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만장일치로 주주총회에서 드디어 나에게 대표 자리를 허락했다.
발 빠르게 기사도 나갔다.
3년 전 부회장이 된 이후로 모두 예견한 일이지만, 이렇게 빨리 대표 자리에 앉을 줄 몰랐다는 것이 업계의 반응이다.
나는 일부러 양 비서에게 경제 신문을 종이로 부탁했다.
아직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종이 신문은 정말 오랜만이다.
<재벌 3세들이 각종 스캔들과 경영 부진으로 감방만 오가다 결국, 대표 자리는 경영 전문가에게 빼앗기는 요즘의 현실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살아남은 삼전 그룹의 후계자, 전성국. 드디어 삼전 그룹 왕좌를 차지하다.>
재계 서열 5위 안에 드는 삼전 그룹의 왕좌를 차지한 전성국. 그게 바로 나다.
이제 내일이면 삼전 그룹의 회장실은 내 차지이다.
나는 경제 신문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리고 삼전 호텔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스위트룸에서 서울을 내려다봤다.
모든 것이 내 발아래 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오늘을 위해 달려온 40년.
재벌가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소수에게 주어지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누구보다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만 했다.
옹알이를 하는 순간부터 일류가 아니면 가족 내에서도 철저히 무시당했다.
실력으로 성적을 쟁취하고, 국내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에서 MBA를 했다.
멍청한 남동생과 눈치만 빠른 여동생이 따라올 수 없게, 나의 성적은 언제나 최고였다.
욕심 많은 작은아버지 가족에게는 적당한 당근과 채찍으로 적으로 돌리는 일을 견제했고, 사고 치고 다니는 사촌 형제들의 뒷수습도 일일이 챙겼다.
사랑 없는 정략결혼으로 정재계의 탄탄한 인맥을 형성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구나 인정하는 수재.
뛰어난 경영 실적.
거기다 정계와의 혼맥까지.
나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되기에 하나도 부족함 없는 완벽한 스펙을 만드는 데 40년을 보냈다.
든든한 정치인 아버지를 둔 와이프를 만족시키는 잠자리까지 허투루 쓴 시간은 단 1분도 없다고 하면 믿을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와인이 오늘따라 달콤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완벽하게 혼자이다.
누구와 기쁨을 나누기보다는 혼자 즐기는 법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삼전 그룹의 왕좌는 누구보다 외로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과 함께하는 대신 홀로 스위트룸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천천히 발아래 펼쳐진 서울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가슴이 요동쳤다.
‘내가 이제 삼전 그룹의 왕이다! 이 세상의 왕이다!’
찌릿-.
순간, 가슴에 통증이 왔다.
왜 이러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간단히 목을 풀었다.
주주총회까지 미친 듯이 달려오느라 한 달 넘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찌릿-.
또다시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삼전 그룹의 창업주이신 할아버지도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등지셨다.
얼른 핸드폰을 집어 양 비서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 순간, 손목에 힘이 빠지면서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데구루루….
붉은 와인이 카펫 위로 퍼져나갔다.
- 대표님, 양 비서입니다.
핸드폰에서는 양 비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이 없자, 양 비서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 대표님, 괜찮으세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닥에 쓰러진 채 흘러가는 붉은 와인을 쳐다봤다.
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양 비서가 전화를 받았으니, 조만간 누군가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제발….
오늘은 정말 완벽한 하루였는데….
제1화
이 포근한 느낌은 뭘까?
역시 양 비서가 발 빠르게 대처한 모양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나다산 구스 이불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니….
항상 무거운 어깨도 한결 가벼웠다.
누적된 피로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느낌이다.
그토록 원하던 회장 자리에 앉았으니, 당연한 걸까.
자, 이제 출근을 해볼까.
삼전 그룹의 회장, 전성국.
오늘은 바로 나, 전성국 전설의 시작이다.
나는 기지개를 늘어지게 켰다.
“으아앙!”
잠깐, 내 목에서 나는 이 소리는 뭐지?
순간, 들려오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
“자기야, 우리 꾹이 기지개했어. 어서 와봐.”
꾹이?
설마, 나… 전성국을 꾹이라고 부르는 건가?
나이 마흔에, 삼전 그룹 대표인 나를?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몸을 바동거렸으나, 누군가 내 몸을 손으로 꽉 잡고 압박했다.
이번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꾹이 엄청 바동거리네. 이 녀석 축구 선수되는 거 아니야?”
동시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축구 선수가 되다니? 내가 왜!
난 태어나서 한 번도 회사를 물려받을 일 외에는 생각도 해본 적도 없다고!
나를 안고 있는 웬 여자를 노려봤다.
