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75)

#059화

로프가 책을 찢으려고 했다고?

글을 읽자마자, 싸늘한 한기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순식간에 통과했다.

책을 찢으려고 했다니. 어째서? 내가 봐선 안 되는 내용이라도 적힌 것일까? 대체 로프의 정체가 뭐지.

다행히도 책은 로프의 손에 찢기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찢으려 한 로프의 손에 상처가 생기면서 책에 핏자국이 묻은 모양이었다.

다른 내용도 확인하려던 찰나, 문 밖에서 미고가 날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 책 챙겼으면 얼른 나와요!”

“잠, 잠깐만.”

난 서둘러 글을 읽어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확인해야만 했다.

[로프가 다소 껄렁한 태도로 귀를 후비며 진열장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부터 은근히 자신을 거슬리게 하던 소리의 출처를 찾을 작정이었다.

생활 소음 속에서 작지만 리듬을 가지고 존재감을 발산하던 소리는 다름 아닌 연필 소리였다.

해그냥은 떠나기 전 연필 소리를 조심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스스로 쓰는 책’은 누구의 눈치를 볼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진열장 아래에 놓인 책을 발견한 로프는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책을 꺼냈다.

“이건 또 뭐야….”

놀란 그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책장을 앞뒤로 세차게 넘겼다.

해그냥이 몰래 이 책을 숨겨 놓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프는 그간 ‘스스로 쓰는 책’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지껄였는지 빠른 속도로 확인했다.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책을 읽어 내려가던 로프는 집 밖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저만치 가시덩굴 사이로 몰려오는 해그냥과 무리들이 보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적힌 페이지를 찢기 위해서 한 손으로 종이 뭉텅이를 세게 쥐고 당겼다.

“아악! 이런 씨.”

종이가 예리한 칼날처럼 로프의 손바닥을 베었다.

몇 번의 시도에도 손의 살점만 떨어져 나갈 뿐, 단 한 장의 종이도 찢을 수 없었다. 그는 분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책과 씨름하는 사이, 해그냥과 그의 무리들은 현관문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는 상처로 엉망이 된 손을 입고 있던 옷으로 꾹 눌러 지혈했다. 해그냥이 자신 몰래 이런 짓을 꾸몄다는 사실이 분하고 치가 떨렸지만, 책을 찢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해그냥이 집에 들어오기 직전에 로프는 책을 챙겨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책을 찢는 것에도 실패했던 그에게 책을 가져가는 일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책은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뿌리라도 내렸나 싶을 만큼 단단히 땅과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쓰는 책’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자신이 진땀을 흘리는 모습을 책이 비웃고 있는 줄은 상상조차 못 했으니.]

‘잠깐, 이건 내가 오기 바로 직전에 쓰인 글이잖아!’

책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찰나, 미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얼른 나와 봐요! 로프를 만났어요.”

미고의 말을 듣고 바로 집에서 나왔지만, 로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프는 어딨어?”

지오가 가시덤불을 헤치며 집에서 멀리 달아나는 로프의 뒷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잠깐 볼일이 있다면서 우리더러 집에서 기다리라던데요?”

사장은 가시덤불 너머 숲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로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왜 저래? 꼭 도망가는 사람처럼… 뭔 죄졌어?”

내가 로프의 집에 들어간 사이 로프는 뒷문으로 나왔고, 마침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장과 딱 마주친 것이었다.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가방에 서둘러 담으면서 말했다.

“로프를 놓치면 안 돼요! 로프가 책을 찢으려고 했어요. 그 이유는 아직 확인하진 못했지만 책에 담겨 있을 거예요. 얼른 가요!”

“뭐? 로프가 책을 찢어?”

사장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나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사장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더 이상 로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럴 시간이 없는데, 조급한 마음 탓인지 호흡마저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사장이 그런 나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까 날 보고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게 영 수상해서 내가 몰래 묶어 놨지.”

사장의 손에는 이전에 슈슈들의 뒤를 쫓을 때처럼 붉은 실이 들려 있었다.

도망치듯 뒤꽁무니를 내빼는 로프가 수상쩍었던 사장이 로프의 발목에 몰래 붉은 실을 묶은 것이었다.

“역시!!”

미고가 엄지를 치켜세웠고, 로프를 놓친 줄 알았던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장은 안 그래도 매서운 눈을 더욱 희번덕거렸다.

“일단 해그냥, 너는 미고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계속 책을 읽어. 대체 왜 로프가 책을 찢으려고 했는지 알아내야 하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프의 뒤를 밟자. 들켜선 안 되니까 거리를 무리하게 좁히지 않을 거야. 미고는 해그냥이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도 우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잘 부축하고. 지오는 주변 식물들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취합해.”

“네!”

미고와 지오 역시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날이 완전히 저물어 온통 암흑이었다. 나는 반딧불이가 내는 불빛에 의지해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뒤에서부터 중요해 보이는 부분을 추려서 읽었다.

책을 읽느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나를 미고가 붙잡았다. 난 그 와중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그냥이 왔다 간 후, 로프는 어디론가 급히 전갈을 부쳤다. 상기된 얼굴에 타락한 희망이 비쳐 보였다.

