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75)

#052화

아이의 입술이 공포에 퍼렇게 질렸다.

귀신이라도 본 듯 몸을 바들거리며 떠는 아이를 보고 마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참고 기다렸던지……. 난 누릴 자격이 있어.”

마델의 목소리 톤이 묘하게 달라졌다. 마델이 한 손에 쥔 지팡이를 휘두르자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어른 서너 명이 거뜬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마델이 아이의 멱살을 잡고 구덩이 쪽으로 끌었다. 아이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아이는 멱살이 잡힌 채 구덩이 위에 떠 있었다.

“흡!! 살, 살려 주세요.”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흐느껴 울었다. 아이는 이제야 진짜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구덩이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델의 팔로 엉겨 붙었다.

마델은 아이가 더럽고 끔찍한 바이러스라도 된다는 듯이 아이를 떨쳐 냈다.

“내가 제일 힘든 게 이거였어. 네가 자꾸 들러붙는 거. 냄새도 지독하고, 너무 소름 끼쳐.”

마델은 손바닥을 펼쳐서 아이를 구덩이로 떨어트렸다. 흙이 쏟아지며 구멍을 빠르게 메웠다. 아이의 비명 소리가 점점 둔해지고 멀어졌다.

나와 미고는 젖은 낙엽 위에서 그 현장을 지켜봤다. 사지육체가 떨렸다. 아이가 느꼈을 공포의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미고가 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일을 마친 마델은 깔깔대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하늘에서 추적추적 안개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천천히 굵어졌다. 안개비는 는개가 되고, 곧 가랑비로 변했다.

낄낄 웃던 그녀의 얼굴은 산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점점 비애에 찬 얼굴로 변했다.

올라가 있던 입꼬리는 점점 내려갔고, 바짝 마른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산을 모두 내려왔을 때 마델의 얼굴은 완전히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델은 자신이 즐겁게 관람했던 친엄마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미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심적으로 많이 지쳐 보였다. 실은 나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제일 끔찍한 건 이게 모두 지나간 과거의 일이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끔찍한 무력감에 미고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미고야, 괜찮아? 이만 돌아갈까?”

“아니요. 조금만 더….”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산 어딘지 알 것 같아. 산 초입에 있는 표지판을 잘 봐 두었어.”

미고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아이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위치는 알아냈다. 그 안도감이 왜 이렇게 비참한지.

그때 멀리서 어렴풋이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고야, 마델이 잠에서 곧 깰 거 같아. 얼른 나와야 해. 서둘러.”

사장의 말을 듣고 미고에게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너도 들었지? 이제 나가야 할 거 같아.”

미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미고가 다시 눈을 감자, 책 페이지가 차르르 넘어가듯이 주변 풍경이 순차적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어? 출구가 사라졌어요. 분명 만들어 뒀는데…….”

당황한 미고의 눈동자가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미고는 더욱 서둘러 기억 속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르게 세계가 일렁이며 변했다.

“어? 잠깐…….”

미고가 마델의 기억에서 뭔가를 봤는지 멈칫거렸다. 빠르게 바뀌던 주변 풍경이 어쩐지 낯익은 곳으로 변했다.

“여긴 우리 커피숍이잖아.”

내가 주변을 확인하며 말했다. 우린 사장의 커피숍에 있었다. 마델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마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추억을 보는 창이 있었다.

마델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추억을 보는 창을 통해 실종된 아들과의 행복한 추억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델이 그 창을 통해 보고 또 봤던 장면은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창에서는 마델이 아이를 구덩이에 밀어 넣는 순간이 재생되고 있었다. 마델은 아이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가득 차는 그 순간의 짜릿함을 즐기고 있었다.

마델이 창 너머 보았던 것은 살인의 추억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입술이 버르르 떨렸다. 미고 역시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미고는 다시 기억을 뒤지며 출구를 찾았다. 이번에 미고가 멈춘 기억은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이어진 좁은 통로였다.

“여긴 어디야? 무슨 지하실 같은데…….”

깜깜한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며 미고에게 물었다. 쾌쾌하고 습한 곰팡내가 났다. 발걸음 소리가 벽에 부딪쳐 울렸다.

“출구가 사라져서 마델에게 중요하고 인상 깊은 순간을 추려서 찾고 있어요. 정신 착란 증세 때문에 기억이 온통 미로같이 복잡하게 꼬여있어요.”

마델의 뒤를 쫓아 내려간 곳에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 뒤를 돌아앉아 있었다. 바닥에 증오를 부추기는 애벌레가 꿈틀거렸다.

“푸에르 님.”

푸… 푸에르?? 분명 마델이 뒤돌아 앉아 있는 자에게 푸에르라고 말했다. 저자가 푸에르라고?

안타깝게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마델은 푸에르의 그림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푸에르의 얼굴을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델은 나와 사장, 미고가 어딜 가서 무얼 하는지 푸에르에게 상세하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그는 항상 카페 구석에 앉아서 우릴 감시하고, 푸에르에게 이를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델이 사사로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푸에르에게 보고를 할 동안, 나는 푸에르의 정체를 알 만한 단서가 있나 싶어서, 주변을 살폈다.

