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75)

#042화

사장은 엄마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내가 커피 향을 맡고 카페에 찾아간 것도, 하필 그날 정장 바지가 찢어진 것도 돌이켜 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엄마의 간절한 부탁이, 사장의 오랜 기다림이 켜켜이 쌓여 생긴 일들이었다.

‘어쩐지 기다렸다는 듯이 옷감을 꺼내 오더라니.’

한숨처럼 헛웃음을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난 잠드는 줄도 모르게 천천히 잠에 빠졌다.

월요일 아침, 어김없이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피곤한 기색의 사람들 사이에 비슷한 표정을 하고 선 내 모습이 창에 비쳤다.

우르르 내리는 인파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지하철 문에서 계단, 지하철역 출구까지 자연스럽게 떠밀리듯 올라갔다.

이번 주는 인턴인 내가 할 만한 일들이 많지 않았다. 부장은 쉬어 가는 주라면서, 점심시간도 당겨서 나가고, 늦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루한 듯 평화롭게 지나간 하루의 끝에 퇴근 시간이 왔다. 카페에 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진우에게서 야식을 먹자는 문자가 왔지만 거절했다. 언제부터인가 진우에게 하지 못할 말이 너무 많았다. 언젠가 다 털어놓을 수 있을까.

퇴근 후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사장이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좀 더 일찍 말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탁자 위에 놓인 노화의 이파리가 눈에 띄었다. 갈색으로 시들어 더욱 보기 흉했지만 그냥 두었다. 약방 할매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하려나.

정시 퇴근을 하고도 카페에 가지 않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제 인간 세계와 마법 세계 중에 어느 쪽이 내가 속한 곳인지 모호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 모처럼 다들 일찍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옆으로 맨 가방 안에는 노화의 이파리가 검은 비닐봉지 속에 담겨 있었다. 오늘은 카페에 갈 작정이었다.

5일 만에 가는데도 어쩐지 어색했다. 혹시라도 갔는데 카페가 사라져 있는 건 아니겠지 싶은 상상이 들 정도로.

다행히도 내가 갔을 때 카페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을 열자, 복작거리는 손님들 사이로 사장과 미고 그리고 지오의 모습이 보였다.

“야! 너 이씨, 왜 이제야 와. 바쁜 거 안 보여???”

사장이 날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옆에서 밀가루를 뒤집어쓴 지오가 환한 미소로 날 반겼다. 미고는 강아지처럼 냅다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죄송해요. 회사에 일이 좀 있어서.”

오늘따라 사장이 만든 빵이 진열대에 가득 차 있었다. 원래 저녁 시간이 되면 모두 팔려서 진열장이 텅텅 비는 게 허다했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미고가 의아해하는 내 눈빛을 읽고 설명했다.

“오늘 아침부터 사장님이 필을 받아서 빵을 엄청 많이 구웠거든요. 손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아서 다들 빵 사러 왔나 봐요.”

그도 그럴 것이 사장은 일주일에 두어 번, 자신이 내키는 날에만 빵을 만들었다.

요즘 들어 빵을 사러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손님들의 불만이 솟구치자, 사장이 제 딴엔 인심을 쓴 모양이었다.

우린 자연스럽게 일을 분담했다. 지오는 반죽을 치대고, 사장은 빵을 구웠다. 미고는 서빙을, 나는 뒷정리를 맡았다.

들이닥친 손님들이 점차 나가고, 카페 안이 한산해지자 우린 남은 빵 몇 개를 집어 들고 한 테이블로 모였다.

정신없이 일하고 나니까 어색했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난 간만에 블루베리 잼이 들어 있는 손가락 쿠키를 오도독 씹으며 말했다.

“약방 할매에게 줄 노화 이파리를 갖고 왔어요. 근데 이걸 어떻게 전해 주죠? 혹시 또 현혹의 동굴을 통과해 가야 하는 건 아니죠?”

내 말에 사장이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우, 미쳤다고 거길 또 가? 지난번에 탱다리 보니가 자기 머리카락 한 올을 줬어. 바로 찾아오라면서.”

탱다리 보니, 약방 할매의 이름이었다. 지난번 헤어지기 전에 자신을 보니라고 불러 달라던 할매의 당부가 떠올랐다.

“맞다. 할매가 이름을 부르라 하셨죠?”

“응. 너도 할매, 할매 그러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원하시는 대로.”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우리도 보니에게 갈 채비를 했다.

미고가 노화의 이파리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노화는 죽었을까요?”

지오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거렸다.

“전해 듣기로는 노화가 위독한 상태이긴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고 해요. 악초 할아범이 다친 노화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겼대요.”

사장이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화가 죽을 때 맺는다는 열매를 차지하려고 마법사들이 몰려들 게 뻔하니까 그랬겠지. 그 열매를 먹으면 영생을 한다나 뭐라나. 소문이 자자하더라.”

난 악초 할아범 이야기를 듣자 목 뒤에 털이 쭈뼛 섰다. 가능하다면 영영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 때문에 아끼는 노화까지 다쳤으니, 적개심에 불타고 있을 할아범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우린 커피숍 가운데에 만들어진 거울을 통해 순서대로 이동했다. 어느덧 지오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정에 동행했다.

레인보우 유칼립투스 나무 앞에 선 우린 차례대로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 한약재를 기름에 지글지글 볶고 있던 할매가 우릴 반갑게 맞이했다.

“보니! 저희 왔어요.”

사장이 카페서 챙겨 온 빵을 보니에게 한 아름 안겨 주며 말했다.

