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난 손에 묻은 끈적끈적한 점액질을 신경질적으로 바지에 닦았다.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욕지기처럼 치밀어 올랐다.
그 와중에 사장은 노화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았다.
반투명한 기름을 묻히고 주문을 외자, 머리카락은 사장의 손에서 화르륵 타올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아…. 이게 맞았어. 정말 이 기름으로….”
비밀을 알게 된 사장이 말문이 막힌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화를 노려봤다.
푸에르가 회색 마녀의 머리카락을 태울 수 있었던 게 노화의 기름 덕분이라면, 그 기름을 푸에르에게 준 건 바로 노화였다.
그때 점점 줄어드는가 싶었던 암술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흐물거리며 혓바닥이 나왔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기다란 혓바닥이 내 허리를 휘감아 들어 올렸다.
“허기져서 참을 수가 없어. 배고파…. 너무 배고파!!!”
지오에게만 들리는 늙은 꽃의 절규가 공기 중의 파장으로 퍼졌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번엔 내 귀에도 불쾌한 이명이 들렸다.
오랜 기간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하지 못한 노화가 본능을 깨우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꽃잎에는 어느덧 푸른 돌기가 닭살처럼 올라왔다. 그걸 발견한 지오가 다급하게 경고했다.
“저 돌기에 닿으면 안 돼요. 저 액체는 소화액이에요. 지금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라고요!!!”
노화에게 잡힌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면서 콧속에 꽉 끼웠던 솜뭉치가 헐거워졌다. 유독 가스를 흡입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해그냥!!! 정신 차려!!”
사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사장이 한 손으로 자신의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그녀의 손에 날이 선 검이 생겼다.
싸울 태세를 갖춘 사장의 머리카락 끝이 불로 일렁였다. 사장은 손에 든 검으로 있는 힘껏 노화의 잎을 베었지만, 꽃잎은 보기 흉한 상처만 생길 뿐 잘리지 않았다.
까마귀로 변신한 미고는 부리로 내 허리를 조이고 있는 혓바닥을 맹렬히 물어뜯었다. 지오는 주변 식물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노화가 두려웠던 악초들은 이를 거부했다.
노화는 사장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구토하듯 기름을 쏟아부었다. 사장의 머리카락에서 진득한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내가 혓바닥에 묶인 채 위험하다 소리쳤다. 사장은 패닉이 왔는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타 죽은 가족들을 목격한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
그 순간 왼쪽 눈동자에서 또다시 미래의 잔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전에도 그랬듯 미래가 보인다는 것은 누군가 위험해 처한다는 뜻이었다.
왼쪽 눈동자를 통해 들여다본 미래에서, 늙은 꽃이 꽃잎에 난 붉은 돌기를 뜯어서 사장에게 던졌다. 작은 불씨로 변한 돌기가 사장에게 날아갔다.
사장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으면서 순식간에 화염이 사장의 전신을 둘러쌌다.
“안 돼!!!”
아직 일어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하고 끔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방금 전 미래에서 봤던 노화의 돌기가 사장에게 날아가는 모습이 눈앞에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난 간신히 혓바닥에 묶인 손을 빼내 목에 걸고 있던 피누누 발톱을 손에 쥐었다.
발톱은 원래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난 내 몸을 묶고 있는 노화의 혓바닥을 발톱으로 세게 그었다.
혀의 아랫바닥과 입의 점막을 잇는 띠 모양의 힘살이 잘려 나갔다. 노화의 비명 때문인지 또다시 이명이 들렸다.
간신히 노화에게서 벗어난 나는 재빨리 지팡이를 휘둘러 사장에게 날아가는 돌기를 낚아챘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던 사장이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몸을 피했다. 미고와 지오가 사장의 앞을 막고 서서 노화가 던지는 돌기를 막아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노화의 암술이 좌우로 흔들렸다. 난 피누누의 발톱으로 암술을 잘라, 바로 옆에 있던 식충 식물인 파리지옥에 던졌다.
마치 먹이를 던져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던 파리지옥이 너덜너덜한 살점처럼 뜯긴 암술을 집어삼켰다.
사장의 칼로는 벨 수 없었던 노화의 이파리는 피누누의 발톱으로 예리하게 잘려 나갔다. 난 이파리 한 장을 서둘러 품 안에 구겨 넣었다.
그때 갑자기 노화의 주변에 뿌연 안개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장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
“노화의 꽃잎이 오그라들고 있어. 이 안개는 노화가 죽기 전에 내뿜는다는 유독 가스야. 이 가스를 맡으면 누구든 살아남지 못해!”
분명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귀가 얼얼했다. 지오가 양쪽 귀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노화의 절규가 정원을 뒤흔들었다.
지오가 귀를 틀어막고 간신히 일어나서 말했다.
“노화는 죽기 전에 단 한 번 열매를 맺어요. 이 유독 가스가 다 배출되고 나면 열매가 달릴 거예요.”
“지금 열매가 문제야? 다 죽게 생겼는데. 얼른 피하자.”
사장이 자신을 부축하던 미고에게 이동 거울 가루를 주었다. 사장 대신 미고가 정원의 기둥 옆에서 이동 거울을 만들었다.
지오는 노화의 마지막을 놓칠 수 없는지 눈을 떼지 못했고, 난 그런 지오의 손목을 붙잡고 이동 거울이 있는 쪽으로 끌었다.
사장과 미고, 그다음에 나와 지오가 순서대로 이동 거울에 몸을 던졌다.
