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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3화 (3/231)

제3화

1992년 9월 12일.

코딱지만 한 원룸에 작은 상이 차려졌다.

엄마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싸구려 재질의 한복을 나에게 꾸역꾸역 입혔다.

아빠는 아침부터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내가 자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하품하는 모습, 심지어 기저귀를 가는 모습까지 모든 것을 찍어댔다.

“꾹아, 아빠 봐.”

[하아, 정말 귀찮게 구네. 빨리 찍어. 지금 웃는다.]

난 내 분유 값을 버는 아빠를 위해 오늘도 싱긋 웃어줬다.

세상은 원래 자본으로 돌아간다. 노동자들은 쥐꼬리만 한 월급을 위해서 상사에게 미소 짓는 것이다.

아빠는 내 미소를 보자 세상 환하게 웃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파악한 바로는 아빠는 남의 식당 주방에서 요리사로 일했고, 월급은 50만 원 정도였다.

아침 10시에 나가서 밤 10시에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다. 쉬는 날도 일주일에 하루였다.

당장 노동부에 신고해도 될 만한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멍청한 건지 착한 건지 군말 없이 매일 식당에 나갔고, 유통기한이 다 된 음식 재료들로 각종 요리를 해와서 엄마를 먹였다.

뭐, 그럭저럭 둘은 불만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소영아, 우리 꾹이 진짜 우리 말 다 알아듣나 봐. 이렇게 카메라 딱 보고 웃잖아.”

“자기야, 우리 꾹이 연예인 시킬까? 나 어릴 때부터 이쁘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잖아.”

이건 인정.

직업 특성상 온갖 화려한 연예인과 미스코리아까지도 직접 두 눈으로 본 내가 보기에는 엄마는 매우 훌륭한 얼굴이었다.

아빠도 얼굴은 준수했다.

아직 내 얼굴의 이목구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거울을 볼 때면 얼굴은 확실히 삼전 그룹 후계자일 때보다는 좀 나은 것 같았다.

[이 얼굴이면 이번 생은 연예인도 나쁘지 않겠어.]

띵동.

분주한 이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엄마가 일어나더니 문에 달린 구멍으로 밖을 보고는 아빠를 돌아봤다. 평소와 달리 불안해 보였다.

엄마는 아빠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기야, 집주인 아가씨야.”

“우리 계약 기간 다 끝나가지?”

“응. 세 달 후인데… 앞집은 저번 달에 재계약했는데, 월세 3만 원 올려줬대.”

“3만 원이나?”

아빠의 두 눈이 커졌다.

[설마 엄마, 아빠. 3만 원 가지고 지금 이렇게 눈알 튀어나오게 놀라는 거야? 3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내가 좋아하는 쿠바산 시가 하나 사기도 힘든데….]

띵동.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는 계속 울렸다.

“네, 나가요.”

엄마는 얼른 문을 열었다.

단발머리?

엄마를 병원으로 옮기고 아빠가 나타나자 홀연히 사라진 단발머리. 그녀가 바로 이 집의 집주인이었다.

[단발머리, 목숨 구해줘서 고마운데… 우리 집에 이렇게 초대도 없이 오면 안 되지.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옹알거리자 아빠가 얼른 나를 안고 등을 도닥였다.

이건 입 닥치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엄마와 아빠는 지금 집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단발머리는 매서운 눈으로 방 안을 쳐다봤다.

“안에 있으면서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요?”

[뭐야, 목숨 구해줘서 좀 봐주려고 했는데 갑질인가? 나도 한 갑질 하는데, 내가 삼전 그룹 회장의 갑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알려줄까? 어?]

내가 옹알거리면 아빠의 손이 좀 더 세게 나를 도닥거렸다.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입을 다무는 게 분명했다. 내가 눈치는 또 한 눈치 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어서 오세요. 저번에 구해주신 거 감사해서 인사드리러 갔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엄마가 한껏 허리를 낮췄다.

단발머리는 코딱지만 한 집 안을 휙 훑었다.

“직장 다녀서 바빠서요. 괜찮다는 이야기는 오가면서 들었어요. 보상금은 제대로 받았죠?”

“안 그래도 저희가 선물이라도.”

“됐어요. 할 일 한 건데요.”

[우리 엄마 말을 잘라먹어? 이거 싸가지가 보통이 아니네.]

단발머리는 옹알거리는 나를 한 번 쏘아보고는 아빠를 위아래로 훑었다.

“허우대 멀쩡하게 생겨서는 백수세요? 평일에 집에 있게?”

[저 여자 돌직구네. 내가 딱 좋아하는 말투인데.]

“아니요. 오늘 일이 있어서 휴가 냈어요.”

“일 다닌다니 다행이네요. 요즘 하도 노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근데… 어쩐 일이세요?”

아빠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목을 살짝 풀었다.

[분위기 보아하니 집세 올려달라는 것 같은데, 시원하게 울어볼까?]

이때, 단발머리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란 말도 안 해요?”

“죄송해요. 돌상 준비 중이라서 정신이 없어서요.”

