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펠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내가 있던 자리에 땅이 움푹 파였다.
어디선가 공격은 계속해서 날아오는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보이지 않는 자들과 어떻게 싸우지.
펠라가 불시에 날아온 공격에 어깨를 맞았다. 난 어디서 공격이 올지 몰라 지팡이를 쥔 채 술 취한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잠시 뒤 공격이 잦아들고,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공격을 왜 멈췄을까. 무슨 꿍꿍이인 걸까.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는 와중에 눈앞에 빠르게 미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인어 동상 뒤편에서 번쩍 빛이 나더니 곧 펠라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공격을 받은 펠라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한 방에 목숨을 앗아 갈 만큼 강한 마법이었다.
난 급히 인어 형상으로 생긴 동상을 찾았다.
한 뼘만 한 뾰족한 송곳니가 난 인어 동상 뒤쪽으로 지팡이 끝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보였다.
‘저기다!’
그 빛이 펠라에게 달려듦과 동시에 나 역시 반사 마법을 썼다. 펠라를 향해 가던 빛이 방향을 바꿨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쌍둥이 중의 한 명이 자신의 공격에 맞아 쓰러졌다. 투명해서 보이지 않았던 몸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쓰러진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쌍둥이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쌍둥이 형제의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듯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곧이어 다시 모습을 감춘 그는 아까보다도 더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나는 날개를 펼쳐서 펠라와 지오를 끌어당겼다. 날개의 움직임이 완전히 내 통제하에 있는 것처럼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날개 속에서 잠깐 동안은 공격을 피하겠지만, 계속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반격에 성공하려면 다시 한번 미래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퍼붓던 공격이 멈추고, 10초가량이 흘렀다.
‘지금이다.’
머릿속으로 쌍둥이 마법사의 수가 읽혔다. 그자는 바로 내 등 뒤에 있었다. 나는 목에 메고 있던 피누누 발톱을 손에 들었다. 펜던트만큼 작았던 발톱이 손에 들리자마자 원래의 거대한 모습을 되찾았다.
나는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내 등 뒤로 피누누 발톱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두어 번 휘두르고 나니 철퍼덕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장로가 바닥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에서 가슴 부위까지 일자로 길게 베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해그냥! 여기야!!”
어느새 저택에서 예언자들을 구출하고 나오는 사장과 미고의 모습이 보였다. 사장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하인과 함께 음식을 가져다주러 갔던 장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인 듯했다.
그때 뒤늦게 예언자들이 탈출한 것을 알고 저택에서 뛰쳐나온 르벤이 소리를 질렀다.
“거기 서!!! 감히 어딜 가려고.”
사장이 르벤을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너! 안 그래도 못 보고 가나 섭섭할 뻔했다. 잘 왔어. 우린 준비가 다 됐거든.”
사장이 검지를 까딱까딱거리며 르벤을 도발했다.
예언자들의 이마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사장의 말은 예언자들 이마에 로뎀나무 기름을 바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난 가방에서 마을장이 내게 돌려준 송아지 동상을 꺼냈다. 좀 전에 마을장을 만났을 때 그가 전해 준 것이었다.
우린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기름을 발랐고, 예언자들도 사장이 구출 직후에 계획대로 기름을 발랐다.
덮고 있던 검은 천을 들어 올리자, 송아지 동상 입에서 흐느적거리며 귀신이 나왔다.
“뭐… 뭐 하자는 거야.”
당황한 르벤이 말끝을 흐렸다.
“이 귀신이 잔반 처리는 또 기가 막히게 하거든.”
사장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귀신은 사방은 두리번거리더니 르벤을 발견하고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었다.
“욘은 당했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이깟 귀신한테 내가 당할 거라고 생각해?”
르벤이 주문을 외우자, 귀신의 움직임이 둔화됐다. 르벤이 귀신의 모가지를 잡고 비틀자 귀신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간지러운지, 낄낄대고 웃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예언자 행세를 했을 뿐 마력이 약했던 욘과 달리, 르벤은 주문만으로도 귀신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목이 졸린 귀신이 양팔을 뻗어서 마치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르벤의 목을 감싸 안았다.
르벤이 귀신을 완전히 제압하고 나면, 그와 또 싸워야 하는데 그러기엔 우리 쪽도 내상이 만만치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기지를 발휘해 송아지 동상을 높이 들어 올려 다시 귀신을 불러들였다.
귀신이 다시 송아지 동상 안으로 빨려 들어가려는지 형체가 흐릿해졌다. 귀신은 손깍지를 낀 채 르벤의 목을 감싸고 악착같이 놓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떨, 떨어져!!!”
귀신의 손에 점액질 형태로 르벤의 영혼이 달라붙어 나왔다. 몸과 분리된 르벤의 영혼이 귀신과 함께 송아지 동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르벤의 영혼을 기어코 끌고 들어가는 귀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귀신과 르벤의 영혼이 함께 송아지 동상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대리석 바닥에 송아지 동상을 있는 힘껏 내던졌다. 도자기 재질로 되어 있던 동상이 깨지며 산산조각 났다.