작은 등 불빛이 전부였던 터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테이블 위에 낯익은 수첩이 보였다.

“어?? 저건…….”

로첼이 내게서 훔쳐 갔던 엄마의 수첩 뒷부분이었다.

‘결국 엄마의 수첩도 로첼이 푸에르의 지시를 받고 한 짓이라는 건데…….’

로첼도, 마델도 모두 푸에르 추종자들이었다. 어디에나 푸에르를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미고가 탄식하며 말했다.

“마델도 푸에르 추종자였다니……. 하…. 근데 또 출구가 이동했어요. 마델이 곧 잠에서 깰 거 같은데.”

이런 적은 미고도 처음이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괜찮아. 다시 찾아보자. 덕분에 마델이 푸에르 추종자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잖아. 이제 출구를 찾아서 나가기만 하면 돼.”

미고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마델의 기억 속을 돌아다니는 일은 마치 순간이동같이 빠르게 진행됐다. 순식간에 주변의 사물과 공기와 온도가 달라졌다.

우린 다시 마델이 아이를 살해했던 그 산 중턱으로 돌아왔다. 다시 마델이 아이를 살해하는 그 기억을 또 봐야 한다니 끔찍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델은 아이의 멱살을 쥐고 구덩이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발버둥을 치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갑자기 마델의 시선이 우리에게 멈췄다.

분명 우리가 풍경에 녹아 안 보였을 텐데… 그는 마치 우릴 발견하고 노려보는 거 같았다. 마델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마델이 구덩이에 아이를 집어 던지고, 천천히 걸어서 우리 쪽으로 왔다.

분명 방금 전 봤던 기억 속 마델의 행동과는 달랐다.

“형, 가만히 있어요.”

미고가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마델을 경계하며 말했다. 미고는 날 보호하려는 듯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온 마델이 미고의 목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입술을 비죽거리던 마델의 얼굴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면서 일그러졌다.

잠드는 풀뿌리 기운이 떨어지면서 마델이 점점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델이 양손으로 미고의 목을 졸랐다.

“크어어억.”

미고가 가까스로 까마귀로 변신해 마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미고는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가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숨겼다.

도망치려던 나는 구덩이 안에서 흐느끼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뒤로 돌았다.

이게 현실이 아니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이의 호소를 저버릴 수 없었다.

난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이가 구덩이 아래로 내려온 나를 꼭 안았다. 익사 직전에 발견한 구명보트처럼 나를 간절하고 처절하게 붙들었다.

아이를 한 손으로 꼭 안자 아이의 몸이 축 처졌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듯했다. 다행히 그 작은 입으로 숨을 붙들고 있었다. 난 고개를 들어 구덩이 위를 올려다봤다.

위에서 마델이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안간힘을 쓸수록 더 흥미롭다는 듯이.

마델이 지팡이를 휘둘렀고, 흙이 쏟아질 것을 예측한 나는 아이를 안고, 날개를 펴서 구덩이 위로 날아올랐다.

“어떻게 내 기억 안으로 들어온 거지? 난 초대한 적이 없는데.”

팔짱을 끼고 여유를 부리는 마델에게 난 악초 할아범에게 썼던 마법을 쓰기 위해 지팡이를 겨눴다. 하지만 지팡이 끝이 붉게 타오르다 말고 사그라졌다.

“잊었나 본데 여긴 내 기억 속이야. 기억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지.”

마델이 공중에 지팡이를 휘두르자, 은신하던 미고가 지팡이에서 나온 빛을 맞고 떨어졌다.

미고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마델은 쓰러진 미고의 가슴팍 위에 올라탔다.

“하던 거나 마저 해야지.”

마델은 중얼중얼거리며 미고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난 마델을 막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땅에 박혀 있던 나무뿌리가 뱀처럼 기어와 내 다리를 돌돌 감아 조여 왔다.

내 발을 묶고 있는 나무를 향해 지팡이도 휘둘러 보고 주먹질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미고의 신음 소리가 점점 줄어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 돼…. 안 돼!! 미고야!!!”

이곳이 아무리 현실이 아닌, 마델의 기억 속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서 마델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면, 현실의 미고가 무사할 거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이 녀석이 네 약점 같은데… 똑똑히 봐.”

마델의 표정이 더 이상 장난은 없다는 듯이 굳어졌다. 마델은 이 정도의 힘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과시하며 한 손으로 미고의 목덜미를 잡고 올렸다. 손톱이 미고의 연한 살갗을 파고들었다.

미고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다 못 해 창백해졌다.

세게 조이는 나무뿌리 때문에 발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젠 나무줄기까지 합세해 내 손목을 결박했다.

양팔 두 발이 모두 묶인 채 나는 미고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내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산에 울려 퍼졌다.

버둥거리던 미고의 몸이 젖은 수건처럼 축 처졌다.

마델이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듯, 이를 악물고 미고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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