잠깐만! 내가 여자 품에 안겨 있다고?
여자를 안은 적은 수없이 많지만, 안겨 있은 기억은 없는데….
[이거 놔! 내가 누군 줄 알아?]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돌아오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유쾌한 웃음소리뿐이었다.
“자기야, 우리 꾹이 옹알이하나 봐.”
“소영아, 이 녀석 천재 아니야? 어떻게 백일도 안 된 애가 옹알이를 해.”
몇 개의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옹알이.
백일.
천재.
그리고 꾹이.
나는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자기야, 꾹이가 자꾸 손으로 얼굴을 긁네.”
“소영아, 애들 다 그렇다고 손싸개 꼭 하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난 답답할까 봐….”
“의사 선생님이 이때는 몸이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되기 때문에 손으로 얼굴이랑 막 긁으면 그게 더 위험하다고 하셨잖아.”
“알았어요, 꾹이 아버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는 내 손에 손싸개를 끼웠다.
“으아… 으아… 으아앙.”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남자가 나를 안아 들더니 어지럽게 흔들어댔다.
“꾹아, 울지 마. 네가 울면 엄마랑 아빠가 슬프잖아.”
남자는 나를 안아 들고는 거울 앞으로 갔다.
“꾹아, 저게 누구 게?”
나는 그제야 흐린 시야로 내 모습을 확인했다.
삼등신의 아기.
백일이나 됐을까….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나를 보며 연신 미소 지었다.
“꾹아, 아빠야. 아빠 보여?”
“으앙, 으아악!”
나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아빠라는 인간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소리쳤다.
“소영아, 우리 꾹이 진짜 옹알이가 남달라. 진짜 말하는 거 같아.”
“꾹이 아버지,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팔불출 소리 들어.”
“팔불출이면 어때. 꾹아, 아빠야. 옹알이 다시 한번 해봐. 우르르 까꿍~!”
“으앙… 으앙 으아악!”
이 말을 번역하면 이렇다.
왓더X!
* * *
무료한 나날들이 지나갔다.
눈 뜨면 젖병으로 우유를 먹었다.
우유를 다 먹으면 여자가 내 등을 마구 두드렸다.
그러면 민망한 트림이 목구멍을 통해 올라왔고, 트림을 하고 나면 졸음이 밀려왔다.
주기적으로 기저귀가 축축하거나 무거우면 기분이 더러워서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그럴 때면 미친 듯이 울어재꼈다.
엄마라는 여자는 부리나케 달려와서 기저귀를 확인하고는 훌러덩 내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갈았다.
“우리 꾹이는 똥도 이쁘네.”
하아… 이런 소리를 몇 달이나 계속해서 들었다.
다행인 건, 날 양육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나를 자주 안아줬고, 연신 볼에 뽀뽀를 해댔다.
이런 게 아늑함이란 건가?
이전 생에서 어머니에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회귀 전의 내 어머니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어떤 풍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면모 때문이었다.
국회의원을 몇 선이나 한 유명한 정치가의 딸.
거기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지만, 그 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삼전 그룹의 후계자인 아버지와 정략결혼 했다.
우리 아버지는 대중들도 다 아는 난봉꾼이었다.
심지어 나와 배가 다른 남동생 한 명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같이 살기도 했다.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남동생과 여동생도 몇 됐다.
이들이 아버지 사후 그룹 지분이나 재산 분할을 요구할 때를 대비해 철저히 조져버리는 것도 내가 관리했다.
태어날 때부터 반쪽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으나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것들은 나약하고 약점이 많았다.
“성국아, 사람들의 약점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기억해라.”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이다.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나는 배가 다른 형제, 자매들의 약점을 잡고 평생 마르지 않을 돈을 주곤 입을 봉했다.
물론 그들이 유산 싸움에 나서면 받을 수 있는 삼전 그룹의 지분에 비해서는 사막의 모래알 수준의 돈이었지만, 그들은 그걸 모를 만큼 대부분 멍청했다.
간혹 똑똑한 놈도 있었지만, 삼전 그룹의 법무팀이 개인 한 명보다 열 배는 똑똑했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안락함이라는 것은 사치였다.
나는 안락함을 포기하는 대신, 이 세상 사람들이 평생 쥘 수 없는 돈과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꾹아, 엄마 보고 웃어주는 거야?”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미간에 주름을 팍 잡고는 여자를 노려봤다.
이 엄마라는 여자는 착하긴 한 것 같은데, 왜 맨날 나만 바라보고 있을까?
아빠라는 남자는 매일 아침 어디론가 출근했고, 밤늦게 돌아왔다.
반면에 여자는 온종일 삼등신인 나를 돌봤다.
