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카페로 돌아온 우린 반나절 정도 카페 문을 닫고 푹 쉬면서 몸을 회복했다. 사장은 다친 허벅지 상처 위에 지오가 빻은 약초를 올리곤 붕대를 둘둘 감았다.
사장이 직접 만들어 준 음식을 먹고 밀린 잠을 자고 일어나니, 바싹 긴장했던 몸이 풀리려는지 온몸이 쑤시고 뻐근했다.
난 카페 구석에서 손가락 쿠키를 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상태로 푸에르의 거처에 갔다가 놈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후에 벌어질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장이야 푸에르에게 가족을 잃었으니 나랑 처지가 같지만 미고와 지오는 달랐다.
괜히 나 때문에 푸에르와 겨루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오 없이는 그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사장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손가락 쿠키가 가득 담긴 쟁반을 가지고 나오면서 말했다.
“명심해. 오늘은 푸에르와 담판을 짓는 날이 아니야. 일단 미래에서 본 그곳이 지금 있는지 멀리서 확인만 할 거야. 알겠지?”
“네.”
사장의 말에 지오와 미고가 휘뚜루 나갈 채비를 하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자.”
우린 이동 거울로 5마을로 향했다. 거울 밖으로 나오니 역시나 울창한 숲 한가운데였다. 비가 온 뒤였는지 땅이 축축하고, 비거스렁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싸늘하게 피부에 닿았다. 5마을 숲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휘휘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왕 온 김에 약방 할매한테 인사나 하고 갈까요?”
내가 묻자, 지오가 방향 감각을 익히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답했다.
“방향이 달라요. 약방 할매네는 이쪽 길이고, 우리는 저쪽 방향으로 가야 돼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지오를 선두로 우린 그 뒤를 천천히 쫓았다. 어쩌면 약방 할매가 보고 싶었다기보다, 조금이라도 가는 발걸음을 미루려던 게 내 속마음은 아니었나 싶어 혼자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가 두려운가. 아니, 정확히는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머릿속에는 늘 그에 대한 상상이 자욱하다. 내가 느끼는 이 막연한 두려움은 그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가 누군지 알고도 나는 지금처럼 그가 두려울까?
그때 정체불명의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지오가 화들짝 놀란 나와 미고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놀랄 거 없어요. 주머니 늑대가 짝을 찾는 소리니까.”
지오는 길잡이 역할을 했지만, 계속해서 길을 헤맸다. 지오 역시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면서 갔기 때문에 스스로도 영 확신이 없는 눈치였다.
길은 점점 험해졌다. 바닥은 걷기 힘든 진흙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철퍼덕철퍼덕 진흙에 다리가 무릎까지 푹푹 들어갔다.
지오에게 힌트가 될 만한 건 내가 본 미래뿐이었다. 나는 최대한 내가 본 장면을 상세하게 설명했지만, 지오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몇 시간째 같은 길을 돌고 돌았다. 사장과 미고, 나도 우리가 같은 곳을 돌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앞장선 본인이 제일 답답하겠지. 우린 잠시 쉬면서 카페서 싸 온 도시락을 까먹고 다시 출발했다.
석양이 주황색 조명처럼 쨍하게 바닥에 내리쬐었다. 그때 지오가 갑자기 “아!” 큰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기인 거 같아요. 맞아! 여기 맞아요!”
안색이 밝아진 지오의 바로 앞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서 봐도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였다.
“은행나무예요. 높이가 80미터, 가슴 높이 둘레가 40미터 정도 될 거예요. 가지의 길이는 동서쪽으로 60미터, 남북쪽으로 75미터에 달하고요. 2000년 이상 된 나무예요.”
지오가 나무를 발견하고 신나서 와다다 설명을 해 댔다.
나무뿌리가 흙 위로 얼기설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오가 뿌리와 뿌리 사이에 생긴 공간에 들어가면서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언뜻 보기에 지오가 들어가기에도 좁아 보였던 터라, 여길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지오가 말했다.
“좁아 보여도 막상 들어오면 안이 넓어요. 경사가 졌으니까 천천히…….”
지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뿌리 사이를 들어가던 미고가 미끄러지면서 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내 옷자락 끝을 붙잡았다. 경사진 미끄럼틀을 탄 것처럼 나무뿌리를 따라 우리 모두 어디론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도착한 곳에서 옷을 털고 일어섰다. 은행나무와 엮여 있던 다른 나무뿌리까지 타고 쭉 내려온 건지, 이미 우리가 봤던 은행나무는 저 멀리 보였다. 동서쪽으로 현혹의 동굴 입구가 난 절벽이 보였다.
“찾았다.”
지오의 나지막한 말을 듣는데 팔에 소름이 돋았다.
앞엔 벌거숭이 나무가 200미터가량 줄지어 심겨 있는 게 보였다. 무성하게 이룬 이파리가 석양빛을 받아 오만 가지 빛을 냈다. 벌거숭이 나무는 멀리서 봤을 땐 환상적이리만큼 아름다웠다. 알고도 속는다는 말이 실감이 날 만큼, 그 실체를 알면서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잠시 미고와 난 넋을 놓고, 현혹된 것처럼 멍하니 나무를 쳐다봤다. 사장과 지오만이 본질을 보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대로 가까이 다가서니 나무는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큰 것은 팔뚝만 하고, 작은 것은 손바닥만 한 벌레가 나뭇가지에 빽빽하게 들러붙어 특유의 강한 턱으로 나무의 진액을 빨아 먹고 있었다.