돌상?

오늘이 나의 첫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저런 불청객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응.”

에-를 하려는 순간 단발머리가 먼저 치고 나왔다.

“커피 한 잔 줄 거죠?”

“당연하죠. 어서 들어오세요.”

착한 엄마는 커피를 타기 위해 냄비에 물까지 올렸다.

[엄마 마음이 태평양이야!]

내가 종알거리자 단발머리는 내 옆에 앉더니 나를 힐금 쳐다봤다.

“너 저번에 나 봤지? 내가 널 구해서 돌잔치도 하는 거야. 알아둬.”

[어디서 감히 반말이야? 너, 내가 누군 줄이나 알아? 삼전 그룹 후계자 ‘전성국!’이었던 사람이야. 어? 대한민국 재계의 카리스마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얘기 들어는 봤나?]

“너 참, 말 많구나.”

단발머리는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아빠는 커피를 타서 집주인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저희 집에는 믹스 커피밖에 없어서요.”

“기대 안 했어요. 잘 마실게요. 애가 엄마, 아빠 닮아 이쁘네요.”

“헤헤. 감사합니다.”

칭찬 한마디에 아빠는 실실 쪼갰다.

[속도 없냐?]

“애 키우려면 돈도 많이 들 텐데, 3만 원만 올려줘요.”

단발머리는 밑도 끝도 없이 순식간에 월세를 올렸다.

“뭐, 뭘요?”

아빠가 더듬거렸다.

“뭐긴 뭐예요. 월세죠. 재계약할 거죠?”

단발머리는 능청스럽게 훅 들어왔다.

[이 양반, 협상 좀 할 줄 아네.]

나는 단발머리를 다시 봤다.

마치 3만 원 올려주는 것이 큰 선심을 쓴다는 듯한 저 태도.

저런 협상의 기술은 그룹 내에서도 종종 유용했다.

“사모님, 3만 원이 저희한테는 너무 큰 돈이라서요.”

정신을 차린 아빠가 쩔쩔맸다.

엄마가 얼른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희가 내년이면 둘째도 태어나거든요.”

순간 정적.

이건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고요한 파장이었다.

[잠깐, 뭐라고? 둘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올려다봤다.

[아니, 엄마, 아빠. 이 코딱지만 한 집에서 애를 또 하나 더 낳아서 키우겠다는 거야? 월 50도 안 되는 월급 가지고?]

단발머리가 옹알거리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애가 꼭 말하는 거 같네요.”

“저희도 가끔 그래서 놀라요.”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사정이 있어요. 3만 원 안 올려주면 곤란해요. 지하철역이랑 버스 정류장 다 가까운데 이만한 월세 없는 거 알죠?”

월세를 3만 원 올려주고, 둘째까지 태어나면 내가 누릴 파이는 점점 더 작아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나는 고사리 같은 손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생글생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바늘도 못 뚫고 갈 것 같은 차가운 단발머리 집주인을 보며….

역시 자본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단발머리의 얼굴이 살짝 풀리는 게 보였다.

“어머, 애가 왜 이래? 지금 나 보고 이러는 거야?”

아빠가 얼른 나를 안아 들었다.

“우리 성국이가 사모님이 마음에 드나 봐요. 안아보실래요?”

“사모님이요? 나 결혼도 안 했는데요.”

단발머리의 목소리가 다시 차가워졌다.

아빠는 눈치는 국에 말아서 원샷한 게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히 염치는 있어 얼른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내가 나설 차례였다.

나는 단발머리에게 팔을 쭉 뻗으며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동시에 살인적인 미소를 날렸다.

[이러고도 안 안을 거야? 어서 안아봐. 나 완전 몰캉몰캉해.]

“어머머, 애가 왜 이렇게 날 좋아하지?”

단발머리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넌 꿈에도 모르겠지?]

“언니, 한번 안아주세요. 오늘 우리 성국이 돌이잖아요.”

엄마는 그나마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아니라 이모가 어울리는 단발머리에게 언니라는 호칭까지 썼다.

그제야 단발머리의 얼굴이 슬 풀렸다.

“그럼, 그럴까.”

단발머리 여자는 나를 마지못해 안아 들은 척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봤다.

[단발머리, 어때? 나 엄청 몰캉거리지?]

분명 좋지만, 집세 때문에 좋은 척을 못 하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필살기.

나는 살짝 버둥거렸다.

단발머리 여자는 금세 당황하며 엄마를 쳐다봤다.

“애가 왜 이렇게 버둥거리지.”

“어머, 낯선 사람이라서 그런가요. 꾹이가 낯선 사람을 많이 안 봐서요.”

엄마가 나를 안으려고 들 때, 나는 엄마를 밀치고는 반대로 단발머리에게 폭 안겼다.

그러고는 단발머리의 얼굴에 보드라운 나의 이마를 비벼댔다.

“어머머, 애가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지.”

히죽히죽.

나는 단발머리를 보며 연신 웃었다.

[월세 같은 거 올리는 거 아니야, 집주인. 어서 안 올린다고 말해.]