나, 전성국을 돌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 집안은 설마 유모나 이런 거 쓸 형편이 안 되는 건가?
내가 그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건가.
나, 전성국이!!!
하지만 지금은 뿌연 시야에, 뒤집기도 힘든 몸뚱이로 확인할 길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태어난 이상, 모든 게 선명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어느 시점부터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흐느적거리기만 했던 팔과 다리에도 점점 힘이 생겼다.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자, 나는 집 안 곳곳을 탐험하듯 돌아다녔다.
그 탐험의 결과, 나는 더럽게 가난한 집구석에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사는 곳은 베드룸과 다이닝룸조차 따로 구분되지 않은 원룸이라 불리는 코딱지만 한 집이었다.
내가 잠시 살았던 대학 기숙사와 같은 구조였다.
물론 난 그곳에 혼자 살았고, 대학 기숙사에 산 것은 뉴스에 좋은 기삿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삼전 그룹의 장남 전성국 군, 서울대 기숙사 생활. 재벌의 친서민적 행보에 눈길.’
한 학기의 기숙사 생활을 끝내고, 나는 바로 기숙사를 떠났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잘 보일까 하는 동기들과, 어떻게 하면 내 앞에서 삼전 그룹을 비아냥거릴까 하는 동기들 모두 나중에 삼전 그룹 면접장에서 본 기억이 났다.
물론 그들은 면접자였고, 나는 면접관이었다.
“성국아, 뭐 해?”
엄마라는 여자가 나를 끌어안고, 머리를 연신 쓰다듬거나 볼에 뽀뽀를 해댔다.
최근에 귀가 제대로 뜨이면서 안 사실이지만, 아빠라는 작자는 어느 식당의 주방에서 일한다고 했다.
여자는 직장을 다니다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퇴사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서민들의 삶인가.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내가 이렇게 원룸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지금이 도대체 언제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눈앞에 TV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 손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나, 전성국이 아니다.
나는 TV를 발견하고 둥근 배를 밀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지금이 몇 년도이고, 나의 삼전 그룹은 잘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삼전 그룹이 뉴스에 등장하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삼전 그룹의 야구팀이나 배구팀, 농구팀 소식이라도 뉴스 끄트머리에 등장했다.
이 집 TV에는 리모컨이 없단 사실을 깨닫는 데 일주일을 허비한 나는 TV가 있는 선반까지 베개를 온몸으로 밀어붙였다.
잘하면 베개를 딛고 일어나 선반을 잡고 TV를 켤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동통하고 짧은 팔을 최대한 뻗어 TV의 전원 버튼을 향해 뻗었다.
“으차!”
“꾹아, 너도 아빠 없으니까 심심하지?”
여자가 나의 몸통을 잡고 안아 들었다.
[그딴 남자, 안 보고 싶다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뉴스라고!]
“우리 꾹이도 아빠 보고 싶다고?”
역시 내 언어는 이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여자는 나를 마구 흔들어 대기까지 했다.
오장육부가 흔들리는데, 왜 이게 이렇게 신나지?
나도 모르게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우리 꾹이는 누구 닮아서 이렇게 이쁠까?”
[돈 벌면 얼굴은 다 뜯어고칠 수 있어. 내가 사귄 여자들도 죄다 그랬어. 참, 김미라 알지? 자연미인이라는 그 미라. 미라도 말이야. 발가락 빼고 다 한 거야.]
철커덩.
열쇠로 문을 여는 뻑뻑한 소리가 들렸다.
보나 마나 아빠라는 사람일 게 뻔했다.
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손에 또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남은 음식 재료로 뭔가를 만들어온 모양이다.
“우리 꾹이 아직 안 잤네. 소영아, 혼자 심심했지?”
“나야 꾹이랑 있으니까 괜찮지. 자기야, 그건 뭐야?”
“우리 소영이가 좋아하는 골뱅이 만들어 왔어. 유통기한 오늘 딱 끝나는 게 장사 끝나고 남았거든.”
“대박. 자기야, 우리 소주도 한 잔 할까?”
“그럴까?”
[좋단다. 유통기한 까딱까딱하는 골뱅이 먹다간 골로 가. 그리고 그거 가게 주인한테 허락은 받은 거야?]
아빠라는 남자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우리 꾹이 아빠 기다린 거야?”
[느끼하게 왜 이래. 남자끼리.]
“소영아, 우리 꾹이 아빠 엄청 기다렸나 봐.”
[얼씨구.]
엄마라는 여자는 웃으며 소주 상을 차려 왔다.
시원한 소주를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는 사실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내 와인 농장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제일 좋아했다.