“다시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뭐든 하겠어. 푸에르 님이 돌아오시기만 하면….”

그는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면서 거실 바닥을 뱅뱅 돌았다.]

글에서 ‘푸에르’란 말이 나오자, 심장이 요동쳤다. 로프 역시 푸에르 추종자였다는 것인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자, 미고가 날 더 세게 붙들었다.

“형! 왜 그래요?”

“로프도 푸에르 추종자였어. 로프가 책을 찢어 감추려고 했던 사실이 이건 거 같아.”

“하! 말도 안 돼요…. 어떻게 하나같이 다….”

앞서 걸어가던 사장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사장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잘됐네.”

“잘되다니요?”

미고가 사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로프가 푸에르 추종자라며. 그럼 지금 쟤가 어딜 가겠어?”

“그럼 사장님 생각엔 지금 로프가 향하는 곳이….”

“그래. 푸에르의 거처일 수도 있지. 쪼르르 가서 보고하려는 거 아니겠어?”

미고와 내가 놀라 동시에 눈을 맞췄다. 푸에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사장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속삭였다.

“멈춰. 로프가 저기로 들어갔어.”

사장의 시선이 멈춘 곳에 목재로 지어진 허름한 창고가 있었다. 로프의 발목에 묶인 붉은 실이 창고 문틈으로 팽팽히 당겨졌다.

창고 안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들렸다. 로프 말고도 안에 누군가 더 있었다.

우린 자세를 낮추고 창고 쪽으로 전진했다. 작은 소리도 잘 듣는 미고가 창고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듣더니 말했다.

“안에서 돈돈의 목소리도 들려요.”

사장이 채근하듯 물었다.

“푸에르는, 푸에르는 있어?”

“곧… 곧 온대요!”

창고 옆쪽에 작게 난 창문 앞에 서자, 우리에게도 안에서 하는 대화가 들렸다. 커튼 사이로 누군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도 보였다.

“에이씨…. 내가 푸에르 님을 따르는 자라는 걸 들켰어.”

로프가 낡은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소파가 푹 꺼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모자란 새끼. 하긴 뭔 상관이야. 이참에 푸에르 님이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인 것을.”

돈돈이 이죽거리며 들고 있던 도넛을 한입에 넣었다.

“푸에르 님이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죽였겠지. 푸에르 님은 해그냥을 죽일 생각이 없어.”

“뭐? 그럼 계속 살려 둘 생각이라고?”

“갖고 놀 모양이야. 적당히 먹이도 주고, 쳇바퀴도 돌리면서.”

돈돈의 말에 로프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얼른 죽이시지. 특히나 그 회색 마녀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어. 내게 그런 영광을 허락하실까?”

로프가 이내 답답한 듯 덥수룩한 수염을 거칠게 떼어 냈다. 수염은 가짜였고, 말끔하게 면도한 그의 비열한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간지러운지 턱을 벅벅 긁었다.

“어? 조용해 봐. 푸에르 님이 오시는 거 같아.”

푸에르가 온다는 돈돈의 말을 듣자, 머리끝이 곤두섰다. 사장과 미고도 긴장한 채 숨을 죽였다.

이어 특유의 불쾌하게 귓가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분명 푸에르의 것이었다. 마델의 기억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같았다.

“시킨 일은?”

돈돈이 들고 있던 도넛을 바닥에 던지고, 안절부절 양손을 모으며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푸, 푸에르 님, 죄송합니다. 노화가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 악초 할아범이 어디에 숨겼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제가 꼭 찾아오겠습니다.”

노기를 띤 목소리가 이번엔 로프를 향했다.

“넌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온 거지?”

로프가 쭈뼛거리며 몸을 강박적으로 앞뒤로 흔들었다. 극도로 긴장했을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인 듯했다.

“실은 해그냥과 그 무리들이 제가 푸에르 님 추종자인 것을 알아냈습니다. 요망한 책을 저희 집에 숨겨 뒀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그들을 피해 몸을 숨겨야 합니다. 푸에르 님, 부디 저에게 머물 곳을….”

로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푸에르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귓구멍에 깨진 유리 조각을 쏟아붓는 기분이 들었다.

겁에 질린 로프는 푸에르의 비위를 맞추려 억지웃음을 지었다.

“우습구나. 그들을 모두 주렁주렁 달고 이곳까지 왔으면서 들키지 않아야 한다니….”

“네? 제가 그들을 달고 왔다고요? 그게 대체 무슨 말….”

푸에르는 우리가 몰래 로프의 뒤를 밟아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충격 때문인지 시야가 어두워지며 짧은 현기증을 느꼈다.

놀란 미고가 떨리는 몸을 움츠리며 내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로프는 그제야 자신의 발목에 묶인 붉은 실이 보이는지, 신경질적으로 실을 뜯었다.

로프가 붉은 실을 당기자, 사장의 손에 들려 있던 반대편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장이 숨을 내쉬며 자신의 올림머리를 지탱하고 있는 화가 선생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나서지 말고, 잠자코 여기 있어.”

사장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와 미고가 뒤따라가서 문고리를 잡았을 때는 이미 문이 잠긴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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