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이렇게까지 지오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부모님이 이번 일과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지오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어진 지오의 말은 이랬다.
지오는 집행자들 앞에서 헨은 단지 심부름을 했을 뿐, 욘의 실체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진술했다.
욘의 실체를 알고도 묵인한 자들은 죄수원 수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지오의 증언은 헨에게 큰 보탬이 됐다.
조사실 구석에서 헨이 울먹이며 지오에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 정말 죄수원에 가시게 되는 걸까? 알잖아. 그곳이 어떤 곳인지……. 으흐흐흑.”
한참 동안 괴로워하던 헨이 지오에게 말했다.
“실은 너희 부모님도 알고 계셨대. 욘이 가짜라는 거…….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 너희 부모님, 마을장과 견줄 정도로 힘이 세잖아. 어떻게… 우리 부모님이 죄수원에 들어가는 것만 막을 수 없을까? 제발 부탁이야.”
헨이 무릎을 꿇고 지오에게 빌었다. 지오는 헨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바로 헨의 부모님이 머무는 조사실로 향했다.
잠시 집행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지오는 헨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저희 부모님이 욘의 실체를 다 알고 묵인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지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헨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자들을 감금하고 학대하는 것도요?”
“그래. 나도, 너희 부모님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그런 짓을!!”
지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목소리를 높였다. 헨의 아버지가 모든 상황을 체념한 듯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죄수원을…… 가게 되어도 어쩔 수 없지.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 그런데 헨은 달라. 우리가 토모토 가문에 빌린 돈이 48만 페닌 가까이 된다. 우리 가문은 가세가 기운 지 오래고, 경제적으로 토모토에 의지한 지도 오래되었어.”
헨의 아버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너희 부모님이 욘의 일에 가담한 사실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몰라. 내가 끝까지 비밀에 부칠 테니까, 헨이 48만 페닌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을 받아다 주렴. 염치없지만 부탁할게.”
“하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지오의 몸이 휘청거렸다. 째깍째깍 소리가 들리는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지오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지오는 내게 방금 있었던 일을 털어놓더니, 부모님을 봬야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뒤따라 나가 봤지만, 이미 지오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
지오는 급히 집으로 향했다. 거대한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 이런 일로 집에 돌아가게 될 거라고는 지오도 생각지 못했다.
정문에서부터 본관까지 길게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자니 어릴 적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손님들이 집에 놀러 오면 지오의 등을 떠밀어 방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깨끗한 원피스 한 벌을 방 안으로 던져 놓고, 이걸 입기 전까지는 절대 나오지 말라고 으르곤 했다.
아빠는 지오가 들꽃과 교감할 때면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눈을 흘기곤 했는데 이후에는 결국 지오의 아지트였던 정원을 완전히 싹 밀어 버렸다.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길을 따라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못 본 사이 으리으리한 별채가 다섯 채나 지어졌고, 하인의 수도 두 배 이상 늘었다. 집 안 곳곳에 배치된 그림과 보석 등 사치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두 분은 테라스에서 한가로이 식사 중이었다.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나…….’
지오는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진정했다. 연못에 부모님이 지독히도 싫어하던 꼬질꼬질한 옷차림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지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부모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 어머……. 지오야. 지오야!!”
엄마가 지오를 발견하곤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달려왔다. 지오를 껴안고 흐느끼는 듯했지만 막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것아…. 왜 이제야 집에 와…….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휴우… 옷은 이게 다 뭐니….”
아빠는 멀찍이 지오를 보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잠시 엄마의 품에서 마음이 약해졌던 지오는 마음을 다잡았다.
“와서 밥 먹어라.”
아빠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아빠의 콧잔등이 찡긋거렸다.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에 반응한 것이라는 걸 지오는 잘 알고 있었다.
지오는 잠시 위축되었지만 그럴수록 의식적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욘이 죽은 건 이미 아실 테고……. 헨의 아버지 말이에요. 지금 집행자들한테 조사받는 중인 거 아시죠. 곧 재판 들어갈 거예요.”
“…….”
아빠의 표정엔 아직 아무 변화가 없었다.
“헨의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아빠도, 엄마도 욘의 실체를 알고도 묵인해 왔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토모토 가문이 득세한 거라고.”
“말조심해라.”
이상하게도 지오는 이전과는 달리 부모님이 무섭지 않았다. 아빠가 예전처럼 자신을 엄하게 대할수록 지오는 더욱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직 멀었어요. 욘의 사기 행각을 비호하면서 종탑까지 내어 주셨잖아요. 이게 알려지면 두 분도 죄수원에…….”
아빠가 식탁을 세게 내리치자,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와장창 깨졌다.
“그래서 우릴 고발이라도 하겠다……. 그 말을 하려고 왔니?”
엄마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울먹였다. 순식간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지 마세요……. 지오야, 너도 그러지 마.”
