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5화 (5/231)

제5화

최종 오디션은 조금 독특한 구조였다.

나와 명품 백 여자의 아기를 스튜디오 바닥에 놓고 카메라가 촬영하는 동안에 대사를 얼마나 잘하는지, 촬영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 보는 거였다.

이번 생에서 마주한 첫 승부다!

다행히 감독은 이 모의에 상관없는 사람인 듯하니 나는 어떻게든 감독의 눈에 들어야 했다.

감독은 진지한 얼굴로 화면을 보며 외쳤다.

“자, 시작!”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레 히죽거리며 스튜디오 바닥을 기어 다녔다.

물론 카메라 앵글에 최대한 잘 잡히게 기었다.

그에 반해 명품 백 여자의 아이는 중년 여자를 향해 기어갔다. 얼굴엔 이미 짜증이 가득했다.

[쯧쯧.]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감독이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파마머리 조연출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감독님, 대사 한번 해보라고 할까요?”

“응, 그래. 네가 한번 애들한테 대사 던져줘 봐.”

“네.”

조연출은 먼저 나에게로 와서 건성으로 물었다.

“아빠 해봐.”

“아. 빠!”

나는 단번에 그 단어를 뱉었다. 악센트도 적당히 섞어서.

감독의 감탄이 여기까지 들렸다.

“성국이 자알하네!”

파마머리 조연출은 진심으로 당황하는 게 보였다.

“저, 감독님. 실수일지 모르니까 다시 한번 해볼게요.”

“그래.”

조연출의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자, 다시 한번 해보자. 방금 뭐라고 했지?”

조연출은 아빠라는 단어를 일부러 빼고, 나를 채근했다.

이런 거에 흔들릴 내가 아니다.

“아. 빠!”

이번에 더 담담하고 대범하게 아빠를 외쳤다.

“하하하. 성국이 진짜 잘하네. 오케이!”

감독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다른 스태프들 모두 숨을 죽였다. 모두 명품 백을 든 여자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감독은 조연출을 쳐다봤다.

“성국이는 됐으니까, 저기 가서 해봐. 근데 얘 어머니는 누구세요?”

“전데요. 이분은 보모세요.”

명품 백 든 여자가 나섰다.

“두 분 중 한 분은 나가세요. 애가 도대체 집중을 못 하잖아요.”

“애 아니고요. 재희요. 이재희요.”

“아, 네. 이재희 어머니. 애가 보모분에게 너무 기어가니까, 두 분은 중 한 분은 나가세요.”

명품 백 여자가 눈짓을 하자 중년의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건 실수였다.

스튜디오의 문이 닫히자마자 재희는 울어재끼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으앙. 으아아앙!”

“어머, 얘가 잘하다 왜 이래.”

명품 백을 든 여자는 오늘 처음으로 명품 백을 의자에 놓고 재희를 안았지만, 재희는 더 크게 울 뿐이었다.

“으아앙. 으아아앙!”

감독은 얼굴을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애가 엄마가 누군 줄도 모르네. 그러니 아빠는 당연히 못 하지.”

당황한 조연출이 얼른 재희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대사 해볼게요.”

“그래, 해봐라. 해봐.”

조연출은 재희를 달래느라 우스꽝스러운 표정까지 지었다.

“우르르 까꿍. 재희야, 아빠 해보자. 아빠.”

“으아아앙!”

재희는 더 크게 울 뿐이었다.

“됐어. 그만해.”

감독이 소리를 질렀지만, 조연출은 마치 주문을 걸듯이 중얼거렸다.

“재희야, 아빠. 아빠. 아빠.”

“아….”

그제야 재희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감독님, 아빠라고 했어요.”

“됐어. 끝났어.”

감독은 화난 얼굴로 스튜디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드디어 내가 된 건가.

나는 징징 짜는 재희를 보며 짧은 두 손가락으로 승리의 V 자를 그렸다.

* * *

“죄송하게 됐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감독이 화를 참지 못하고 대기실 안을 바쁘게 오갔다.

엄마는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태어난 지 14개월 만에, 나는 처음으로 인생의 쓴맛을 보고 있었다.

“이미 내정된 애였는데, 오디션은 뭐 하러 본 거야. 아, 씨X.”

감독은 욕을 하다 말고 무안한 얼굴로 나를 봤다.

“성국아, 미안하다. 아저씨가 화가 많이 났어. 세상 더러운데, 이게 세상이더라고.”

나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감독의 말대로 세상 더러운데, 그게 세상이다.

회귀 전에 내가 수없이 누군가에게 했던 짓이었다.

