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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4화 (4/231)

제4화

돌상에서 만 원을 움켜쥔 지도 언 열흘이 지났지만, 나의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다.

눈 뜨면 먹고, 먹으면 또 자고, 그러면 당연히 배출을 하고 또 먹었다.

다리에는 힘이 좀 생겨서 선반을 잡고 걷는 것쯤은 쉽게 해냈지만, 아직 말은 미숙했다.

몇 년이나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야 돈을 벌 수 있는 걸까.

나는 젖병을 문 채 뒹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돈을 벌지?]

매일 나오는 뉴스의 경제 꼭지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미래는 바뀌지 않을 모양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1992년과 다른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돈을 벌려면 시드머니가 필요한데….]

삼전 그룹의 창업주이신 할아버지도 시골집에서 소 판 돈으로 시작하셨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엄마는 허리를 잡고 일어서더니 인터폰 화면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후다닥 달려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언니!”

엄마가 언니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집주인 단발머리였다.

단발머리는 오늘따라 세련된 느낌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성국이 엄마, 집에서 놀죠?”

여전한 돌직구.

“아기 때문에요. 성국이 크면 저도 일하려고요.”

단발머리가 엄마에게 브로셔 몇 장을 내밀었다.

“그럼, 이거 한번 신청해 봐요.”

“이게 뭔데요?”

“우리 회사에서 광고에 나올 아기 모델 구하는 거예요. 내가 일하는 회사니까 한번 지원해 봐요.”

“언니, 광고 회사 다니세요?”

“자세한 건 알 것 없고요. 사진 얼른 인화해서 참가서 작성해서 모레까지 나 줘요.”

광고 모델이라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능적으로 이 일이 돈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젖병 물고 기어 다니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돈을 향한 나의 천부적인 감각은 이번 생에서도 괜찮아 보였다.

단발머리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봤다.

“화면 잘 받을 얼굴이에요. 한번 도전해봐요.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찢어지게 가난한 집구석에서 달리 돈 벌 일도 없어 보이는데.”

[내 말이!]

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구석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시드머니를 모아야 했다.

나의 목표는 이제 1억이다.

원래 1억 모으기가 힘들지, 그다음은 돈이 돈을 버는 게 자본주의의 순리이다.

IMF가 얼마 안 남았다고!

시드머니만 모으면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이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엄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희야 성국이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직 성국이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요.”

[이게 뭔 소리야? 나 맨날 거울 보는데. 이 정도 얼굴 흔치 않아!]

나는 최대한 화난 투로 옹알거렸지만, 엄마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나는 신경 써준 건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단발머리가 블러셔를 낚아채려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옹알이를 했다.

“으응. 으으응. 으어엉.”

번역하자면 이런 말이었다.

[엄마, 이건 다시없을 기회야!]

그제야 엄마가 나를 내려다봤다.

“우리 성국이, 하고 싶어?”

끄덕끄덕.

나는 단호하게 두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 갓 지난 아이의 머리 무게를 생각지 못하고 너무 목에 힘을 줘서 끄덕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바닥에 헤딩할 뻔한 것을 겨우 견뎠다.

단발머리가 눈치 빠르게 내 신호를 캐치했다.

“한번 해봐요. 아기들 얼굴로도 뽑지만, 우선 촬영할 때 잘 안 울고 말귀 잘 알아듣는 애들 좋아하거든요. 성국이 똘똘해 보이니까, 한번 테스트해 봐요.”

“그럴까요.”

엄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배가 볼록하게 나온 엄마의 치마를 격하게 잡아당겼다.

[엄마, 나만 믿어!]

* * *

끼익-.

버스가 도착한 곳은 이태원이었다.

엄마는 나를 안고 힘겹게 버스에서 내렸다.

아빠가 임신한 엄마에게 택시 타라며 만 원짜리를 쥐여줬지만, 엄마는 버스를 탔다.

그 바람에 나는 난생처음 버스를 탔다. 그리고 서민들의 발이 되어준다는 버스의 덜컹거림 때문에 멀미를 심하게 했다.

이미 속은 난장판이었다.

[이렇게 컨디션이 별로면 오디션 때 힘든데….]

나는 마른침을 꾸역꾸역 삼키며 엄마에게 안겨서 이태원의 한 건물에 들어갔다.