와인의 맛 같은 것은 이런 평민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 창피하게.]
몸이 어려지더니, 자꾸만 행동도 유치해졌다. 생존본능인가….
“어머, 우리 꾹이 배고픈가 봐. 손가락 빠네.”
순간, 젖병이 입속으로 쑥 들어왔다.
“아빠랑 엄마는 소주 마실 테니, 우리 꾹이는 우유 먹자. 그래야 공평하지.”
[공평한 건, 같이 소주를 마시는 거지!]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소리일 뿐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소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자기야, 자기가 만든 골뱅이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아.”
“소영아, 나도 언젠가는 이런 맛있는 골뱅이 만드는 내 가게 낼 수 있겠지?”
“당연하지. 난 자기가 한 요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소영아, 내가 어린 당신 데리고 와서 우리 성국이까지 낳게 하고… 돈도 없는데, 정말 미안해.”
“무슨 소리야. 자기야, 나도 성국이 조금만 더 키워놓고 일할 거니까 걱정 마.”
내 이름은 회귀 전과 똑같이 전성국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은 180도 변했다.
회귀 전에 나는 삼전 그룹의 첫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
여자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우리도 부자 될 거야. 언젠가 우리도 남들처럼 아파트도 사고, 차도 살 수 있겠지?”
“소영아, 내가 더 열심히 일할게.”
남자도 입술을 꾹 누르며 눈물을 참는 게 보였다.
나는 젖병을 빼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모르는 게 있다.
가난은 가난을 부를 뿐이다.
특히 땡전 한 푼 없으면서 애부터 낳으면 가난이라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여자가 나를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꾹아, 엄마 아빠가 가난해서 미안해. 그래도 우리 꾹이가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싶은 거 다 하도록 엄마 아빠가 진짜 노력할게.”
순간 가슴이 찌릿했다.
회귀 전의 유전병이 이번 생까지 이어진 건가.
그런데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설마 이 허접한 말에 감동이라도 한 건가. 이 전성국이?
대한민국 재벌 중 유일한 이성이라 불리던 내가?
나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소영아! 우리 꾹이, 엄마 말 알아듣나 봐. 눈시울이 붉어졌어.”
“어, 진짜네. 자기야, 우리 꾹이 진짜 천재인지도 몰라. 자기 고등학교 내내 성적 장학금 받았잖아.”
“소영아, 우리 꾹이는 진짜 하고 싶은 공부 맘껏 하게 해주자.”
크응. 남자는 흐르는 코를 삼켰다.
“자기야, 울지 마.”
“응. 미안. 자꾸 눈물이 흐르네… 소영아, 우리 TV 보자.”
남자는 민망한 듯 뜨거워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꾹 누르며 TV로 손을 뻗었다.
드디어 TV를 켜는 건가?!
나는 두근두근한 맘으로 TV를 쳐다봤다.
남자가 전원 버튼을 누르자마자 마감 뉴스가 흘러나왔다.
화면에는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휠체어에 타고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의 모습.
바로 삼전 그룹의 초대 회장이신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성국이에요!]
나는 얼른 TV 앞으로 기어갔다.
아빠라는 남자는 나를 얼른 안아 들었다.
“성국아, 저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이거든. 근데 사과박스에 돈을 넣어서 높은 사람들한테 뇌물로 줘서 잡힌 거야. 저 사람 정말 나쁜 사람이야. 성국아, 너는 나중에 돈 많이 벌어도 저 사람처럼 되면 안 돼.”
[쯧쯧.]
나는 혀를 찼다.
이게 일반 사람들의 마인드였다.
깨끗하게 살다 보면 인정도 받고 돈도 모을 것이라는 착각.
세상은 오물 속이다.
이 진창 속에서 홀로 고고하면 왕따만 당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저렇게 재판장을 몇 번 오가다 겨우 2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다.
그것도 회장의 부재로 인한 삼전 그룹의 손실과 그로 인한 대한민국 경제의 악영향을 이유로 채 석 달도 되지 않아서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저 일 이후로 할아버지는 오래 애용한 사과박스를 버리고 새로운 뇌물의 루트를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 그런 루트.
각종 사회단체와 후원.
겉으로 보기에는 기부를 하는 사회단체들이었지만, 실상은 알고 보면 높으신 분들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현금 세탁을 하는 단체들이었다.
나는 다시 뉴스에 집중했다.
할아버지는 대중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저 휠체어를 열 살밖에 안 된 삼전 그룹의 장손인 나에게 밀게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1992년.
나는 얼른 휠체어를 미는 어린아이를 봤다.
[저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금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는 놈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두 살 아래의 남동생 전태국이다.
[저 멍청한 새끼가 왜 저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