유력 정치인의 자식이라 직원으로 채용하고 승진시켜 주고 이런 거 눈감아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지금의 나처럼 돈 없고 백 없는 어떤 이는 분명 불이익을 받았다.

감독은 별안간 멈춰 서더니 엄마를 쳐다봤다.

“어머니, 연락처 좀 주세요.”

“그건… 왜요?”

“다른 광고에 일 있으면 성국이 추천할게요. 아이들 찾는 광고는 언제나 있거든요.”

“아니에요. 경험 삼아 한번 와봤어요.”

[사양은 이럴 때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옹알거렸다.

감독은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우선 일주일 후에 촬영 있을 건데, 그때 또 나와주셔야 해요.”

“왜요?”

엄마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물었다.

“아기 모델의 경우에 보통 한두 명 정도 후보 모델을 준비하거든요. 아기 모델들이 워낙 변수가 많아서요. 갑자기 아프기도 하고, 잘하다가 말문이 막히기도 하고 그래서요.”

“아, 또 와야 하는군요.”

엄마는 영 반갑지 않은 반응이었다.

감독은 얼른 덧붙였다.

“오늘 오신 것도 경리부에서 조촐하게 비용 처리해드릴 거예요. 다음 주에 오시면 모델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비용이 나갈 거예요.”

엄마는 호박이가 든 아랫배를 가만히 만지며 나를 쳐다봤다.

“성국이가 안 힘들려나….”

[새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장기들을 탑재한 내가 힘들 일이 뭐가 있어! 어서 한다고 해! 어서!]

“이 녀석, 꼭 엄마랑 대화하는 것 같네요. 완전 카메라 체질인데, 진짜 제가 다른 광고 회사에도 추천할게요. 여기 본부장이 저 집안에 뭘 단단히 처먹었나 봐요. 미리 알았으면 저도 안 하는 건데… 성국이 어머님, 연락처 꼭 남겨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진짜 다음 주에 꼭 나오세요.”

“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경리 부서는 오디션장과 한 층 아래인 2층에 있었다.

엄마는 나를 안고 문을 배꼼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지나가는 슈트를 입은 여자를 붙잡고 물었다.

“저, 오늘 오디션 본 아기인데요.”

“교통비 받으시려고요?”

“네.”

“김 과장. 여기 교통비 드려.”

여자는 구석 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소리를 쳤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건 바로 우리의 집주인인 단발머리였다.

단발머리는 봉투 하나와 서류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엄마는 급히 반색을 했다.

“언니.”

“나가요. 음료수 살게요.”

단발머리는 주위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엄마도 얼른 고개만 까딱하고 나를 안고 나갔다.

또르르.

캔 음료가 자판기에서 굴러떨어졌다.

단발머리가 시원한 캔 음료와 봉투를 내밀었다.

“교통비로 5만 원 지급돼요.”

“5만 원이나요?”

“택시비 빼면 얼마 남지도 않잖아요.”

“언니, 저희 버스 타고 왔어요.”

엄마는 속도 좋게 배시시 웃었다.

“애 가진 여자가 갓 돌 지난 아기까지 안고 버스 타고 여기까지 왔어요?”

“버스는 자주 타서 그런지 배 속의 호박이도 그렇고 성국이도 모두 괜찮았어요.”

[나는 멀미했다고!]

단발머리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음료수 캔을 들고만 있는 엄마를 쳐다봤다.

“안 마셔요?”

“지금 마시면 가는 길에 화장실 가고 싶을 것 같아서요. 집에 가서 마시려고요.”

“그래요, 그럼.”

“언니, 다음 주 촬영 때요. 우리 성국이, 후보 모델로 나오라는데요. 그러면 얼마나 줘요?”

“촬영 모델은 아니니까. 그래도 한 교통비 조로 20만 원 나올 거예요.”

“그렇게나 많이요?”

“이것만 됐어도 적어도 300은 벌었을 텐데, 아쉽네요. 삼전 전자 광고료는 업계에서도 가장 좋거든요.”

[300이라….]

물론 내게는 전혀 큰돈이 아니지만, 엄마에게는 무척이나 큰돈일 게 분명했다. 아빠의 반년 치 월급이었다.

그제야 엄마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성국이가 걔보다 더 잘했는데….”

그 표정을 단발머리가 단번에 알아챘다.

“오늘 된 애가 덕풍 제지 손자라고 하더라고요. 저희 회사가 덕풍 제지 광고도 하거든요. 그거 무시 못 하잖아요.”

[덕풍 제지? 그 코딱지만 한 중소기업?]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런 하찮은 중소기업 놈한테 지다니!

