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75)

#065화

지오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오의 제안을 수락했다. 정확히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종탑 안에는 들어가서 뭐 하려고 그래…….”

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네가 알 거 없어.”

지오의 단호한 말에, 헨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종탑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종탑은 가까이서 보니 새삼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높았다. 종탑 입구에 멈춰 선 헨이 나에게 말했다.

“종탑 맨 위층에 죄수가 있어요. 그곳에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올 거니까…….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수상한 행동은 하지 말고요. 내 몸종이라고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요. 아씨……. 그나저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헨은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꼬였을까, 슬슬 열이 뻗치는 모양이었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씩씩거렸다.

헨은 만만한 나에게 신경질을 낼 작정이었고, 나는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이를 적당히 받아 주기로 작정했다.

헨이 종탑 입구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바닥에서 작게 열과 빛이 발산됐다.

앞서 헨이 종탑 앞에서 만났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종탑 문지기였고, 일종의 지문 인식 같은 절차 없이는 그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무래도 물건이 잘 전달됐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지기는 헨 뒤에 서 있는 날 보더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누구죠?”

“제 몸종입니다. 아버지께 직접 동행을 지시하셨으니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헨이 아버지를 들먹이자, 문지기는 경계 태세를 한풀 꺾고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욘의 보좌 장로라더니, 그 위세를 알 만했다.

우린 천천히 종탑 계단을 올랐다. 계단 폭은 넓었지만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다 보니 이내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올라가는 내내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공기가 점점 후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메슥거려 하는 것을 눈치챈 헨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뭐 하러 이런 곳에 오겠다고. 쯧쯧. 지오 걔도 이렇게 나대다가 큰코다치지. 지가 감히 누굴 협박해. 협박하길!”

“우린 그저 이곳에 누가 있는지,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하냐고.”

지오 앞에서 비굴했던 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이제 아예 내게 말을 놓고, 이 말 저 말 씨부렁거리기 시작했다.

“굳이 알고 싶다니까 말해 주는 건데, 맨 꼭대기 층에 가면 4명의 죄수가 감옥에 가둬져 있어. 간부 한 명이 이들을 감시하고 있지. 펠라는 욘이 가장 신뢰하는 수행 장로야. 나랑 비슷한 또래인데, 뭐 출세했지. 그 나이에 벌써 장로라니! 새끼가 욘의 신임을 받다 보니 거만하게 굴어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헨은 입이 싸고 말이 많았다. 종탑 위로 올라가는 내내, 말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무료하게 계단을 오르는 일이 지루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듣다 보니 그 안에 제법 쓸 만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허술한 자에게 이리 위험한 일을 시키다니……. 나는 그를 떠볼 작정으로 물었다.

“욘이 코르 페르다 꽃을 사람에게 써선 안 된다고 했다던데…….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겁니까? 욘이 알기라도 하면 큰일…….”

헨이 내 말을 가로채며 코웃음을 지었다. 뭘 알지도 못하면서 나불거리냐, 딱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내 작전이 먹힌 거 같았다.

“여기 죄수들은 죄수원에 있는 자들이랑 차원이 다른 마력의 소유자들이라고. 이들을 통제하려면 코르 페르다 꽃의 독을 이용해서 자유 의지를 조금씩 죽여야 해. 그냥 뒀다가 뭔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꽃을 배달하는 거지, 무슨 잘못이 있는 것처럼 나와 아버지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욘이 알면 어쩌냐고? 혹시 욘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아버지를 내칠 수는 없을 거야. 이게 다 욘을 위한 일이니까.”

“욘을 위한 일이라고요?”

욘이 금지한 일을 하면서, 욘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는 그 뻔뻔함이 뭔가 싶었는데, 순간 헨이 웃음기를 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들이 미래에 욘을 살해할 자들이라고 하더군. 욘이 직접 본 미래야.”

헨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역시 욘도, 내가 본 미래를 본 것일까. 그래서 이들을 여기에 가둔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느덧 종탑 꼭대기에 이르렀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감옥이 보였다.

동굴같이 넓고 어두운 공간에서 도깨비불이 간헐적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창살이 쳐져 있는 옛날식 감옥 안에 누군가 쭈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의 등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미래에서 욘을 살해하고 달빛 아래서 환호성을 지른 자가 분명했다. 그는 한 손으로 우걱우걱 감자를 먹고 있었다. 더러운 누더기 사이로 앙상한 갈비뼈가 보였다.

‘맞아……. 이 사람이 분명해!’

난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감전된 듯이 전기가 흘렀다. 헨이 여전히 계단 끝에 서 있는 날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참네……. 죄수들은 감옥 밖으로 못 나오니까 무서워할 거 없어. 이리 오라니까?”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옆에 또 다른 감옥이 보였다. 머리가 긴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에 엉킨 끈끈이를 떼고 있었다. 저 더벅머리 여자 역시 미래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자는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워낙 숱이 많기도 했고.

여자의 맞은편에는 좀 더 어려 보이는 남자가 갇혀 있었다. 볼에 움푹 파인 상처가 도드라져 보였다. 예리한 칼로 도려낸 것처럼 살점이 매끈하게 잘려 있었다.

