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술기운에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욘이 거듭 말했다.
“난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없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니…….”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럼 이 편지는 대체 누가 보낸 거란 말인가.
혹시 죄수들? 종탑에 갇혀 있는데 무슨 수로! 아니, 그보다도 어째서 이런 편지를 내게 보낸 거지? 편지에 적힌 장소와 시간에 욘을 죽이겠다는 예고장 같은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고가 가로막히자 고장 난 로봇처럼 몸이 경직됐다.
정작 욘은 ‘진짜 그럴싸하게 만들었네.’라고 중얼거리며, 편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죽는 미래를 보고도 저리 태평할 수가 있다니, 어떤 의미에선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편지에 적힌 시간과 장소에서 당신이 죽임을 당하는 미래를 봤어요. 오늘도 그것 때문에 온 거고요.”
내 말에 욘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카드를 열어 다시 내용을 확인했다.
“내가 죽는 미래를 봤다고?”
“네.”
“내일 죽는다고? 내가?”
“네…….”
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이제야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욘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게 변했다.
“이 편지를 받고, 머지않아 당신의 미래를 봤어요.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는 와중에 종탑에서 네 명의 죄수가 탈출했고, 이어 종이 세 번 울리기 직전에 당신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죠.”
내 설명을 들은 욘이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죄수원 축제가 시작되는 내일, 죄수들이 종탑에서 탈출해 나를 죽인다……. 이거지?”
“전 당신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헨과 펠라에게 듣기론, 당신이 종탑에 가둔 죄수들이 자신을 죽이는 미래를 봤다고 했거든요.”
“그들이 나를 죽이는 미래를 본 것은 맞지만, 내가 본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어. 미래가 바뀌었나…….”
욘이 놓았던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들이켰다.
“그래도 미래를 알았으니…… 이제 피하면 되겠군.”
“어떻게요?”
“죄수들이 종탑을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우선일 테고, 두 번째로는 내가 종탑 근처에 가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 같은데?”
“그건 그렇죠.”
“때때로 미래는 피할 수 없이 집요하게 들러붙는 거머리같이 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사소한 선택에 의해 금세 바뀌기도 하거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돌룸 사장이 욘의 앞에 서 있던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 의자에 앉혔다.
“차분히 앉아서 이야기해요. 들어 보니 아직 시간이 좀 있는 거 같은데. 거기 뒤에 있는 일행들도 가까이 와요. 멀찌감치 서서 그러지 말고.”
이돌룸 사장은 언제 준비했는지 주방에서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고, 미고와 지오가 어리둥절한 사이에 거나하게 음식상이 차려졌다.
이돌룸 사장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레에게 능글맞게 웃으면서 아는 척을 했다.
“어이, 거기 이전에 몇 번 온 적 있지? 내가 내린 커피 마신다고.”
날씬한 몸매의 이돌룸 사장이 대놓고 추파를 던졌지만, 사장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떻게……. 오늘도 커피 한 잔 줘?”
“됐어.”
사장은 그가 내온 음식에도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허기졌던 미고와 지오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사장은 그들을 흘겨보면서도 차마 먹는 걸 말리진 못했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욘이 내게도 빈 잔을 건넸다.
“전 술을 잘 못해요.”
“그래? 이건 좀 달콤해서 마실 만할 텐데……. 그나저나 자네도 미래를 보는가 보군. 자네 엄마처럼 말이야.”
“네? 저희 엄마도 미래를 봤나요?”
내가 굽었던 허리를 바짝 세우며 묻자, 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몰랐나 보군. 이다는 자네가 빼다 박은 그 보랏빛 눈동자로 미래를 봤네. 다만 이다는 미래를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서인지 그 능력은 이다에게 발현되지 못하고 얼마 못 가서 사그라지고 말았지.”
난 엄마를 닮았다던 왼쪽 눈동자로 미래를 봤다. 미래를 보는 능력도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니.
“그런 이다가 예지력을 잃기 전에 내 미래를 봐 준 적이 있었어. 그때의 난…… 내 능력을 찾지 못해 방황할 때였네. 이렇게 술만 마시고,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욘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술을 머금었다.
“이다는 내가 먼 미래에 예언가가 될 거라고 말해 주었어. 그때부터 난 내가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고, 내 인생이 달라진 거야.”
엄마가 욘의 미래를 봐 주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매번 끔찍한 미래만 보았던 나와 달리, 엄마는 누군가 행복해지는 미래도 보았구나. 그런데도 엄마는 왜 예지력을 거부했을까.
“실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편지에, 욘을 만나라는 말이 적혀 있었어요. 혹시 짐작 가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욘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뗐다.
“잊고 있었는데……. 자네에게 이다를 대신해 줄 것이 있어. 궁금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게. 내일 말해 주겠네.”
“네…….”
욘은 이제 마실 만큼 마셨는지 허리춤을 끌어 올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이돌룸 안에 있는 손님들을 쭉 훑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걱정으로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제가 오늘은 여러분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습니다. 해그냥 씨 일행분들과 여기 다른 손님들의 음식값 모두 제가 내지요.”
