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미고와 지오는 서둘러 가게 문을 닫을 준비를 했다. 사장은 로프에게 줄 빵을 두둑이 챙겼다.
“어딜 예고 없이 가려거든 빈손으로 가선 안 되지. 특히나 부탁할 일이 있을 때는 더더욱.”
사장이 갓 구운 빵과 쿠키, 새로 들어온 치즈까지 아낌없이 봉지에 담았다.
난 문득 로프에게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떠올라 바삐 움직이는 사장에게 말했다.
“전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내가 청록색 문고리를 돌리자, 사장이 발끈하며 말했다.
“뭐? 이제 아주 어디 간다 말도 안 하고, 막 드나들지? 어디 가는데!!!”
“금방 와요!”
“어딜 가냐니깐??!!”
나는 사장의 구박은 다녀와서 들으면 된다는 요량으로 서둘러 마법사 장터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사장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문밖에까지 들렸다.
“해그냥 이 자식은 자기가 로프 만나러 가자고 해 놓고, 어딜 가서 안 오는 거야?”
내가 카페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저 바로 앞에 서점을 좀 다녀왔어요.”
“뭐? 그럼 서점을 가면 간다, 말하면 되지. 그리고 서점 가는 게 뭐 그리 시급한 일이라고. 회색 마녀 학살 관련 책 보고 온 거야? 거기에 별 내용 없어.”
사장과 지오, 미고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쳤다. 나도 옆으로 메는 가방끈을 꽉 쥐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가요! 사장님이 로프의 거처가 어딘지 아신다고 했으니.”
“이동 거울로 바로는 못 가. 로프의 위치 정보를 줄 물건이 없으니. 내가 들은 바로는 외땅 폭포수 뒤편으로 가시덤불 한가운데 오두막이 있대. 거기로 가 보자고.”
우린 우선 이동 거울로 외땅 폭포수로 향했고, 그 근처 가시덤불을 찾았다. 로프의 오두막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근처에 인가가 그곳 딱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여긴가 봐요.”
작고 허름한 오두막 한 채가 가시덤불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무가 삭아서 발로 걷어차면 부러질 것처럼 낡아 보였다.
ㅡ똑똑똑.
내가 조심스럽게 노트를 하자, 안에서 무언가 떨어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인기척에서부터 낯선 손님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난 잔뜩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로프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뭐 좀 여쭐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는데요. 잠시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
잠시 기다리자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면서 한 뼘 정도 열렸다. 그 사이로 사내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보통의 키에 보통의 몸집, 어깨까지 오는 덥수룩한 갈색 수염을 한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슈.”
사장이 담담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회색 마녀 학살 사건과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어요.”
로프가 숱이 많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시비 투로 말했다.
“당신네들이 그게 왜 궁금한데.”
로프가 보내는 불쾌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장이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난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회색 마녀고, 얘 어머니도 회색 마녀야.”
사장의 말에 로프가 잠시 놀란 듯 머뭇거렸다. 그리고 좀 누그러진 듯 헛기침을 하면서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며 우리를 집으로 들였다.
오두막은 겉보다 안이 훨씬 깨끗했다.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고, 좁은 공간에도 갖출 것은 야무지게 갖춰져 있었다. 쓰러질 거 같은 외관과 달리 안은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사장이 빵 주머니를 건네자 로프가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반가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콧수염이 듬성듬성 난 얼굴을 봉지 안에 넣고 갓 구운 빵에서 나는 버터 냄새를 음미하듯 맡았다.
“이런 음식은 오랜만이군.”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깥출입은 잘 안 하는지, 주방에는 통조림이나 말린 생선같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우린 거실 가운데 놓인 남색 소파에 앉았다. 로프가 손님맞이를 하려는지 주방으로 가서 뭔가를 만지작거렸다.
“목격자랍시고 많은 이들이 날 찾아왔지만…….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사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더군. 내가 만약 그때 일을 기억한다면 지금까지 무사할 리가 없지 않겠어?”
로프가 직접 채취한 것으로 보이는 벌꿀을 찻잔에 한 스푼씩 옮겨 담으며 말했다.
“당신들도 시간 낭비한 거야.”
미고가 천천히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기억을 볼 수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선생님 기억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미고의 말에 잠시 하던 행동을 멈추었던 로프가 헛웃음을 입가에 띠며 쟁반에 담은 찻잔을 가져왔다.
“해 볼 테면 해 봐. 이미 많은 마법사들이 내 기억을 본다고 찾아왔지만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로프의 말에 주눅이 든 미고의 등을 내가 어루만졌다. 미고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로프는 미고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으로 가지. 기억을 내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까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우린 로프와 미고가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거실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는 나에게 사장이 ‘정신 사나우니 가만히 있으라.’며 한 소리 했다.
잠시 후 미고와 로프가 방에서 나왔다. 미고는 우릴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로프의 기억을 보는 것에 실패했음을 알렸다.