더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이때, 지나가던 중년의 남자가 단발머리를 쳐다봤다.

“김 과장, 근무시간에 왜 여기 있어?”

“죄송합니다. 곧 들어가요.”

“에이, 저러니 만년 과장이지.”

남자의 말에 엄마는 음료수를 가방에 밀어 넣고는 단발머리에게 인사를 했다.

“언니, 어서 들어가요. 저 가볼게요.”

“네.”

단발머리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다시 경리부로 들어갔다.

* * *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건장해 보이는 학생의 양보로 엄마는 만원 버스에서 자리를 잡았다.

엄마는 자리에 앉자마자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내 엉덩이를 도닥였다.

“성국아, 택시보다 더 좋다. 이 큰 버스가 우리 집 앞까지 가잖아.”

[이런 걸 근본 없는 낙천주의라고 하는 건가. 난 가난해본 적 없어 모르겠는데.]

“성국아, 우리 들어가는 길에 치킨 사가자.”

[그건 엄마가 먹고 싶은 거고. 난 아직 치아도 제대로 안 나서 치킨 못 뜯는다고 몇 번을 말해.]

“참, 우리 성국이는 바나나 사줘야지.”

[그래, 그걸로 만족하지. 오디션도 떨어졌으니….]

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눈을 스르륵 감았다.

회귀 전에는 대중교통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이용해본 적이 없었다.

내 전용 자동차는 대한민국에 한 대밖에 없는 방탄유리로 제작된 고급 자동차였다. 전용 기사 역시 20년 경력의 베테랑이었다.

코너를 돌 때 손에 든 커피조차 흔들리지 않았었는데….

근데, 이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잠이 쏟아지다니…. 내가 말이야… 대한민국 재계의 카리스마 전성국이 말이야….

* *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불 속이었다.

옆으로 엄마가 사온 치킨과 바나나가 보였다.

막 샤워를 마친 아빠가 나오자 엄마가 작은 상을 펴고는 치킨을 올렸다.

어느새 아빠도 퇴근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자기야, 우리 성국이가 오늘 5만 원이나 벌었어.”

“우리 성국이 대견한데. 근데 프라이드치킨이야? 자기 양념치킨 좋아하잖아. 그거 사지.”

“오늘은 시장표 치킨 먹고 싶었어. 그리고 이거.”

엄마는 아빠에게 단발머리가 뽑아준 음료수를 내밀었다.

“자기 좋아하는 포도 셰이커.”

“이것도 샀어?”

“나 오늘 돈 좀 썼지.”

[저러려고 음료수 챙겼구만.]

엄마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아, 너 마실 거는?”

“나는 임신 중이잖아. 물이면 족해.”

“이거 나눠 마시자.”

[그래, 콩 한쪽도 나눠 먹어라. 실컷.]

나는 살짝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엄마가 얼른 나를 살폈다.

“성국아, 깼어?”

깨긴 했는데, 다시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다시 눈을 끔뻑거렸다.

“소영아, 내가 성국이 재울게. 어서 치킨 먹어.”

“자기 피곤하잖아.”

“오늘은 니가 더 피곤하지. 임신한 몸으로 이태원까지 갔다 왔잖아. 어서 먹어.”

“알았어. 오늘만 내가 먼저 먹을게.”

아빠가 다가와서 내 배를 도닥였다.

막 샤워를 마친 아빠에게서 기분 좋은 비누 냄새가 났다.

아빠는 행복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우리 성국이 오늘 큰일 했어.”

[앞으로 더 큰 일 할 테니, 놀라지나 마라.]

“으아함!”

나는 마지막으로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 * *

작은 봉고가 도착한 곳은 산속에 위치한 스튜디오였다.

봉고가 도착하자 문이 열리며 스태프들이 줄줄이 내렸다.

저번의 파마머리 조연출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다가왔다.

“후보 모델은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면 돼요. 호출 없으면 이따 5시에 나가는 봉고 타고 가시면 됩니다.”

“아, 네.”

“참, 오늘 오신 비용은 회사 도착하시면 경리부에서 받아 가세요.”

“네.”

엄마는 연신 네만 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이미 도착해서 촬영 준비 중인 덕풍 제지 손자 재희가 있었다.

재희는 오늘도 여전히 멍청해 보였다.

재희의 엄마는 우리 엄마를 위아래로 보더니 귀찮은 듯 손가락으로 지시했다.

“재희가 오늘 예민해요. 신경 안 쓰이게 구석에 있어요.”

[저게 지금 어따 대고 지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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