***
카페로 돌아온 우리 사이엔 전에 없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정적을 깰 말을 찾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소음보다 무거운 침묵을 택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뭘 물어야 할지, 따져야 할지, 혹은 난 괜찮다고 먼저 말해야 할지. 두서없는 문장만 떠다녔다.
미고와 지오도 섣불리 분위기를 전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둘은 어리지만 영리해서,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는 확실히 분간했다.
사장은 잠시 멍하니 카페 바닥에 앉아 있더니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치르고 나면, 항상 사장은 우리에게 따듯한 커피나 차를 끓여 주었다.
우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따뜻한 원두 향을 음미하며 기다리곤 했다.
“푸에르가 왜 우리 엄마를 찾은 거죠? 어째서… 그렇게까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사장에게 물었다. 이전엔 푸에르가 회색 마녀를 모조리 죽인 이유를 알고자 했다. 엄마가 회색 마녀였기 때문에 그에게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장의 말을 듣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푸에르의 타깃은 회색 마녀가 아니라, 엄마였다.
엄마가 회색 마녀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회색 마녀들이, 엄마를 대신해 푸에르에게 죽어 간 것일지도 몰랐다.
커피를 내리고 있던 사장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푸에르는 이다의 목숨을 노렸어. 푸에르가 2월 19일에 너희 엄마를 죽이는 것에 실패하자, 분풀이를 하듯이 남은 회색 마녀들을 모두 죽였으니까.”
난 밀물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사장의 말에 집중했다.
“그날 이후 너희 어머니는 푸에르를 피해 인간 세상으로 숨었어. 갓 태어난 너를 지키려고 했을 거야.”
사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후루룩, 소리 외엔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희 엄마가 사랑하던 사람, 그러니까 너희 아빠를 친한 친구였던 우리 엄마에게 소개했어. 이다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서 고생을 했는데, 그런 그녀를 지지했던 건 우리 엄마밖에 없었지.”
내 기억엔 존재하지 않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희 아빠를 본 적이 있어요?”
“응. 물론 나도 어렸을 때여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눈빛이 선하고 친절한 분이셨어. 다리 한쪽을 심하게 절었어. 행동은 느렸지만 눈은 늘 이다를 따라다녔고, 줄곧 미소를 지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상상 속으로 그렸던 아빠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데 왜, 제게 미리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죠?”
담담히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묻어났다.
이어지는 사장의 말은 이랬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고양이 루베로가 이다의 부탁을 받고 사장에게 편지를 전해 주러 왔다.
정확히는 사장이 아니라 절친한 친구였다던 사장의 엄마에게 쓴 편지였다. 수신인이 죽고 없었으니 그 편지는 자연스럽게 사장의 손에 닿았다.
편지라기엔 급하게 갈겨쓴 쪽지에 더 가까웠다.
[징조를 밝히는 초가 푸른빛을 냈어. 만약 내가 잘못되면… 해그냥을 부탁해. 이제 이 아이에겐 아무도 없어. 아이에겐 우리의 이야기를 비밀에 부쳐 줘. 아이에게 괜한 우려를 안길 거야. 네가 그리워.]
이다의 쪽지를 받고 사장은 처음에 몹시 화가 났다고 했다.
푸에르는 미친 듯이 이다를 찾으면서 폭주했고, 놈의 손에 엄마도 무참히 죽임을 당했는데… 이다는 여태껏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게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사장은 이다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 이모나 다름없었던 이다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다.
원망과 미안함. 그렇게 어긋난 감정을 안고 살던 사장은 이다가 자신의 엄마에게 부탁했던 것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장은 나만이 맡을 수 있는 향을 만들어 매일 커피 향을 흘려보냈다. 오로지 나를 찾기 위해서 10년간 꾸준히.
사장이 나를 모른 척한 것도,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모두 엄마의 부탁이었다. 나에게 괜한 우려를 안길 일에 대해 비밀에 부쳐 달라는 엄마의 부탁.
난 잠시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사장이 건네는 커피 잔도 받지 않았다.
“저 오늘은 이만 집에 갈게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너무 많은 생각이 오가서,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 명확한 건 지금이 일요일 밤이고,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미고와 지오 그리고 사장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나가는 내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사장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에게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사장의 손안에는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고양이 루베로가 전해 주었다던 엄마의 쪽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받았다. 카페를 나와 한참을 돌고 돌아 집으로 갔다.
안 그래도 지쳐서 발 한 걸음 내디딜 기운도 없었지만, 그럴수록 더 걸었다.
집에 도착하고 침대에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보진 않고 내내 만지작거렸던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펼쳤을 때 익숙한 엄마의 필체가 보였다. 엽서에 남긴 것과 같이 조금은 동글동글하고, 삐뚤빼뚤했다.
[하나에게, (사장의 어머니 성함이었다.)
징조를 밝히는 초가 푸른빛을 냈어. 만약 내가 잘못되면… 해그냥을 부탁해. 이제 이 아이에겐 아무도 없어. 아이에겐 우리의 이야기를 비밀에 부쳐 줘. 아이에게 괜한 우려를 안길 거야. 네가 그리워.
추신,
너에게 이런 것까지 부탁해서 정말 미안해. 우리 애가 성인이 되면 옷을 한 벌 직접 지어 줄 수 있겠니? 내가 해 주지 못할 거 같아서… 부탁한다.]
‘옷….’
난 몸을 일으켜 옷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커피 향을 맡고 카페에 처음 간 날, 사장이 만들어 준 옷이 걸려 있었다.
엄마의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