엄마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언니, 성국이가 너무 좋아하는데. 저희 돌잔치 하는데 같이 하실래요?”

“맞다, 오늘 돌이라고 했죠?”

단발머리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역시 나의 필살기에 안 넘어갈 수 없지.

“네. 저희가 둘 다 고아원 출신이잖아요. 올 가족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남편이랑 둘이 조촐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오시면 좋죠.”

“나 지금 시간 없는데….”

단발머리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살짝 마음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잠깐! 그나저나 둘 다 고아라고? 나, 흙수저도 못 물고 태어난 거야?]

나는 주먹으로 이마를 콩 때렸다.

부자가 죽어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더니, 이번 생은 분명 저주였다.

[에휴.]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단발머리에게 더 안겼다.

흙수저 오브 흙수저에게 태어났으니 애교라도 장착해야지.

물론 회귀 전에 나는 애교 따위 장착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애교 따위 안 부려도, 아니 내가 이미 신경 쓸 필요 없이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됐기 때문이다.

[쓰읍.]

나는 눈물을 집어삼키고는 단발머리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언니. 저희 성국이 얼굴 좀 보세요. 언니가 안 오신다니 서운해하는 것 같은데요, 꼭.”

단발머리가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 엄마와 아빠를 봤다.

“돌은 돌이고. 그럼, 아기 보러 종종 와도 돼요?”

이건 의외였다.

엄마와 아빠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엄마가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우리 성국이 너무 이뻐해 주셔서 감사한데요. 저희가 의지할 데 하나 없는 고아에다가, 사실 3만 원, 정말 큰돈이거든요.”

[어쭈, 엄마 대처 한번 빠른데. 이거 거의 삼전 전자 AS센터급 응대인데.]

엄마는 아빠보다는 확실히 융통성이 있어 보였다.

앞으로 경제적인 대화는 엄마랑 더 잘 통할 것 같았다.

나는 단발머리 눈치를 슬쩍 살폈다. 고민하는 게 엿보였다. 그렇다면 마지막이다!

[이 돈만 밝히는 집주인아. 좀 봐줘라, 어? 우리 엄마, 아빠 흙수저 배틀에 나가도 1등 먹을 것 같지 않아?]

나는 단발머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결심한 듯 단발머리 여자가 툭 뱉었다.

“됐어요. 월세 안 올릴게요.”

“정말요?”

아빠가 놀라 물었다.

“한입으로 두말 안 해요. 근데, 돌잔치인데 왜 이렇게 차린 게 없어요?”

“저희 둘이서 하는 거라서요.”

“내가 집에 올라가서 고기 좀 가지고 올게요. 돌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와 아빠는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단발머리는 신발을 신더니, 다시 뒤를 돌아봤다. 설마 마음이 바뀐 건가?

“참, 이건 절대 비밀이에요. 다른 집은 다 월세 올렸어요.”

“그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아빠가 얼른 대답했다.

쾅.

현관문이 닫히자 엄마와 아빠가 손을 부여잡고 동동 뛰었다.

“자기야, 우리 성국이 정말 복덩이인가 봐.”

“소영아, 너는 뛰면 안 되지. 우리 호박이!!!”

“아차, 미안.”

[쯧쯧. 칠칠맞긴.]

엄마는 얼른 나를 안더니 자기 볼에 내 볼을 가져다 대고 비벼대기 시작했다. 베이비파우더 향이 느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우리 복덩이. 성국아, 자면 안 돼. 돌 사진 찍어야지.”

[이건 나도 제어가 안 된다고….]

내 눈은 반쯤 감겼다.

“소영아, 그러고 있어. 지금 너무 이뻐.”

찰칵.

아빠는 다시 사진을 찍어댔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 시절의 내 돌 사진은 마돈나와 트럼프 대통령도 찍은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데이비드 손이 직접 찍었다.

스튜디오 하나를 통째로 빌렸고, 삼전 그룹 호텔 다이아몬드 홀에서 정재계의 인사들이 모두 모여서 내 돌을 축하했다.

5단 케이크는 프랑스 최고 파티셰의 작품이었고, 그날 모든 요리는 삼전 호텔 셰프들이 준비했다.

하지만 지금 나의 현실은 일회용 카메라와 부실하기 그지없는 돌상과 불청객뿐이었다.

* * *

“성국아, 뭐 뽑을래?”

아빠가 빈약한 돌상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내가 뽑아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야. 성국이 뭐 뽑을까? 내가 다 떨리네.”

엄마는 호들갑을 떨었고, 단발머리조차 숨을 죽였다.

나는 실과 화살, 판사봉과 각종 잡다한 돌잡이를 물리치고 시퍼런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로 만 원이었다.

이번 생의 목표는 이것이다. 돈!

미친 듯이 돈을 벌어서 이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게 내 목표이다!

나는 만 원짜리를 손에 쥐고 엄마, 아빠를 보고 헤헤 웃었다.

[앞으로 나, 전성국이 이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어! 기대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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