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75)

#072화

장로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놀란 롭이 일어나려다가 식탁에 무릎을 쾅 부딪쳤다.

“우릴 어쩌려는 거죠?”

해나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섯 명의 장로 중에 대장 격인 자가 자신의 이름을 르벤이라고 소개하며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아나? 욘이 살던 저택이야. 놈은 겉으로는 털털한 척했지만 실은 최고급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았지. 내가 진짜 예언자인 당신들의 주인이 되어 줄 생각이야. 자애로운 주인을 만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롭이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뭐 주인? 행운? 이거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새끼네. 욘이랑 똑같은 놈들……. 아니, 너희들이 더 개새끼야.”

르벤이 양팔을 벌린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런 말은 섭섭하지. 우린 당신들에게 권력과 부귀를 줄 거야. 다만 계속해서 예언을 해 달라는 것뿐이지.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자네들 생각도 금세 달라질 거야.”

그가 접시 위에 놓인 토마토를 한입에 쏙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아무튼 우리도 거칠게 나가고 싶지 않아. 지금은 언짢아도 언젠가 친해질 날이 올 테니.”

탄둥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접시에 얼굴을 박았다. 코끝에 접시에 담겨 있던 단호박 수프가 묻었다. 그토록 어렵게 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데 이런 꾐에 넘어갔다는 게 허무하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어려서부터 갇혀 지낸 예언자들은 예언 외의 다른 능력은 쓰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 억압당했다. 그런 그들에게 당장 이곳을 빠져나갈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오늘은 이만 쉬지.”

해나가 분노로 온몸을 사정없이 떨고 있는 롭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해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펠라와 해그냥이 우릴 찾아올 거예요.”

예언자들은 르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정체불명의 장식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긴 복도를 따라 걷자 곧 방이 보였다.

롭과 해나, 유진 그리고 탄둥이 한 명씩 순서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장로들이 자물쇠로 방문을 잠그고 주문을 외우자, 자물쇠는 녹아내리며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나와 펠라는 예언자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마을장을 찾았다.

장로들이 예언자들을 데려갔다면 마을장도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응접실을 나오자 마을장이 바로 앞 정원을 배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골똘히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그는 나와 펠라가 지근거리까지 다가갔음에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그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마을장님.”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마을장이 내가 부르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언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시죠?”

마을장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역시나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게 나는 반대했지만… 장로들이….”

그의 서론을 듣고 있자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하마터면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지만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바로 옆에서 펠라가 소리쳤다.

“지금 어디에 있냐니까!!!”

“욘의 저택에 데려갔을 거야. 그들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거지.”

마을장이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다시피 난 허수아비야. 실질적인 권력은 욘과 그의 측근들이 휘둘렀지. 이제 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을장인 나보다 장로들의 힘이 더 세. 그들이 뭉치면 나를 제치고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마을장의 무력한 말에 나는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요? 분명 당신은 예언자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미안하다 사과까지 했죠. 당신은 대체 뭡니까?”

내가 따지자 그가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난 자격 미달이야. 장로들과 맞설 힘도, 의지도 없으니까. 당신들 말대로 책임감도 없고. 다만 그 전에 예언자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당신들에게는 말해 줘야 할 거 같아서… 이곳에서 기다린 거네.”

펠라가 화를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장로들이 예언자들을 욘의 저택에 가둔 겁니까?”

마을장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욘의 저택은 지금 비어 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은폐할 수가 있으니까.”

***

예언자들을 구하기 위해선 우선 우리가 서둘러 다시 모일 필요가 있었다.

나와 펠라는 지오를 찾기 위해 토모토 가문의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철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멀리 풀숲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뒷모습이 보였다. 푸른빛을 내는 머리칼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나부꼈다.

“지오야.”

가까이 가 보니 그 옆으로 사장과 미고가 함께 있었다. 지오는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지오가 흐느껴 우는 와중에도, 그녀가 메고 있는 가방에는 토마토 모양의 토모토 가문을 상징하는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더 이상 뭘 물을 필요도 없었다. 지오의 눈물은 그녀의 부모님이 욘의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 주었으니까. 착잡한 마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오가 우릴 보더니 눈물을 닦으며 무안한 듯 웃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요. 저 안 슬퍼요. 오히려 속이 후련해요.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붓고 나왔거든요.”

지오가 눈물이 나는 건 그녀가 부모를 용서할 수도, 그렇다고 부모를 버릴 수도 없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지오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나는 마을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급히 전했다.

내 말에 놀란 지오가 눈물로 얼룩진 고개를 들었다. 미고는 울분을 터뜨리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사장은 엔간히 화가 났는지 실실 웃기까지 했다. 정말 꼭지가 돌았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펠라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지금 예언자들을 데려간 장로 다섯 명은 아주 강한 마법사들이야. 쉽사리 덤볐다가 낭패를 볼 거야. 작전이 필요해. 작전이.”

***

우린 그림자처럼 고요하게 욘의 저택에 숨어들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삭막한 정원에 온갖 종류의 동상이 가득했다. 나체의 남녀 동상, 머리가 일곱 개인 용, 악마와 귀신의 아이, 심장에 창이 꽂힌 채 쓰러진 천사의 형상까지 다양했다.