언뜻 봐선 성별이 헷갈렸지만, 자세히 보니 곱상하게 생긴 남자였다. 역시나 아주 말랐고 키도 작았다.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어서 눈매가 어떤지는 볼 수 없었다.

너무 빨리 숲속으로 사라져서 미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던 나머지 한 명은 감옥 맨 끝 방에 있었다.

우락부락한 인상에 얼굴형이 매끈하지 못하고, 피부가 오돌토돌했다. 턱을 좌우로 움직이며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었는데,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둥그렇게 둘러싼 감옥의 한가운데 이들을 감시하는 교도관처럼 보이는 이가 우뚝 서 있었다.

욘에게 신임을 받는다던 수행 장로 펠라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군인처럼 몸에 한껏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문지기 앞에서 보였던 기세등등한 모습은 어디 가고, 펠라의 앞에 선 헨은 바짝 얼어서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께서 꽃 배달이 잘됐는지 직접 확인하라고 당부하셔서요…….”

헨은 긴장한 티를 팍팍 내면서, 횡설수설했다. 덩달아 나까지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남자는 대답 대신 잔근육이 보이는 팔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구석에서 커다란 항아리가 펄펄 끓고 있었다. 그 안에 코르 페르다 꽃이 들어 있었다. 종탑을 올라오면서 느꼈던 후끈한 기운은 이것 때문이었다.

“누구지?”

“제 몸종인데, 이 꽃을 구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아버지께서 직접 믿을 만한 자로 붙여주셨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나를 훑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 보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미리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고? 여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 그건 그렇지만…….”

헨은 펠라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제대로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하는 게 힘겨울 정도로, 그는 기가 셌고, 특유의 아우라를 풍겼다.

헨은 나를 데리고 도망치듯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때 온몸에 선득한 기운이 감돌았다.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네 명의 죄수가 모두 일어나 같은 방향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등이 굽은 남자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하더니, 웃음소리는 점점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치 미래에서 욘을 죽이던 그 순간처럼.

‘뭐야…….’

나와 헨, 그리고 펠라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당황한 사이, 다른 죄수들도 그 웃음에 가세했다. 죄수들의 웃음소리가 가스처럼 종탑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웃음은 조소라기보단 환호성에 가까웠다. 마치 내가 그들의 환대를 받는 듯했다. 내가 반가운 손님이라도 된 기분.

나는 헨보다도 더 먼저 앞장서서 종탑 아래를 내려갔다. 그들에게서, 정확히는 그 웃음소리로부터 도망쳤다.

미래에서 욘을 해칠 자들이 누군지 알아냈다는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그들의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그들은 대체 왜 날 보고 웃은 걸까.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종탑에서 나오자 사장과 미고, 지오의 모습이 보였다. 날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사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표정으로 모종의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을 확인한 지오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헨 역시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한숨을 내쉬며 지오에게 말했다.

“나 약속 지켰다. 그러니 너도 비밀 잘 지켜.”

사장 역시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헨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야. 어딜 가.”

“왜요……. 시키는 대로 데리고 들어갔잖아요. 내가 얼마나 난처했는데…….”

“물어볼 거 많으니까 거기 딱 서. 차렷해.”

헨이 입술을 꽉 다물면서도 양손을 뒤로 모아 단정하게 섰다. 지오가 질문을 던졌다.

“종탑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야? 대체 언제부터 종탑에 갇혀 있던 건데?”

“나도 정확히는 몰라. 나 역시 이곳에 대해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내 느낌에 죄수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종탑에 갇혀 있었던 거 같아.”

“너는 어떻게 여길 알게 됐는데?”

“1년 전쯤 아버지가 코르 페르다 꽃을 이곳에 배달하라고 시키셔서 알게 됐지.”

“뭐? 그럼 이 독초를 1년이나 먹였단 말이야? 대체 그자들이 뭘 어쨌기에 종탑에 몰래 가둔 것도 모자라서 독까지 먹이는데?”

지오가 기겁하며 말했다.

“이자들이 뭘 어쨌는지는 몰라. 아버지는 아시는 거 같긴 한데……. 절대 말씀 안 해 주셔. 그냥 아주 무서운 자들이니 얕봐선 안 되고 늘 조심하라고. 눈 마주치지 말라고……. 그런 말씀만 하셨어. 다만 내가 아는 건….”

“네가 아는 건 뭔데? 너 제대로 말 안 해?”

헨이 뜸을 들이자 못 참고 사장이 버럭 성을 냈다.

“아버지는 이자들은 욘을 죽일 운명이라고 했어요. 욘이 직접 본 미래라니까 틀림없죠. 그래서 아버지가 그들을 종탑에 가둔 거예요. 욘도 그들을 가두는 건 동의한 일이에요.”

하지만 헨도, 욘의 보좌 장로인 그의 아버지도, 어쩌면 욘도 모르는 게 있었다.

종탑 안에 가둔 그들은 끝내 탈출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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