머리나 몸통은 사마귀와 유사한데 턱이 굉장히 크고 발달해 있었고, 거미처럼 눈이 8개고 모든 방향을 응시했다. 나뭇잎 모양의 크고 화려한 날개가 바람에 휘날렸다.
우린 긴장한 채 벌거숭이 나뭇길을 걸었다. 걷다 보니 미래에서 봤던 것처 길옆에 작은 집이 보였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기 맞아요. 확실해요.”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말했다. 사장이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이로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진짜 있네. 것도 이렇게 탁 트인 곳에 버젓이. 하긴 누가 상상이라도 하겠어. 저런 곳에 푸에르가 살 거라고.”
집을 확인한 사장이 주변을 살피며 나무 뒤로 우리를 끌어당겼다.
“일단 여기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얼른 돌아가자. 푸에르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미고의 얼굴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다. 미고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소리에 집중했다.
“왜? 무슨 소리가 들려?”
놀란 사장을 진정시키며 미고가 말했다.
“아니요. 그 반대예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 보면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잠깐 들어가 보는 게 어때요?”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푸에르가 언제 올 줄 알고. 오늘은 말했다시피 위치를 확인한 것만으로 큰 성과야. 여기서 잠복하고 기다리면 푸에르가 누군지 정체를 밝힐 수도 있을 거고.”
지오가 고개를 들어 한참을 나무 위쪽을 보더니 말했다.
“푸에르 지금 집에 없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지오가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서 벌거숭이 나무 벌레를 잡아먹고 있는 쏙독새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친구가 말해 줬어요.”
“그래? 푸에르를 본 적이 있는 건가? 푸에르가 누군지 좀 물어봐! 어떻게 생겼대?”
사장이 긴장감과 호기심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었다.
“음……. 특별할 거 없다네요. 얼굴은 가리고 있어서 못 봤다고 하고요. 어? 가만, 그러고 보니 집 문도 열려 있는 거 같아요.”
지오의 말에 우리의 시선은 모두 푸에르의 집을 향했다. 문이 바람에 열렸다 닫혔다 하며 삐거덕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허술해? 지가 최상위 포식자다, 이건가?”
우린 뭐에 홀린 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푸에르의 집 쪽으로 옮겼다. 위험한 일임이 분명했지만,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사장은 꺼림칙해하면서도 천천히 푸에르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은 우리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바깥을 살피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미래에서 본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가구 배치나 집 구조는 비슷했다. 집은 단출한 살림살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지나치다 싶게 평범했다.
난 서둘러 엄마의 수첩을 찾았다. 분명 이곳에 있다. 거실 한편에 어디서 본 듯한 흔들의자가 눈에 띄었다. 미래에서 푸에르가 앉았던 바로 그 의자였다.
눈으로 빠르게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흔들의자 바로 옆 탁자에 찢긴 수첩이 눈에 띄었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수첩을 손에 들었다. 이 뒤에 무엇이 적혔을지 얼마나 궁금했던가. 수첩을 당장 품 안에 넣고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수첩이 없어졌다간 우리가 이곳을 다녀간 것을 놈에게 들킬 게 뻔했다.
조심스럽게 수첩을 펼치자, 땅으로 편지 한 통이 떨어졌다. 편지는 아주 낡아서 모서리가 다 해져 있었다. 난 천천히 봉투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를 펼치자 그 안에 낯선 글씨체가 보였다.
[이다에게.]
편지의 첫 문장이었다. 누군가 엄마에게 쓴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여러 해 당신을 지켜봤습니다. 부족한 나를 늘 훌륭하다, 탁월하다 말해 주던 당신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내가, 내가 아니게 된 기분까지 들었으니까요.
내가 처음 이 낯선 세상에 발을 내디뎠을 때 당신이 처음으로 날 맞이했어요.
발랄한 걸음걸이로,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적의 없는 기운으로, 상대를 완전 무장시키는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했죠.
내겐 당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었고, 난 주인의 집에서 환대받는 귀한 손님이 된 기분이었죠. 지금 다시 떠올려도 가슴이 벅찬 순간임은 분명하네요.
몇 번이고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당신은 전혀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더군요. 그게 얼마나 내 가슴을 무너뜨렸는지 당신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겁니다.
뜬금없이 이런 진지한 말투로 편지를 쓰는 것도 당신과 나 사이에선 어색한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좀 무겁게 받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편지까지 쓰게 되었으니 오래 간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내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할게요.
난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날 사랑해 주세요. 내게 처음 보였던 그 눈빛으로 영원히 날 보아 주세요. 부디 당신이라는 세계로 더 깊이 날 들여보내 주세요. 나를 파괴하도록 두지 마세요.
가난한 자에게 적선하듯, 간교한 꾐에 넘어가듯, 귀신에게 홀리듯, 어설픈 수에 눈감아 주듯 해도 상관없습니다.
난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을 가져야 살 수 있어요. 날 살려 주세요.]
애절한 편지였다. 처음엔 엄마를 향한 사랑 고백인가 보다 했지만, 읽다 보니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말로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묘한 분노가 느껴졌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단숨에 편지를 읽고 나서 맨 아래 발신인 이름을 확인하고 나는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당신의 푸에르가.]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