좀 더 걷다 보니 창문 너머로 장로들이 모여 희희낙락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있네. 총 네 명이면……. 한 명이 안 보이는데?”

사장이 들어오는 내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목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예언자들을 가둔 뒤, 그들은 여전히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미고의 귀에 장로들의 대화가 들렸다. 미고가 그들의 대화를 들리는 대로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욘이 대단한 예언자인 줄 알았더니, 뒤로는 네 명의 예언자를 감춰 두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냐고! 참 여태 감쪽같이 속인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욘은 늘 두문불출했지. 난 또 신비주의? 뭐 그런 건가 했거든.”

“다 켕기는 게 있으니까 피했던 거야. 아무튼 이번에는 우리가 잘 길들여 봐야지.”

“오래 갇혀 있어서 그런가? 말이 안 통하더군.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 같지 않았어?”

“맞아!”

장로들이 다 같이 낄낄대며 웃었다. 자욱한 파이프 담배 연기가 음식 위로 깔렸다.

미고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더욱 열이 뻗쳤다. 그때 미고가 마침 중요한 대화 내용을 들었는지, 눈을 크고 동그랗게 뜨면서 그들의 대화를 전했다.

“맞다. 밥도 못 먹었을 텐데, 이 빵 부스러기라도 좀 가져다줘.”

르벤이 선심 쓰듯이 자신의 하인에게 빵조각이 담긴 접시를 건넸다.

“됐어. 그러다가 탈출하면 어쩌려고!”

다른 장로가 찜찜한 표정으로 이를 말렸다.

“예언만 할 줄 알지. 순 맹탕이던데? 걱정되면 네가 같이 가 보든가. 3층 맨 끝 방이야.”

르벤의 지시에 장로 한 명이 하인 한 명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사장이 미고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3층 맨 끝 방이랬지? 당장 가자.”

사장은 따라나서려는 내게 계속 이곳에 남아 장로들의 동태를 살피라고 했다.

“장로 한 명쯤은 내가 처리할 수 있어. 근데 혹시라도 눈치채고 우르르 몰려오면 곤란하니까. 여차하면 너희가 여기서 주의를 끌어 줘. 알았지?”

사장이 미고를 데리고 저택의 그늘진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와 지오, 펠라는 각자 고른 동상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때 갑자기 하마 동상 뒤에 서 있던 지오 쪽으로 빛이 번쩍였다.

“거기 누구야!!”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던 장로 한 명이 홀로 순찰을 돌다가 지오를 발견하고 곧장 공격했다.

“윽!”

번쩍이는 빛을 맞은 지오의 발이 점점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명중시킨 장로가 서둘러 동상 중 하나의 뒤로 몸을 숨겼다.

순식간에 마법은 지오의 발에서 무릎을 타고 올라갔다. 지오는 돌로 변하고 있었다. 펠라가 급히 지오를 향해 방어 마법을 썼다.

펠라의 마법으로 공격 마법이 지연되고 있는 사이, 나는 지오를 공격한 장로의 위치를 찾기 위해 고개를 쭉 뺐다.

멀찍이 떨어진 장로를 향해 나 역시 마법을 사용했지만, 동상에 가려 맞히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아, 안 돼!!”

지오는 천천히 돌로 변하고 있었다. 구멍이 뚫린 화강암으로 지오의 골반이 변했고, 이제 마법은 상반신 쪽을 타고 올라갔다. 펠라가 힘에 부치는지 양손으로 지팡이를 붙들었다.

“돌로 완전히 변하고 나면 끝장이야. 되돌리지 못해!”

공포에 질려 흔들리는 지오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뛰다 못해 아예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조건 저자의 마법을 저지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나온 빛이 장로를 향해 내리꽂혔다. 내 공격을 방어하려던 장로의 지팡이가 콰직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났다. 손목이 완전히 부러진 그가 고통 어린 비명을 질렀다.

부러진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니, 지오의 몸도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배워 본 적도, 익히려고 연습한 적도 없는 마법이었다. 방금 해 놓고도 내가 무얼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펠라가 부러진 장로의 지팡이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턱을 벌리고 외마디 감탄사를 뱉었다.

난 방심하지 않고 쓰러진 장로에게 악초 할아범에게 썼던 마법을 썼다.

장로의 다리에서 돋아난 뿌리가 땅속에 박혔고, 팔에서 돋아난 줄기가 무성하게 잎을 이뤘다. 나무 기둥에 장로의 주름진 얼굴이 새겨진 듯 희미하게 보였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지오가 거북이 동상에 기대앉아서 숨을 헐떡였다.

“뭐야! 무슨 소리야!!”

그때 소란한 소리를 들은 나머지 장로들이 급하게 저택 밖으로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펠라와 난 황급히 커다란 독수리 동상 뒤로 몸을 숨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네놈들이구나!!”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몸을 숨기고 있던 독수리 동상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쪼개진 동상 사이로 우리를 공격한 두 명의 장로가 보였다.

거울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처럼 똑같은 키와 외모를 가진 두 사람은, 마네킹같이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바로 눈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펠라가 우리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저 둘은 쌍둥이야! 놈들의 특기가 투명 마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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