엄마는 로비에서 숨을 몇 번 삼킨 뒤에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저… 오늘 아기 오디션 어디서 보나요?”

“3층 회의실입니다. 오른쪽으로 가셔서 엘리베이터 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쥐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단발머리에게 건넨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만으로 나는 서류 전형을 가뿐히 통과했다.

서류에서 통과된 단 열 명의 아이들만이 오늘 오디션을 본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자 엄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오늘 나와 경쟁자로 보이는 아이와 부모가 있었다.

아빠와 가끔 데이트를 하러 갈 때 입는 엄마의 블랙 롱 원피스가 초라해질 정도로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여자는 명품 원피스에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은 중년의 여자였다. 보모인 모양이었다.

명품 백을 든 여자는 나와 엄마를 차갑게 쳐다보고는 3층에 엘리베이터가 서자마자 먼저 서둘러서 내렸다.

마치 이 엘리베이터 안에 세균이라도 퍼진 듯한 불쾌한 얼굴이었다.

회귀 전, 나 역시 저런 얼굴로 다른 사람을 봤다.

일반 직원이랑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것도 싫어서 삼전 그룹 내에는 내 전용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그게 내 처지가 되다니….

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엄마가 내 엉덩이를 도닥였다.

“성국아, 졸면 안 돼.”

[졸린 거 아니야. 마음이 무거워서 그래.]

“성국아, 우리 이거 끝나고 아빠가 택시 타라고 준 돈으로 맛있는 거 먹자. 치킨 먹을까?”

[그건 엄마가 먹고 싶은 거지. 난 아직 이가 성치 못해서 치킨 못 뜯는다고.]

“성국이는 엄마가 바나나 사줄게.”

[그래, 바나나. 기운 차려주지, 뭐.]

엄마는 오디션 장소라고 적힌 표시를 따라 큰 회의실에 들어갔다.

* * *

열 명의 엄마들이 아이를 안고 파마머리를 한 조연출의 안내를 들었다.

“우선 감독님이 카메라 테스트 할 거예요. 카메라 테스트를 통과한 두 명에서 세 명 정도만 최종 테스트에 오를 겁니다. 그럼, 제가 호명하면 오셔서 카메라 테스트 진행할게요.”

“네.”

다른 엄마들은 살짝 긴장이 섞인 흥분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사이에서 엄마만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엄마는 옆에 앉은 다른 아이들의 행색을 보고 있었다.

적어도 나처럼 거의 내복과 다름없는 외출복을 입은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한껏 멋을 부린 것이 유치할 정도였다.

나는 엄마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엄마, 겉모습은 중요한 게 아니야. 내 얼굴이 백만 불짜리잖아.]

엄마도 겨우 기운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성국아, 우리 잘하자.”

[나는 당연히 잘하지.]

몇 명의 아이들이 들어가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눈부신 조명과 반사판.

그리고 내 앞으로 카메라가 보였다.

카메라는 나에게 꽤 익숙한 매체였다.

삼전 그룹의 장남으로 살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카메라 앞에 설 일은 수없이 많았다.

때문에 삼전 그룹 내에는 내 전용 카메라 테스트 팀과 인터뷰 대처 팀도 있었다.

공항에서 나올 때, 공장이나 회사 건물 시찰을 할 때,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할 때, 혹은 안 좋은 일로 법원에 오갈 때를 모두 대비했다.

어느 얼굴 각도에서 카메라가 더 잘 받고, 어느 컬러가 더 잘 어울리는지. 심지어 중요한 날 이전에는 피부과 시술도 받았다.

나는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회귀 전 나에게 쏟아지던 카메라 플래시를 떠올렸다.

“성국이라고?”

카메라 뒤에서 화면을 보고 있는 산도둑처럼 생긴 감독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전성국?”

[감독, 왜 자꾸 불러?]

나는 즉시 감독을 쳐다봤다.

“성국이 몇 살이지?”

“14개월이에요, 감독님.”

엄마가 얼른 대답했다.

감독은 내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자, 성국아. 이제부터 카메라가 널 찍을 거야. 너무 놀라지 말고 제발 이번에는 다른 애들처럼 울지 좀 말아라. 제발 부탁한다. 내가 오늘 아주 고막이 너덜너덜해.”

끄덕끄덕.

나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쟤, 내 말 알아듣는 거 같네.”

“여태까지 본 애 중에 말귀는 제일 잘 알아듣는 것 같아요, 감독님.”

