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75)

#058화

서점에서 ‘스스로 쓰는 책’을 빌려 왔다는 내 말에 사장이 제법이라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대? 용하네.”

책은 단지 현상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속마음까지 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책을 보면 다 알 수 있다는 건데……. 누군가의 속내를 알아내기에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 책은 어디에 있어요?”

어느덧 키가 한 뼘은 자란 미고가 이제 나와 제법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로프와 네가 기억을 보기 위해서 방에 들어간 사이에, 거실 소파 맞은편 진열장 아래에 책을 숨겨 두었어.”

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로프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연필이 내는 사각사각 소리 때문에 로프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프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죠?”

지오가 상상만으로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솔직히 로프에게 미안하긴 해요. 하지만 로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 책이 간파할 수도 있어요.”

난 예전에 책이 나에 대해 썼던 글귀를 떠올렸다. 이상하게 그 글귀는 잊히지 않고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했다.

[키가 크고, 외모가 멀끔하지만 어쩐지 주눅이 들고, 심란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서점 앞을 서성였다.

그는 어른의 몸뚱이를 입었지만,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무구한 아이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본인은 자신이 외지인이라고 믿었지만, 그는 이 거리의 주인이었다.]

분명 책은 나더러 거리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난 여전히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나조차도 모르는 나에 관한 정보를 어쩌면 책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책은 다음 주말쯤에 다시 로프네 집에 가서 가져올 거예요. 뭘 두고 갔다고 대충 둘러대야죠.”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로 돌아온 우리는 함께 때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각자 생각이 많아서 그랬는지 별다르게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식사 후 집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서 로프의 진열장 아래에 두고 온 책을 떠올리다가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인턴 생활도 이번 주로 끝이었다. 돌아오는 금요일, 나는 인턴과 정규직의 갈림길 사이에서 어디로든 가게 될 것이다.

기대가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다만 내가 정규직 전환될 가능성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회식은 대부분 빠졌고, 야근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회사 내 간부들 중에서 날 얌체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회사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다, 뭐 이런 어필이 부족하다나?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성의가 부족하다나?

정작 나 스스로 평가하자면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

가급적 야근은 안 했을지언정 오늘 해야 할 업무를 두고 퇴근한 적은 없었다. 잘 보이려고 애쓴 적은 없었지만, 늘 부서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하긴 어디 나만 그랬겠나. 인턴들이 다 그랬지. 다 열심히들 했지.

근무를 같이했던 김주연 인턴이 떠올랐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유독 정규직 전환이 간절해 보였다. 백 척 장대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긴장한 얼굴이 늘 파리하게 질려 있는 게.

‘주연 씨는 꼭 정규직 됐으면 좋겠네.’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경황으로 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도 참 우습다.

마법 세계에 드나들게 된 이후로 현실 감각이 좀 떨어진 건 사실이다. 내가 알던 현실이 다가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 어쩐지 여유가 생긴 기분이랄까.

삶이 정답지가 불탄 시험지 같다. 채점은 내가 한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전 같으면 죽네 사네, 전전긍긍했을 법한 일도 비교적 담담한 걸 보면. 마법 같은 일이다. 진짜 마법일 수도.

***

인턴십 종료, 정규직 전환 결과를 발표하는 금요일이 왔다.

놀랍게도 나는 오늘이 정규직 전환을 발표하는 날임을 새하얗게 잊고 말았다.

“해 인턴, 점심시간 전에 발표지? 어우~ 떨리겠어.”

한껏 신이 난 고재식 팀장이 능글맞게 말했다.

“아, 그게 오늘이었어요?”라고 말할 뻔했지만, 참았다. 괜한 허세로 보일 게 뻔했다.

김주연 인턴의 파리한 인상은 변함이 없었다. 난 그녀가 정규직에 합격해 저 얼굴이 난로 쐰 것처럼 후끈해진 것이 보고 싶었다.

곧 회의를 마치고 온 고재식 부장이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꼬리를 간신히 고정하고 뒷짐 지고 걸어왔다. 결과가 나온 것이다.

고 부장의 입을 통해 결과를 듣고 싶지 않아서 급히 사내 게시판을 뒤졌다.

[2022년 상반기 인턴-정규직 전환 결과 발표]

게시물을 클릭해서 내 이름을 찾기도 전에, 고 부장이 재빨리 입을 놀렸다. 꼭 자신의 입으로 그 소식을 전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이.

“안타깝게 됐어. 너무 상심하지 마.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야.”

고 부장은 이 순간이 자신의 지지부진한 인생 속에서 몇 안 되는 찬란한 시간이라는 양 들떠 있었다.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안간힘을 다해 차지하려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 그 우월감을 위로 삼아 자신의 삶을 다독이고 있었다.

바로 옆 부서에 있는 김주연 인턴에게도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김주연 인턴은 솔직히 진짜 붙을 줄 알았어. 좀 열심히 했냐고! 아니, 간부들이 잔인한 구석이 있다니까.”

고 부장은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오늘 회식은 자신이 쏘겠다면서 삼겹살집 예약을 하라고 시켰다. 이 와중에 회식을 하자니 제정신인가.

“전 약속이 있어요.”

나는 의식적으로 뒤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쳇. 해 인턴은 안 갈 줄 알았어. 기대도 안 했다고! 주연 씨는 갈 거지?”

멀찍이 신음 소리처럼 작게 주연의 음성이 들렸다.

“네…….”