이에 화답하는 환호성이 들렸다. 접시에 고개를 파묻고 정신없이 밥을 먹던 미고와 지오는 잠시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난 지오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욘 말이야. 네가 말한 대로 장로들에게 혹사당하는 가련한 이미지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러게요. 제가 어렸을 때 봤던 모습이랑은 또 다르네요.”
지오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욘은 나와 대화를 나누던 지오를 알아보고 달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지오의 능력을 한참 동안 칭찬하며 치켜세웠다.
“절 기억하실 줄은 몰랐어요.”
지오가 욘의 칭찬에 민망해하며 손부채질을 했다.
곧 이돌룸 사장이 끝도 없이 음식을 내오는 바람에 우린 모두 과식을 하고 식당을 나왔다.
미고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먹을 수 있는 한계치를 알게 되었다면서 숨을 헐떡였다. 날씬했던 배가 늙은 호박이 든 것처럼 부풀었다.
“저희랑 같이 가요.”
내가 욘에게 제안했다. 아무래도 욘을 혼자 두는 것은 영 불안했다.
“나는 여기 근처에 숙소가 있네. 자네가 본 미래를 생각하면 현재로선 내겐 6마을이 더 안전한 곳이기도 하고.”
“그건 그러네요.”
“정 걱정되면 내일 밤에 나와 함께 있어 주게. 우리 좀 멀리 떨어져서 함께 지켜보는 게 어떻겠나. 정말 죄수들이 탈출해 나를 죽이러 오는지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되면 나도 좀 안심이었다. 어쨌든 미래가 바뀐 것을 봐야 나도 그 잔상을 떨쳐 낼 수 있을 거 같았으니.
“뭐랄까. 참 웃기지 않나. 나는 예언가이면서도 당장 내일 내게 닥칠 일도 알지 못한다네. 하하…….”
욘이 씁쓸하게 웃으며 걸었다. 이돌룸 사장이 취한 그를 숙소로 안내했다.
우린 내일 밤 죄수원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끝으로 헤어졌다. 4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어제와 같은 곳에 텐트를 쳤다.
“벌써 며칠째 가게를 비웠어. 손님들의 원성이 자자하겠고만. 어휴….”
사장은 생각보다 길어진 여정에 피곤한지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그리고 지오와 미고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봤다.
“그리고 너희들……. 뭔 음식을 그렇게 미련하게 먹어 대? 별로 맛도 없더고만! 짜고, 맵고, 달고, 시고, 자극적이고 기름져.”
미고가 소화가 안 되는지 5분에 한 번씩 트림을 하며 말했다.
“음식 남기는 게 싫어서 계속 먹다 보니 그만……. 근데요. 아까 이돌룸 주인이요. 사장님한테 반한 거 같던데요? 막 눈도 못 떼고 계속 쳐다보고.”
사장이 질색하며 버럭 성을 냈다.
“떽. 쪼끄마한 게 못하는 말이 없어. 어휴. 말을 말자. 내일만 무사히 지나가면 얼른 집에 돌아가자. 나머지는 욘이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나도 이제 슬슬 카페가 그리웠다. 여유 있게 커피도 마시고, 갓 구운 빵도 먹고 싶었다.
“아, 아까 욘이 엄마 이야기를 듣더니 저한테 줄 게 있대요. 뭔지는 아직 말을 안 해 줬는데……. 곧 말해 주겠죠.”
“그래? 그렇다면야 뭐……. 이곳까지 헛걸음을 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게르같이 둥그런 텐트 안에서 다들 잠에 빠져들었다. 미고와 지오는 자면서도 번갈아 트림을 했다.
난 4마을에 와서 편히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이 께름칙하고 불안했다. 내일이 지나면 이 불안함도 가시길 바라며 나도 억지로 눈을 감았다.
***
축제가 시작된 죄수원 앞은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대거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초대 가수의 야외 공연이 끝나고, 죄수들의 합창 시간이 이어졌다. 내일은 죄수들의 창작 연극도 한다는데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사방에서 고기를 구워 대고, 팝콘을 튀겨 대는 통에 연기가 자욱했다. 곧이어 11시부터 불꽃놀이가 시작된다는 방송이 나오자, 다들 불꽃놀이를 볼 최적의 명당을 찾아 헤맸다.
우린 죄수원 앞에서 욘을 기다렸다. 죄수원 앞에서 파는 우스꽝스러운 호박 모자를 쓴 욘이 밝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펠라에게 결계를 몇 배 강화하라고 일러두었어. 혹시 몰라 1층도 완전히 봉쇄했고. 걱정 안 해도 돼.”
욘은 말로는 걱정하지 말라면서도 긴장했는지 속사포로 말을 뱉었다. 그는 죄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우릴 데려갔는데, 그곳엔 커다란 열기구가 있었다.
열기구를 타고 공중에서 종탑을 지켜볼 작정이었는데, 참으로 영리한 계획이었다.
“이제 곧 불꽃놀이가 시작되겠군. 어서 타게. 난 불꽃놀이를 좋아하거든.”
우리를 태운 열기구가 천천히 밤하늘로 떠올랐다. 땅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꽉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풀어지며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ㅡ펑. 펑.
그때 죄수원 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내가 본 미래에 따르면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에 죄수들이 탈출한다. 나는 숨을 죽이고 종탑에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