옆에서 내 머리를 만져준 여자 스태프도 동의했다.

“그냥 한 말이지. 애가 무슨 말을 알아듣겠어. 자, 카메라 테스트 시작하자고.”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메라가 나를 찍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이 아니라 영상이라 셔터 소리는 없었지만, 조명은 꽤나 세게 들어왔다.

나는 카메라를 보면서 미소, 폭소, 새침함을 마음껏 표현했다. 때로는 다른 곳을 보면서 아이처럼 뒹굴기도 했다.

얼마 전 습득한 잼잼과 도리도리도 간간이 포즈에 섞었다.

카메라 테스트를 위해서 나도 나름 집 안의 거울을 보면서 연습한 결과였다.

구석에 선 엄마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직 감동하기에는 이르다고.]

나는 얼른 자세까지 틀어서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윙크를 날렸다.

찡긋!

동시에 박수가 터졌다.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그만! 더 찍을 필요도 없겠어. 얘는 무조건 최종이야. 합격!”

씨익.

나는 오른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 정도야.]

* * *

최종 오디션에는 나와 명품 백을 든 여자의 아들이 올랐다.

분명 얘보다 귀엽게 생긴 녀석들이 많았는데, 이 녀석이 올라온 건 의외였다.

나는 경쟁자를 예리하게 살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먼저 분석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런데 같이 올라온 이 녀석은 눈이 동그란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아기였다.

엄마는 내 옆에 앉아서 다리를 살짝 떨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국아, 긴장하지 마.”

[긴장은 엄마나 하지 마.]

“성국이 많이 긴장되는구나. 근데 엄마가 화장실이 너무 급한데….”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명품 백을 든 여자가 아기를 안은 중년의 여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중년의 여자가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애는 내가 봐줄게요. 화장실 다녀오세요.”

“정말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엄마는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엄마 화장실 얼른 다녀올 테니 아주머니 말 잘 듣고 있어.”

“응.”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신을 하면 화장실에 자주 가고 싶다는데, 엄마는 나를 위해서 여태까지 화장실도 못 가고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중년의 여자가 나를 흘깃 보더니 중얼거렸다.

“애가 참 이쁘네.”

“뭐라고요?”

명품 백을 든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에요, 사모님. 그냥 한 소리예요.”

“이쁘면 저 집 애나 키우세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말 좀 가려서 해요. 애도 다 들어요. 무식해서 정말.”

[무식한 건 누군지 모르겠네. 쯧쯧.]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달칵.

대기실의 문이 열리더니 파마머리의 조연출이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하게 명품 백을 든 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아기 연습 많이 시키셨죠?”

[잠깐,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저 여자는 미리 최종 대본 오디션 내용을 알고 있단 거잖아.]

명품 백을 든 여자는 고개를 까닥했다.

“우리 애 어릴 적 추억 만들어 주려고 하는 건데, 왜 이렇게 힘들어? 이런 애랑 우리 애가 경쟁해야 하는 거야?”

[이런 애? 그건 나를 일컫는 건가. 나 전성국을?]

뒷골이 슬슬 당겨왔다.

나는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이미 모델은 내정된 상태이고, 오디션은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엄마에게 화장실 가라고 순순히 나를 봐준 것도 조연출과 입을 맞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사모님, 조금만 참으세요. 감독님이 눈치채면 곤란해서요.”

“감독은 우리 집안 몰라?”

“감독님은 그러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윗분들도 최종까지는 감독님은 절대 모르게 하라고 하셨어요. 오늘 얘는 처음 하는 거니까, 아마 못할 거예요. 아빠 연습 많이 시키셨죠?”

“딕션 따로 봐주는 선생도 붙였어. 걱정 마.”

이때, 복도에서 엄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연출이 재빨리 웃으며 엄마를 쳐다봤다.

“최종 오디션 주의 사항 알려 드리려고 왔어요.”

“아, 죄송해요. 화장실 다녀오느라고요.”

“괜찮습니다. 최종 오디션은 카메라 앞에 두고 대사 한 마디를 할 거예요. 그것만 잘해주시면 돼요.”

“대사가 뭔데요?”

“죄송해요. 공정을 위해서 대사는 최종 오디션 때 알려드려요.”

파마머리 조연출은 머리를 긁적였다.

엄마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 중요한 대사를 알았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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