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불길이 더욱더 세차게 타올랐다. 창고는 삽시간에 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문짝이 타면서 내 등을 덮쳤다. 그 충격으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미고는 사장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지만, 사장은 좀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늘 사장의 강한 모습만 보았던지라 미고의 충격이 더 큰 듯했다.
몸이 점점 바닥으로 처졌다. 얼마나 더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창고가 불타면서 내뿜는 유독 가스 때문에 점점 의식이 흐릿해져 갔다.
나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았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양팔로 사장과 미고를 꽉 잡았다. 불길 속에 계속 있을 수는 없다. 날아올라야 해. 이를 악물었지만 불길 앞에서 쉽게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았다.
그때 쾅 소리와 함께, 창고 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폭발음과 함께 창고가 반쯤 부서졌고, 검회색 연기를 가르며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지오…!”
지오는 2미터도 더 되는 거대한 새를 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날 수 있는 새 중에 가장 크다고 알려진 새인 넓적부리황새, 슈빌이었다.
치솟는 불길 사이로 지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날개를 거두고, 내 품에 있던 사장과 미고를 먼저 들어 올렸다. 새가 긴 다리를 굽혀 우리가 등에 탈 수 있도록 몸을 숙였다. 미고와 사장이 타고, 난 맨 마지막으로 등에 올라탔다.
슈빌은 잠시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이더니, 발돋움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오가 슈빌의 왼쪽 날개에 붙은 불을 황급히 손바닥으로 짓눌러 껐다. 난 한 손으로 슈빌의 깃털을 꽉 붙들고, 나머지 손으로 미고와 사장의 등을 받쳤다. 차고 깊은 밤바람에 몸 안에 붙은 뜨거운 기운도 조금씩 식는 듯했다.
난 옆쪽으로 얼핏 보이는 슈빌의 거대하고 단단한 부리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별안간 정신을 차리고 지오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지오가 그제야 한숨 돌리며 답했다.
“로프의 뒤를 쫓는 와중에 우연히 슈빌의 발자국과 배설물을 봤거든요. 발자국을 보니 제가 이전에 치료해 준 적이 있는 친구였어요. 새라고 발바닥 모양이 모두 똑같은 건 아니니까요.”
지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슈빌의 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지오의 어깨엔 화가선생이 타고 있었다.
“아까 사장님이 창고 들어가시는 거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도움을 요청하러 갔어요. 다행히 흔쾌히 저를 따라와 줬고요. 고마운 친구죠.”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고마워.”
지오는 대답 대신 사장의 잘린 머리카락을 살폈다. 푸에르에게 잘린 머리카락은 보기 흉한 진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장님… 충격이 큰 거 같아요. 사장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을 땐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었으니까요.”
서로에게 고개를 기대고 잠이 든 미고와 사장을 보며 마음이 심란했다.
“좀 자 둬요. 밤새 가야 해요.”
“응. 고마워.”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동이 트고, 마법사 장터 앞 청록색 문 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슈빌의 등에서 차례대로 내리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법 세계에서도 새를 타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에요. 새들이 태워 주질 않죠. 특히 이렇게나 많은 사람은 더더욱.”
지오는 슈빌의 커다란 부리에 자기 이마를 부드럽게 비볐다. 우리를 모두 땅에 내려놓은 슈빌은 다시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랐다. 우린 슈빌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난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가슴 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스스로 쓰는 책’을 다람쥐 사장에게 돌려줬다. 슈빌의 등에서 남은 내용은 모두 읽었다. 로프가 푸에르 추종자였다는 사실 외에 의미 있는 내용은 없었다. 다람쥐 사장은 내 꼬락서니를 보더니 조용히 책을 받아들고는 서점 안쪽으로 총총 사라졌다.
한숨 자고 카페에 도착한 사장은 정신은 차렸지만 여전히 말이 없었다. 우린 그런 사장에게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거리를 두고 기다릴 뿐.
주방에 들어선 사장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장이 토마토를 뭉근한 불에 끓일 동안, 나는 옆에서 말린 꽃잎 차를 우리고, 간단히 청소를 했다.
지오는 카페 구석에 잘 보관해 둔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약초와 연고들이 담겨 있었다. 지오는 마치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듯, 잘 빻은 분홍 꽃잎을 사장의 머리끝에 묻히고 비닐로 돌돌 감았다.
사장은 귀찮은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손을 휘휘 저었지만, 지오는 끈질기게 사장의 뒤를 따라다니며 끝끝내 원하는 대로 완성을 하고야 말았다.
우린 토마토 수프와 주먹밥이 놓인 식탁에 둘러앉았다. 소박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식사였다.
“나 이제 괜찮아.”
다들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을 안 사장이 말했다.
“그니까 다들 그 부담스러운 눈빛들 좀 거둬 줄래? 느끼해서 못 참겠거든.”
사장의 말에 우린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킥킥댔다. 우린 그제야 안심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속이 든든히 차오르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사장이 운을 뗐다.
“다들 푸에르가 밀짚 인형으로 로프를 조종한 건 알고 있을 거야. 다만 푸에르가 어떻게 내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었는지……. 나도 그게 의문이었어. 근데 이제 좀 알 거 같아.”
사장의 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긴장감에 배 속에서 방금 먹은 토마토 수프가 보글보글 끓는 기분이 들었다.