우린 잔뜩 실망한 미고를 위로하듯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소득 없이 오두막에서 나오는 길, 다행히 로프의 기분은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온 손님이었다면서, 기억이 나는 게 있으면 연락을 하겠다고 말했다.
로프의 오두막에서 한마디도 없던 지오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말했다.
“집 안에 키우는 식물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저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오두막을 둘러싸고 있는 가시덩굴은 원래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식물이라…….”
미고가 방 안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기억을 못 보긴 했는데요. 형이랑은 묘하게 느낌이 달랐어요. 아주 강한 마법이 걸려 있는데, 기억을 못 본다기보다는, 기억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음…. 허락을 하지 않는다라….”
사장이 미고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카페로 돌아오는 길, 나는 주변을 살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실은 제가 준비해 간 게 하나 있었거든요.”
“준비? 뭘?”
사장이 물었고, 미고와 지오도 모두 내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까 서점에 다녀왔잖아요. 그때 다람쥐 사장님한테 뭘 좀 빌렸어요.”
“뭘 빌렸는데?”
“그 서점 앞에 놓인 책 말이에요. 연필이 저절로 계속 끼적이는.”
“뭐??? 그 책을 다람쥐 사장이 빌려줬다는 말이야?”
사장이 놀라움을 넘어서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말했다. 옆에 있는 미고와 지오도 놀라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 저한테 대왕 도토리를 좀 구해 달라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다람쥐 사장님 가져다드리려고??”
지오의 말에, 사장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깟 도토리를 준다고 빌려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저절로 쓰는 책은 자아가 있어. 뭐든 스스로 결정한다고. 책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데……. 잠깐! 혹시 책이 허락했어???”
내가 어쩐지 우쭐해진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더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았다.
로프의 집으로 떠나기 전, 서점에서 있었던 일은 이랬다.
사장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난 서점으로 냅다 뛰었다. 서점 앞에 늘 놓여 있는 책을 떠올렸다. 이 책을 잘만 활용하면 진실을 알아내는 데 유용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책 앞에 서자, 잠시 멈춰서 쉬고 있던 연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그냥은 서점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손에는 다람쥐 사장을 회유할 대왕 도토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런 걸로 다람쥐 사장을 꾀어낼 수 있다고 순진하게 착각했다.]
‘뭐? 착각?’
사장에게 대왕 도토리를 주면서 책을 빌리려고 왔는데, 책에 쓰인 것을 보니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싶어 맥이 빠졌다.
어차피 거절할 거 같은데 그냥 되돌아갈까 고민하는 사이 연필이 다시 책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어도 보지 않고 포기할까 말까, 유약한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는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동물원 우리 안에서 재주부리는 원숭이가 된 기분 같다고 생각했다. 알랑방귀를 뀌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하지만 해 보지도 않고 바로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난 그다음에 쓰인 문장을 보고 놀라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책을 빌리고 싶은 모양인데, 책을 빌려주고 안 빌려주고는 다람쥐 사장이 아니라, 내 마음이거든. 책은 입이 있다면 해그냥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
때마침 서점 앞에서 서성이던 나에게 다람쥐 사장이 말을 걸었다.
“안 들어오고 앞에서 뭐 해?”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 뒤 대답 대신 책을 물끄러미 봤다.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빠른 다람쥐 사장이 곁눈질로 저절로 쓰는 책을 빠르게 읽더니 깜짝 놀라 물었다.
“뭐야! 너 지금 나한테 이 책 빌리러 온 거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당장 꺼져!! 이 책은 누구에게도 빌려줄 수도 없는 거야.”
다람쥐 사장이 소리를 빽 지르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속을 부글부글 끓였다.
그때 다시 연필이 슥슥 소리를 내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람쥐 사장은 감히, 스스로 쓰는 책을 빌려 달라는 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신경질을 냈다.
이빨로 해그냥의 옷을 갉아 먹어서 다신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속으로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책의 생각은 달랐다. 스스로 쓰는 책은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므로.]
“뭐……. 뭣이? 그럼 이 녀석에게 책을 빌려주라는 거야?”
다람쥐 사장이 책을 읽고는 황당한 것인지 황망한 것인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얼이 빠져 말했다.
나는 대화를 나누는 책과 다람쥐 사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스스로 쓰는 책은 해그냥의 여정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책장을 덮는 일은 7년 4개월 17시 2분 만이었다. 많은 시간은 주지 못하고 2주 후엔 바로 서점 앞 이 자리에 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글을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네!! 2주! 2주면 충분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람쥐 사장의 눈언저리가 일그러졌다. 이젠 나보다도 책을 향해 원망 서린 눈빛을 보냈다.
“정말 이 녀석을 따라가겠다고? 그러다가 책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쩌라고…….”
내 손에 대왕 도토리가 든 자루를 보더니, 더욱 신경질이 나는지 짧은 발을 잽싸게 놀려 자루를 뻥 차 버렸다. 대왕 도토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사방으로 굴렀다.
“책을 소중히 모셔. 2주 후에 온전한 모습으로 가져오지 않는다면, 가만 안 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