하려는 거야. 이 가루는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상어의 치석을 곱게 간 거야.”

치석이라니…. 꺼림칙했지만 미고와 난 가루를 한 움큼 크게 집어서 구멍 속에 뿌렸다.

눈이 내린 것처럼 구멍 속에 새하얀 가루가 소복하게 쌓이자, 할매는 주머니에서 꺼낸 지렁이를 그 안으로 휙 던졌다.

그러고는 그 위로 다시 흙을 덮었다.

이어 거대한 장독대만 한 물 조리개를 낑낑대며 들고 오더니 우리에게 땅에 물을 뿌리라고 지시했다.

“윽…. 냄새!! 이건 또 뭐예요?”

미고가 대형 조리개 안에 든 시꺼먼 물에서 나는 악취에 코를 틀어막으며 물었다.

“비위가 약한 분홍색 하마의 토에 약초를 넣고, 일주일간 뭉근한 불에 정성껏 끓인 거야. 역시나 해독 작용에 탁월하지.”

우린 시큼하게 올라오는 악취를 간신히 버티며, 지렁이를 묻었던 땅에 모두 뿌렸다.

할매가 시키는 대로 모두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할매의 눈치를 살폈지만, 할매는 말없이 지렁이를 묻은 땅을 응시했다.

잠시 후, 땅의 표면이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죽어 있던 시체가 좀비가 되어 살아나는 것처럼 사장이 흙을 헤치고 나왔다.

기괴한 모습 너머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젠장할….”

선뜻 다가가기 힘든 모습에 한참을 망설이던 나와 미고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사장님!!”

“사장님, 괜찮으세요??”

나와 미고는 사장에게서 나는 썩은 내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꼭 껴안았다.

“야…. 떨어져….”

사장이 심기가 불편한지 으르며 말했지만, 미고는 더는 사장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고는 오히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피누누 용이 그려진 티셔츠를 꺼냈다.

옷이 엉망이 된 사장은 어쩔 수 없이 미고가 건네는 옷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모두 같은 옷을 갖춰 입게 된 것을 보고 미고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약방 할매는 사장이 본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는 오전에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마워요! 약방 할매!”

사장이 창호지가 발린 나무문 앞에서 할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됐어. 내 부탁이나 잊지 말고 들어줘. 그리고 내 이름은 할매가 아니라 보니라고. 보니.”

***

다시 셋이 된 우린 약방 할매의 배웅 없이, 다시 레인보우 유칼립투스 나무 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어쩔 수 없이 할매와 약속은 했지만 어떻게 해야 노화의 이파리를 떼어 올 수 있을지 막막했다. 난 사장과 상의할 생각으로 말문을 열었다.

“사장님,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약방 할매가 노화의 이파리 한 장을 떼어 와 달라는 부탁을 했어요. 사장님을 되돌려 주는 조건으로요.”

“어. 다 들었어.”

사장이 나무 기둥에서 주르륵 내려와 가볍게 땅에 착지하면서 말했다.

“이파리를 떼 와 달라는 부탁은 죽여 달라는 부탁이나 진배없어. 퍽이나 노화가 ‘가지고 가슈.’ 하면서 주겠다. 안 그래?”

사장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별수 없잖아요. 사장님이 계속 지렁이로 살 수도 있다는데….”

미고가 내 편을 들며 말했다.

“일단 카페로 돌아가자. 피곤해 죽겠어. 해그냥, 넌 지금 몇 시간째 깨어 있는 줄 알아? 일단 잠을 자는 게 우선이야.”

사장의 얼굴을 보아하니 눈 밑이 거무튀튀한 게 보통 피곤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네. 카페서 눈 좀 붙였다가 가요. 저도 이제야 긴장이 풀리나….피로가 몰려오네요.”

사장이 숲속에 넓적한 나무 밑동에 자리를 잡더니 금세 이동 거울을 만들었다.

맨 처음으로 미고가 이동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그다음으로 사장이 피곤한 몸을 기우뚱 숙이며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였다. 이동 거울은 전에도 몇 번 통과해 보았지만 여전히 어색하고 긴장됐다.

거울 안으로 천천히 팔을 뻗으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사사사삭, 무언가 빠르게 풀숲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돌아 소리의 출처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무언가 날 세게 밀치고 이동 거울로 몸을 내던졌다.

찰나지만 파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를 본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하마 토에 견줄 만한 어마어마한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윽…. 냄새!!”

누군가 나를 밀치고 먼저 이동 거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뒤로 벌러덩 넘어진 나는 어이없고 황당해서 잠시 벙쪘다.

그때였다. 이동 거울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어… 어????”

이대로 거울이 사라진다면 이 숲에 나 혼자 남을 터였다.

거울 너머에서 사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밀치고 이동 거울 속으로 뛰어들었던 자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다.

“너 이씨…. 너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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