깨진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에 있던 이들을 베면서 날아갔다. 다들 볼이나 이마, 팔에 빗금처럼 상처가 난 수준이었으나, 유독 지오만 도자기 조각이 눈에 박혀 괴로워했다.
“괜찮아??”
사장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지오가 힘겹게 눈을 뜨며 애써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 보였다. 다행히도 붉게 충혈된 지오의 눈은 점점 진정되었다.
깨진 조각 사이로 악취와 함께 퀴퀴한 연기가 흘러나와 공중에 흩어졌다. 귀신과 르벤의 영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예언자들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다 끝났네요.”
해나가 믿기지가 않는지 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들 어디로 가실 거예요?”
비로소 긴장이 풀린 미고가 한결 밝아진 안색을 하고 물었다. 롭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다들 가고 싶은 마을이 제각각이더군. 나는…….”
“아!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사장이 롭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우리한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떠나. 대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종종 놀러 와.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덤으로 안부도 확인하고 좋잖아.”
사장의 말에 탄둥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진짜 마지막이네요.”
해나의 말에 남은 예언자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어린 나이에 끌려와 갇혀 지내면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서로뿐이었을 것이다. 같은 처지,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주었다.
“아! 맞다.”
해나가 무언가 번뜩이는 생각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갑자기 나를 불렀다.
“가만, 당신도 미래를 보잖아요. 당신의 힘을 보태서 다시 한번 미래를 보면 어떨까요? 헤어지기 전에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맞네. 당신도 예언자잖아.”
롭이 해나의 말을 거들었다. 탄둥이 희고 오동통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쪽 손으로는 탄둥의 손을, 다른 한쪽 손으로는 해나의 손을 잡았다.
좀 어색했지만,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네 명의 예언자들이 나의 미래를 봐 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손에서 손으로 열기가 전달됐다. 마치 이들과 하나의 혈관으로 이어져 서로의 피가 흐르는 듯했다.
얼음을 쥐고 불 속에 주먹을 넣은 것처럼 손바닥은 차고, 손등은 뜨거웠다.
완전히 예언가들과 생각을 공유한다는 일체감이 느껴질 무렵, 머릿속에 한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독특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름다운 나무가 줄지어 심겨 있었다. 무성하게 이룬 각양각색의 이파리가 마치 새의 깃털처럼 휘날렸다.
감탄을 자아낼 만큼 환상적인 모습은 금세 와장창 깨지고 말았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에 붙어 있던 것은 이파리가 아닌 나뭇잎 모양의 벌레였다.
지오에게 이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벌거숭이 나무, 멀리서 보기엔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벌레들이 들러붙어 나무 수액을 빨아 먹고 있다고 했다.
벌거숭이 나무가 난 길옆으로 작은 집이 있었다. 멀찍이 현혹의 동굴 입구가 난 절벽이 보였다.
5마을인 거 같은데……. 여긴 어디지? 누구의 미래인가 싶어 머릿속에서도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그때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짙은 갈색의 투박한 장화를 신고 있었다.
이전에 미래를 봤을 때는 전체적으로 상황을 관망하는 3인칭 시점이었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미래의 모습이 1인칭 시점으로 보였다. 마치 누군가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듯.
곧 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부드럽게 흔들렸다. 흔들의자 옆에 놓인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그때 찻잔 옆에 낯익은 물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 저… 저건…….’
찢긴 엄마의 수첩이었다. 마델의 기억을 통해서 이미 엄마의 수첩이 푸에르의 손에 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푸에르의 미래라는 뜻인가!
놀라서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비틀거리자 양손을 잡고 있던 해나와 탄둥이 힘내라는 듯 내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창자가 뒤틀리는 것처럼 배가 아팠다. 머리 위에서 누군가 장도리로 송곳을 박는 것처럼 두개골이 깨질 것 같았다.
이곳은 푸에르의 거처였다. 푸에르가 흔들의자로 몸을 까딱까딱 흔들더니, 심심한지 손을 뻗어 수첩을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수첩을 펼치려다 말고, 푸에르가 뭔가 까먹고 있던 중요한 일이 떠오른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급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낡은 만년필 하나를 찾은 그는 잉크를 묻혀 빈 종이에 무언가를 썼다.
[누구지? 누군가 지금 내 미래를 엿보고 있다.]
이번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예언자들도 동요하며 몸을 움츠렸다. 설마 지금 우리가 미래를 보는 것을 눈치챘다는 것인가. 탄둥과 해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푸에르가 잠시 시간 간격을 두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너 해그냥이지.]
순간 모았던 정신력이 흐트러지면서 예언자들이 하나같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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