“역시! 결과가 어떻든 사람이 마무리가 중요한 거거든. 마무리를 잘해야 다른 시작도 있는 거야. 우리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닐 수도 있잖아.”

결국 이렇게 끝이 났다. 남은 업무 시간 동안은 짐 정리를 했다. 이 마당에 누가 나한테 업무를 주겠는가.

인턴들이 모여 있는 단체 카톡방은 전에 없이 조용했다. 운명이 엇갈린 거지. 더 이상 단합할 여지가 없었다. 이제 새로운 방을 파겠지. 붙은 사람들끼리.

기대가 없었지만, 나 역시 좀 우울했다. 누가 거절당하는 걸 즐기겠는가. 네가 싫다는데, 기어코 너는 아니라는데.

다만 하늘이 무너지는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심장에 추가 달리는 그런 기분도 아니고, 적당히 견딜 만한 서운함 정도랄까.

6시 업무 종료 시간에 맞춰 그간 오가며 눈인사를 나눴던 몇몇 부장들에게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섰다.

사원증은 오전에 반납했다. 정규직 전환 결과 나오자마자 사원증 반납하라고 어찌나 성화인지. 내가 행여나 기념품으로 챙겨 가기라도 할까 봐 그런가? 어우. 됐다 그래.

발걸음이 어색하리만치 가벼웠다. 보통 마음이 아쉬우면 발걸음은 무겁기 마련인데도. 후회가 없어서 그런가.

공채 기간은 이미 지났으니, 이제 다른 인턴십 기회가 올 때까지 알바를 구해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순식간에 카페 앞에 도착했다.

우선 로프의 집에서 책을 찾아올 생각이었다. 책이 언제 돌아올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서점 사장님을 생각하니 오늘 처음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페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고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형! 오늘이죠! 형이 다니는 회사에서 뭐 발표한다고 한 날이. 그거 되게 중요한 거라면서요. 자꾸 사장님이 다음 주라는 거예요. 분명 오늘인데.”

사장이 갓 끓인 호박죽에 초콜릿을 강판에 갈아 치즈처럼 뿌리면서 나를 봤다.

“오늘 맞아요. 그리고 정규직 떨어졌어요. 오늘부로 백수예요. 백수.”

사장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정규? 뭐? 암튼 거 잘됐다. 만날천날 그놈의 회사, 회사. 이제 안 가도 된다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회사를 가야 돈을 벌고 먹고살 수가 있다고요. 일단 편의점 알바 자리라도 다시 구하려고요.”

“먹는 거야 여기서 삼시 세끼 먹으면 되고. 잠잘 곳은 있고. 뭐가 문제야.”

더 말해 봐야 사장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리를 잡고 초콜릿이 뿌려진 호박죽을 먹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박과 초코의 조합이 오묘하다 싶기도 했지만, 먹다 보니 놀라울 정도로 맛이 잘 어우러졌다.

나는 사장에게 허락을 구하고, 팔뚝만 한 초콜릿을 추가로 강판에 잔뜩 갈아 넣었다. 단 것이 당기는 날이었다.

어느새 미고와 지오가 내 바로 옆에 앉아서 오늘 온종일 카페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떠들었다. 너희도 좀 먹으라고 했더니, 이미 한 솥 먹었다나.

로뚜 아저씨는 살이 3킬로그램 정도 쪘다고 하고, 오랜만에 슈슈들도 왔다 갔다고 한다.

수프를 다 먹고 따뜻하게 채워진 배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사장에게 물었다.

“로프에게 가서 책을 가져오기엔 좀 늦은 시간이죠?”

“아니. 거긴 아직 저녁 시간 전이잖아. 갓 끓인 초코 호박죽 한 그릇 가져다주면 반가워할 거다. 왜, 지금 가게? 책을 빨리 가져올수록 좋긴 하지.”

미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로프에게 들키거나, 혹시라도 책이 상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아까 마법사 장터 갔다가 서점에 다람쥐 사장님 만났는데 열이 바짝 올라 있더라고요. 형 보면 가만 안 둘 거라고 씩씩대고…. 좀 무서웠어요.”

“그, 그래?”

난 다람쥐 사장의 날카로운 앞니를 떠올리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다 먹었으면 얼른 가자.”

우린 이동 거울을 통해 로프의 집으로 향했다.

로프의 오두막 앞에 도착한 우린 두 뼘 정도 열려 있는 현관문 앞을 서성였다.

“문이 열려 있네요?”

미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프를 찾았다.

문이 열려 있다고 주인도 없는 집에 대뜸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로프를 찾아야 했다.

“계세요? 집 안에 계시면 들어가도 될까요???”

한참 동안 로프의 이름을 불렀지만 답이 없자, 사장이 그냥 집에 들어가 보자며 고갯짓을 했다.

“그래도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게 좀…….”

주저하는 나에게 사장이 답답한지 쏘아붙였다.

“얼른 책만 가지고 나오면 되잖아!”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다들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안 계세요? 저 잠깐 뭐 좀 두고 간 게 있어서… 그것만 가지고 갈게요.”

난 로프가 듣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혼잣말처럼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서둘러 소파 맞은편 진열장의 바닥을 확인했다. 책도 이제 그만 서점을 떠날 준비를 한 건지 표지가 덮여 있었다.

책이 손에 들어오자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제일 마지막 장을 펼쳤다.

“어? 이, 이건…… 피잖아.”

마지막 종이에 뻘건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피가 번진 종이 위로 적힌 글을 확인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로프는 책을 찢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되레 자신의 손만 베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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