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헨이 말하는 도중에, 눈앞에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종탑에 갇혀 있던 이들이 우르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등이 굽은 자가 괴성을 지르며 선두로 섰다. 뒤따라오는 이들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고, 여럿이 겹쳐진 그림자로 보일 뿐이었다.
계단을 두 개, 세 개씩 뛰어 내려가는 발이 정신없이 교차했다. 종탑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문지기는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다들 그를 뛰어넘어서 종탑 문을 열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펑펑-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폭죽 몇 개가 포개지며 빛을 냈다. 어두컴컴한 밤이 잠시지만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
내가 미래를 다 봤을 때쯤 이야기를 마친 헨은 도망치듯 꽁무니를 내빼고 있었다.
난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으로 벽을 짚었고, 사장이 내 눈을 확인하면서 물었다.
“해그냥, 너 괜찮아?”
“방금 종탑에 갇힌 자들이 탈출하는 미래를 봤어요…….”
“뭐? 좀 자세하게 말해 봐.”
지오와 미고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세히 말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그저 정신없이 탈출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게 다였으니까.
“아……. 폭죽이 터졌어요. 이들이 종탑으로 나왔을 때 마침 하늘에서 커다란 폭죽이 터졌는데…….”
“폭죽이요?”
지오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침 이틀 후에 죄수원 축제가 있어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아주 큰 행사인데, 성대한 불꽃놀이를 해요. 그렇다면 혹시 이틀 후에 욘이…….”
“만약 그렇다면 욘에게 빨리 알려야 해요. 우연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들이 탈출하는 날짜가 욘이 제게 만나자고 한 날짜와 동일해요.”
“근데 욘은 비밀 일정 중이랬잖아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요?”
미고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욘의 수행 비서라는 사람은 알 수도 있으려나. 최측근인 거 같던데…….”
나는 펠라가 욘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헨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리 비밀 일정이라도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는 알리고 갔을지도 몰랐다.
지오가 내 말이 그럴듯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펠라는 유일하게 욘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예요. 어릴 적에 일가족이 목숨을 잃은 사고를 당했는데 욘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하더라고요. 이후에 욘이 갈 곳 없는 펠라를 거뒀고요.”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아무튼 지금은 펠라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거 같네.”
잠깐이지만 종탑에서 본 펠라는 무척이나 딱딱하고 냉정한 사람 같았는데, 그에게 어디서부터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날 헨의 몸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우린 종탑 밖에서 펠라가 나오길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다 지쳐 종탑 문을 두드려도 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헨이 했던 것처럼 손바닥을 통해 본인을 인증하지 않으면 그 어떤 소통도 할 수 없는 게 지침인 듯했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혹시 종탑에서 안 나오고 쭉 사는 거 아니야?”
기다림에 지친 사장이 불만을 터뜨릴 때쯤 종탑에서 펠라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난 서둘러 펠라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펠라가 우리 쪽을 향해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뭐지? 당신은 헨의 몸종이잖아. 지금까지 날 기다린 건가?”
그는 언뜻 봐도 나보다 어려 보였지만, 말투만 들어선 어르신 같았다. 나는 그의 말투에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제 이름은 해그냥이에요. 실은 전 헨의 몸종은 아니고요. 욘을 만나러 왔어요. 여기……. 욘이 제게 직접 보낸 편지예요.”
펠라는 내가 건넨 편지를 받아서 이리저리 확인했다.
“욘이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는 거지? 욘의 필체도 맞고, 실링 왁스에 찍힌 인장도 욘의 것이 맞군.”
욘의 편지를 확인한 펠라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아깐 어째서 헨의 몸종이라고 거짓말을 한 거지?”
“설명하자면 길지만…….”
나는 펠라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최근에 욘이 괴한들에게 살해당하는 미래를 봤어요. 그러다 우연히 종탑에 죄수가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혹시나 욘을 죽인 괴한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한 겁니다.”
“당신이 미래를 본다고? 뭐 그렇다 치고… 확인해 보니 어떤가. 미래에서 본 자들이 맞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펠라는 내 말에 멈칫 놀란 기색이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유지했다. 헨이 그랬던 것처럼, 펠라도 그들이 욘을 죽일 운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이틀 후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어요. 당장 욘을 만나야 해요. 제가 본 미래에 따르면, 이틀 후에 죄수들이 이 종탑을 탈출하니까요.”
펠라는 내 말에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무슨 미래를 보았건, 이들이 종탑을 탈출하는 일은 없어.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킬 테니까. 그리고 안타깝지만 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모른다고요?”
“욘은 비밀 일정을 수행 중이야. 원래는 비밀 일정도 나와 공유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말을 해 주시지 않더군. 아무튼 이틀 후 이들이 종탑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
“아니, 지금 그렇게 한가한 소리가 나와요?”
나는 답답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다.
“욘이 죽을지도 몰라요. 제가 미래를 봤다고요!”
내 높아진 언성에도 펠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킬 거니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우린 단호하지만 공허하게 들리는 펠라의 말을 뒤로하고 종탑을 떠났다.
“오늘은 4마을에서 묵는 게 좋겠다.”
내내 말이 없이 강기슭을 걷던 사장이 평평한 땅을 찾으며 말했다.