“해그냥, 너희 어머니 유골을 도둑맞았잖아. 어머니 유골이 푸에르의 손에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돼.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미고와 지오가 나보다 먼저 탄식을 뱉었다. 기회를 놓친 나는 그저 숨을 참고 사장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푸에르가 너희 어머니 유골에 남아 있는 마력을 이용했다면 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란 소리야.”
참담한 마음에 무력감이 더해져 말문이 막혔다. 사장의 말대로 엄마의 유골을 가져간 범인이 푸에르일 거란 짐작은 했다. 이토록 회색 마녀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는 자는 푸에르밖에 없었으니.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뭘까. 놈에게 이유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그때 출입문에 달린 작은 종이 땡그랑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손님 두어 명이 들어왔다.
사장이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오늘 일 안 해. 다음에 와.”
실망한 이들이 눈치를 살피며 카페를 나갔다. 이어 바로 누군가 또 들어오자, 사장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문 닫을 거니까….”
사장이 말을 하다 말고, 카페에 들어온 남자의 차림을 살폈다.
하얀색 제복 비스름한 옷을 입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걸어와서 옆으로 메고 있던 사각형의 가방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속으로 우편 집배원 같은 걸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남자가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사장이 편지를 향해 손을 뻗자, 남자는 손바닥으로 편지를 지그시 눌렀다.
“아뇨. 편지는 해그냥 씨에게 온 겁니다.”
“저한테요?”
내가 천천히 손을 뻗어 편지를 뒤집었다. 받는 사람 이름에 분명 내 이름이 적혀 있다. 이어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욘 게일?”
욘 게일이면 대예언가이자, 엄마의 편지에도 적힌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사장이 내 손에 있는 편지를 쏙 빼 가더니 발신인을 확인했다.
“욘 게일이 너한테 편지를 보냈다고?”
미고가 자신도 모르게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욘 게일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싶어서 미고와 지오의 눈치를 살폈다. 둘은 얼른 편지를 뜯어 보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난 황색의 실링을 떼어 내고 편지를 꺼냈다. 편지를 전해 준 이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3일 후 자정, 4마을 디디오강]
편지에 적힌 글은 이게 다였다.
“3일 후 자정에 디디오강에서 만나자는 건가?”
난 편지를 펼쳐서 사장과 미고, 지오에게 보였다.
“이때 만나자는 거 맞는 거 같은데요?”
미고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난데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었으니.
“엄마가 만나 보라고 한 사람이니까 잘된 일인 거 같긴 한데……. 용건이 뭘까요?”
지오가 손바닥으로 식탁을 찰싹 때리면서 말했다.
“혹시 욘이 어떤 미래라도 본 게 아닐까요? 그래서 미리 은밀하게 알려 주려고!”
“그런가?”
지오가 보따리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왔다. ‘예언의 역사’라고 적힌 두꺼운 책 79페이지를 펼치자 욘 게일의 사진이 보였다.
곱슬머리에 헝클어진 머리 스타일, 낡은 잿빛 옷을 걸치고 있는 50대 남성의 모습이었다. 기본적으로 서글서글 웃는 인상이었지만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생각보다 젊네요. 전 대예언가라고 하기에 나이가 더 많은 줄 알았어요.”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기미가 촘촘히 박혀 있어서, 학자라기보다 농사꾼이 더 어울렸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에요.”
지오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책을 꼭 끌어안았다.
사장은 피곤한지 등을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으며 말했다.
“지가 용건이 있으면 찾아올 것이지. 사람을 왜 오라 가라 하는 거야? 맘에 안 드네. 아무튼 이제 너도 집에 가서 좀 쉬어.”
사장은 오늘은 장사를 접을 거라면서 문을 닫고, 마법사 장터로 나갔다. 기분 전환엔 쇼핑이라나 뭐라나.
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내 걱정에 기어코 집에 따라오겠다는 미고에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하곤 카페를 나섰다.
집에 오자마자 욘에게서 온 편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욘이 예언가라면 혹시 내 미래도 알까?
복잡 미묘한 마음에 벽에 기댄 채 검지로 편지 모서리로 슥슥 문댔다.
그때였다. 갑자기 왼쪽 눈에 밤바다처럼 검은색 잔상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잔상은 점점 크기가 커지더니 아예 한쪽 시야를 검게 덮어 버렸다.
그리고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어떤 장면이 점차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또 미래를 보는 건가.’
먹을 푼 강처럼 어두운 하늘, 누군가 맨발로 강기슭을 빠르게 달렸다. 그 발재간이 어찌나 재빠른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조금씩 속도를 낮췄다. 누구지?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모르는 사람의 미래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남자가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숲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양손 양발이 각기 밧줄에 묶여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남자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공포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남자의 몸이 대(大)자로 쭉쭉 뻗었다.
자세히 보니 네 개의 밧줄을, 각기 다른 나무 위에 오른 네 명의 사람이 잡고 있었다. 공중에 붕 뜬 남자의 얼굴이 설핏 보였다.
남자의 사지를 묶은 줄이 점점 더 팽팽하게 당겨졌다. 괴이한 신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밧줄이 묶인 사람의 팔다리에서 우둑우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 팔다리가 겹겹이 잡은 스케치북처럼 사람의 몸통에서 찢겨 나갔다. 눈앞에 보이는 잔혹한 광경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잠, 잠깐. 저 사람...’
달빛이 내려앉은 남자의 얼굴을 고요히 바라봤다. 다시 보니 낯이 익은 게,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욘 게일의 미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