“오~ 맛있겠다. 이번 주 내내 밥해 먹기 귀찮아서 뿌리를 달인 물만 마시면서 버텼더니 배고팠거든.”

한 번 본 사이였지만, 어쩐지 보니는 친근한 구석이 있었다. 난 약속했던 대로 보니에게 노화의 이파리를 주었다.

“실은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아서… 후회 중이었는데 이걸 정말로 구해 오다니.”

통쾌해할 줄 알았던 보니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우린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보니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물론 사장과 나의 옛이야기는 빼고.

“이제 노화에게 악감정은 없어. 다 지난 일이지.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내 적성에 맞고 말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난 그저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 같아. 노인네가 철없는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

보니는 순간적으로 욱해서 노화를 죽여 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우리가 떠난 뒤 자신이 했던 말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하기 마련이지만, 그걸 시인하고 사과하는 사람은 드물다.

보니는 약방 안쪽의 금고에서 자물쇠를 열더니 무언가 귀해 보이는 것을 양손으로 감싼 채 들고 나왔다.

“이다가 너에게 여기까지 날 찾아오라고 한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일 거야.”

보니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 속엔 반짝거리는 비닐봉지에 든 사탕 두 개가 있었다.

“사…탕 때문이라고요?”

당황한 나는 어색해하며 사탕 두 개를 받아 들었다. 미고와 사장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귀한 거일수록 포장지가 하찮은 법이야. 그걸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 얻을 수 있도록.”

지오가 내 손에 있는 사탕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환약이야. 너희 엄마가 이전에 약방에서 일손을 도운 적이 있거든. 그때 이다가 직접 개발한 거지. 이 약은 이 세상에 딱 두 개뿐이야.”

이 약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정작 보니도 모른다고 했다. 보니는 이다가 자신에게도 알려 주지 않고 제조법을 비밀에 부쳤던 것을 보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우린 약을 받아 들고, 약방을 떠났다. 사장이 보니의 허락을 구하고, 블러드 트리에서 나무 수액을 작은 병에 담았다.

지오는 숲에 온 김에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며, 우리에게 먼저 카페에 가 있으라며 인사를 했다.

지오가 친구라고 일컫는 것들은 대개 이름 없는 풀이나 꽃이었다. 종종 길에서 만나는 박쥐나 부엉이, 오소리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파란 대가리! 너 늦지 않게 와. 싸돌아다니지 말고.”

사장이 눈을 흘기며 잔소리를 해 댔지만, 지오는 되레 기분이 좋은지 바보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장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 같은 나무 밑동 위에 이동 거울을 만들었고, 그렇게 우린 쉽게 카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사장과 미고도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우린 그만 가게 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카페 문이 열리더니 손님 한 명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동물 손님에 적응을 할 만도 했지만, 난 이제 막 카페로 들어온 루베로 손님을 보고 긴장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줏빛을 내는 미끈미끈한 피부에,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문어였다.

거대한 몸집에 축 늘어진 8개의 팔 안쪽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인간 세계에서 뱀파이어 오징어(Vampire Squid)로 불렸다. 무시무시한 생김새 때문에 ‘지옥에서 온 뱀파이어’라는 학명을 가지고 있었다.

“어, 어서 오세요. 근데 지금은 장사를 안 하는데….”

내가 그의 파란 눈동자에 넋을 놓고 말했다.

그때 인기척을 듣고 나온 사장이 루베로를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 해그냥! 너 뭐 해! 이렇게 귀한 손님을 가만히 세워 두면 어떻게 해!”

뒤따라 나온 미고가 허겁지겁 자리를 안내했다.

“펴, 편하신 곳 아무 데나 앉으세요. 사장님이 금방 커피를 내오실 거예요. 그렇죠, 사장님?!”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장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사장은 그에게 커피값을 받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만났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 보였다.

주문을 마친 그는 여덟 개의 다리로 바닥을 쓸며 창가 자리로 갔다.

“세상에! 우리 가게에 소울 스위퍼(soul sweeper)가 오다니.”

사장은 커피와 시키지도 않은 디저트를 만드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난 나지막하게 미고에게 대체 누구길래 사장이 저렇게 호들갑이냐고 물었다.

“저 손님은 누구길래 대접이 극진한 거야?”

“소울 스위퍼라고, 바다 심해에 가라앉은 영혼을 거두어 가는 존재예요.”

미고의 친절한 설명 뒤에 사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생각해 봐.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영혼이 가라앉아 있을지. 바다가 여전히 푸른빛을 내는 건 다 소울 스위퍼 덕분이라고.”

사장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바다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들,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진 사람들, 괴로움을 바다에 훌훌 털고 오는 사람들까지…. 심해에 가라앉은 그들의 영혼과 감정을 거두어서 해수면 위로 올려 보내는 게 소울 스위퍼의 일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다시 올려다봤을 때 그는 더 이상 문어가 아닌, 사람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신사가 사장이 내린 커피 향을 음미하며 잠시 여유를 즐겼다.

결코 손님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법이 없는 사장은 조심스럽게 그가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그가 사장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도(redar)라고 합니다. 커피 향이 참 좋네요.”

중년의 신사로 변한 리도의 눈동자는 여전히 영롱한 푸른빛을 냈다.

“잠깐… 당신이 이름이 리도…인가요? 소울 스위퍼라면….”

이름이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낯이 익었다. 분명… 본 적이 있었다.

난 급히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엽서를 꺼내 확인했다.

[제7 마을: 소울 스위퍼, 리도]

엄마 편지에 적힌 7마을 소울 스위퍼 리도가 지금 바로 내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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