펠라가 아무리 보안을 강화한다고 해도 미래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4마을에 머물면서 한시라도 빨리 욘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사장이 늘 메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서 텐트를 꺼냈다. 공원이나 캠핑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원터치 텐트였다.
저 작은 텐트에서 다 같이 자야겠구나, 침낭은 있을까? 와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고가 내 손을 잡고 텐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텐트 안은 겉보기와는 매칭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이전에 책으로 봤던 몽골의 게르가 이렇게 생겼던 것 같았다. 동그랗고 넓은 공간 안에 네 개의 간이 침대와 난로가 보였다.
우린 난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사장이 챙겨 온 디카페인 커피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욘을 찾아보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잖아.”
피곤한 표정의 미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기적거리며 자신의 침대 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사장도 단숨에 커피를 들이켜더니 침대에 누웠다.
뒤따라 침대에 누운 나는 공연히 눈만 끔뻑거릴 뿐 잠이 오지 않았다.
물감 위를 걷는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색 위에 있는지는 알아도, 내가 무슨 그림 위를 걷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게 미래를 ‘아는’ 신과 미래를 ‘보는’ 예언가의 차이였다.
다음 날 새벽, 얕은 잠을 자고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갔다.
강기슭에서 밤을 새운 듯한 행색의 지오가 날 반색하며 맞았다.
“욘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어요!”
“정말이야? 어떻게?”
“멀리서 온 검은 해오라기가 알려 줬어요. 근데 욘이 지금…….”
지오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마침 지오의 목소리를 듣고 텐트에서 나온 사장이 채근하며 물었다.
“어딨는데?”
“……6마을에 있대요.”
“뭐???”
사장이 칠색 팔색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6마을은 금지된 어둠의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그림자 마을이었다. 돈돈과 보탱의 고향이기도 했다.
“뭐? 거긴 왜 갔대?”
“그건 저도 몰라요. 검은 해오라기가 지금 6마을 사막에서 오는 길인데 그 근처 이돌룸이란 선술집에서 욘을 봤대요.”
“아…….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지. 뭐 어쩌겠어. 욘이 지금 이돌룸에 있다는 거지?”
“사장님, 이돌룸이 어딘지 아세요?”
“6마을에선 꽤 유명한 식당 겸 술집이야. 그 집 주인이 커피를 맛있게 내린다고 소문이 나서 몇 번 간 적이 있지. 다 헛소문이었지만.”
잠에서 막 깬 미고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오자 텐트는 저절로 납작하게 접혔다. 텐트를 돌돌 말아서 가방에 담은 사장이 남은 짐을 챙겼다.
미고도 욘이 6마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전 괜찮아요. 얼른 가요. 욘이 또 이동할 수도 있으니까.”
텐트를 쳤던 자리에 사장이 이동 거울 가루를 뿌렸다. 커다랗게 일렁이는 거울 속으로 사장과 미고, 지오가 순서대로 들어갔다. 6마을이 처음인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거울로 몸을 던졌다.
유난히 어지러웠던 이동 거울을 통과해 나오자 사막의 기운이 느껴지는 후끈한 날씨가 가장 먼저 우릴 맞았다.
바로 앞에는 황량한 평지 위에 허름한 가게 하나가 우두커니 있었다.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간판에 ‘이돌룸’이라고 쓰인 글씨가 보였다.
6마을은 내가 생각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비가 내리는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뒷골목 내지는 공포 영화에 나오는 스산한 분위기의 저택 같은 것을 상상했던 나는,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숨 막히는 더위를 피해 이돌룸에 들어갔다.
가게는 서부 영화에서 봤을 법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손님 두어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책에서 봤던 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저기 있네요.”
지오가 손으로 욘을 가리켰다. 6마을과 마찬가지로, 욘 역시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얼굴이 불그죽죽해진 그는 술집 사장의 농담에 박장대소 중이었다.
비밀 일정이 고작 이런 데에 와서 술 마시는 일이라니, 그리고 지금은 한가롭게 술이나 마실 때가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화 중인 두 사람 근처로 다가갔다. 사장은 멀찌감치 앉아서 익숙한 듯 스스로 생맥주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저기요. 혹시 욘 맞나요?”
고개를 돌린 욘이 나와 눈을 맞췄다. 취해서 벌겋게 변했지만, 여전히 깊고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누구?”
욘이 술기운 때문인지 날 위아래로 훑으며 실실 웃었다. 직접 만나자고 편지까지 보내 놓고 날 못 알아보는 건가?
그때 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내 손을 붙잡았다.
“어? 자네……. 낯이 좀 익어. 그 눈 말이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술집 사장은 흥미롭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우리의 대화를 들고 있었다.
“제 이름은 해그냥입니다. 이다의 아들이에요.”
욘이 책상을 손으로 세게 내리치는 통에 술집 안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맞아. 그 눈……. 정말 이다와 빼다 박았군. 근데 어째서 날 찾아온 거지?”
욘에 대해 모르고 만났으면 낮 시간에 할 일 없이 취해 있는 이 한량은 누굴까, 한심하게 봤을 게 뻔했다. 난 답답한 마음에 욘이 내게 보낸 편지를 꺼냈다.
“저한테 편지를 보내셨잖아요. 내일 만나자고.”
“뭐? 내가 편지를 보냈다고?”
욘이 한 손으로 편지를 낚아채서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유독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내가 보낸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