“욘을 돕지 않았으면, 펠라의 부모처럼 의문의 사고로 죽었을 거다. 나는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지오는 아빠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말은 바로 하셔야죠. 가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겠죠. 욘이 두려워서 그랬다고 하기엔 너무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지오의 손이 새롭게 지어진 다섯 개의 별채를 가리켰다.
“네까짓 게 이제 부모를 욕보이는 게냐?”
“그렇게 당당하시면, 집행자들에게 가서 직접 말씀하세요. 잘못을 시인하시라고요. 그리고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죄수원에 가시면 되겠네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에서 짝- 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오는 자신 대신 뺨을 맞은 엄마를 보았다.
“그만해요. 둘 다.”
엄마가 지오를 데리고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안해.”
엄마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네 말이 맞아. 욘의 비밀을 알게 된 우린 그걸 빌미로 더욱 성장할 수 있었어. 지오야……. 그런데 엄마 무서워. 죄수원에 갈 수는 없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엄마의 몸이 흐르는 촛농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지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헨의 아버지가 빚을 탕감해 주면 비밀을 지켜 주겠대요. 아빠, 엄마가 욘의 실체를 알고도 묵인한 사실을 말이에요.”
“정, 정말이니? 으흐흐흑……. 정말 다행이야.”
지오는 잠시 환희로 가득한 엄마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쉽다고? 욘의 짓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나서서 도와 놓고 이렇게 빠져나간다고?
“대신 직접 토모토 가문을 무너뜨리세요. 장로직을 내려놓고, 욘의 도움으로 쌓았던 부를 전부 환원하세요.”
“뭐, 뭐라고?”
눈물로 얼룩진 엄마의 표정이 순간 새치름하게 바뀌었다.
“입으론 잘못을 시인하면서, 가진 것은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건 아니겠죠? 전 제 양심과 영혼을 팔아 입을 다물 거예요. 그러니 엄마도 보여 주세요.”
“그런데 너희 아빠를 내가 어떻게 설득하니…….”
“기한을 드릴게요. 3일 후 이 저택을 처분하고, 욘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가문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세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전 집행자에게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하겠어요.”
“너 엄마, 아빠를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지오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사 없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토록 두려웠던 부모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다만 사무치게 슬펐다. 미워했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언제나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지오는 더 이상 부모의 인정을 바라지 않았다.
***
사장과 미고는 갑자기 뛰쳐나간 지오를 찾아 나섰다. 나는 여전히 응접실에서 펠라와 함께 능력을 보여 주러 간 예언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들이 좀처럼 올 기미가 안 보이자 우린 집행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예언자들 다 어디 있어요? 마을장은요?”
집행자가 전혀 모른다는 식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마침 밖에서 용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다른 집행자가 우리가 하는 대화를 듣더니 말했다.
“언뜻 듣기로 예언자님들은 장로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러 가신다는 것 같았습니다만.”
“저녁 식사요?”
나와 펠라는 불안한 마음에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펠라를 제외한 예언자들만 빼돌린 상황이 영 찝찝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펠라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는지 지끈지끈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괜찮겠죠?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
나 역시 불안한 마음을 스스로 다독였다.
“저녁 식사하러 어디로 갔대요?”
말을 마치고 가려던 집행자를 다급히 붙잡으며 내가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스쳐 지나가면서 들은 거라.”
“아, 네…….”
우린 급히 응접실을 빠져 나갔다.지오의 행적도, 예언자들의 위치도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
자신의 능력을 모두 보여 준 예언자들은 장로와의 저녁식사에 초대받고 이동 중이었다.
예언자들이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펠라를 찾았지만, 장로들은 펠라는 곧 식사 장소로 올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호화스러운 저택 안, 눈이 부실 만큼 번쩍이는 식기 위에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입맛이 떨어질 정도로 너무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에 예언자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와!! 정말 능력이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나란히 앉은 장로 다섯 명 중에 한 명이 샴페인을 터뜨리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시작으로 장로들이 돌아가면서 예언자들의 능력을 추켜세웠다.
“이제껏 얼마나 고생 많았습니까. 이제 욘도 죽고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그간의 세월을 보상받는 심정으로 편히 사시길 바라요.”
롭이 천천히 커다란 고깃덩어리에 손을 뻗으며 장로들에게 물었다.
“펠라는요? 언제 와요?”
그때 해나 앞에 있던 컵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그녀의 팔에 상처를 냈다.
해나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경련이 왔는지 입가가 떨렸다.
바로 옆에 있던 유진이 해나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해나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거 그냥 식사 자리 아니죠?”
해나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장로들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당황하면서도 일순간 빠르게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그때 장로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문을 닫았다.
“놀라지 마세요. 역시 예언자라 다르네요. 서프라이즈로 뭘 준비할 수가 없네. 하하….”
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밥 먹자고 불러내더니…….”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4마을에서 예언자는 최고의 대접을 받죠. 하지만 예언하길 거부하는 예언자의 처지는 뭘까요.”
장로들이 품속에서 지팡이를 꺼내 예언자들을 향해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