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6화 (6/231)

제6화

내가 종알거리자, 엄마가 나를 안아 들었다.

“성국아, 졸려?”

또 가만있으란 소리구나.

을로 사는 건 이런 건가.

매번 되지도 않는 경쟁에 치이고, 공정하지 않은 대접을 받아도 반항조차 할 수 없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게 이번 생에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여자가 웃으며 들어왔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임선미.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중에서도 눈물 쏙 뽑는 멜로 연기의 장인.

그리고 나는 임선미의 비밀도 알고 있다.

그녀는 바로 삼전 그룹의 부회장이자 내 아버지였던 전재형과 스폰 관계이다.

나는 임선미를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오랜만이야, 선미 누나.]

임선미가 나를 보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네가 오늘 모델이구나. 어쩜 이렇게 이쁘게 생겼니.”

임선미가 나를 안아 들려고 하자, 재희 엄마가 몸으로 가로막았다.

“걔는 후보고요. 오늘 주인공은 우리 재희라고요.”

재희의 엄마는 두 눈을 멍하게 끔뻑이는 자신의 아들을 임선미에게 내밀었다.

임선미는 재희를 안아 들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어머, 너도 예쁘네.”

아버지는 임선미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코 수술을 여러 번 해서 그쪽 만지는 거 엄청 싫어해.”

삼전 그룹의 초대 회장이자 창립주인 전주신.

그 뒤를 이은 게 나의 아버지였던 전재형 회장이었다.

철의 여인 속을 평생 썩인 아버지답게 은퇴하는 그 시점까지 이름난 여배우부터 근본도 알 수 없는 여자들까지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 임선미도 있었다.

임선미로 말할 것 같으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고 그 이후로는 주춤했던 배우다.

하지만 다시 30대 초반에 감성 연기로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물론 그 전성기 뒤에는 아버지 전재형 부회장이 있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다 알까?

아무리 회귀 전이라고 해도 1992년이라면 겨우 열 살이 된 나이인데.

세상 사람들은 재벌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아는 거라고 해봤자 겨우 TV 드라마에 나온 판타지 같은 모습이거나, 희화된 캐릭터일 뿐이다.

아버지 전재형 대표는 삼전 그룹의 경영자로서는 훌륭했다.

위기 때마다 회사를 크게 구조 조정하고, 특성 분야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사원 복지와 연봉도 다른 기업에 비해 월등히 좋아서 10년 연속 일하고 싶은 회사에 꼽히기도 했다.

이런 대외적인 이미지와 달리 아버지와 남자로서 전재형은 쓰레기였다.

내가 아버지와 달리 여자관계에 있어서만은 유독 철벽을 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버지는 종종 우리를 앞에 두고도 노골적으로 만나는 연예인들 얘기를 해댔다.

“니들 임선미 알지?”

“네, 아빠. 선미 누나 진짜 예뻐요.”

그때 나는 TV에 나오는 청초한 이미지의 임선미를 무척 좋아했다.

어린 나이지만 임선미의 광고나 연기를 볼 때면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이쁘긴 한데 말이야. 코 수술을 여러 번 해서 그쪽 만지는 거 엄청 싫어해.”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는 순진하게 물었고, 아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봤다.

“성국아, 너도 이 아빠 자리에 오르게 되면 다 알 수 있어. 알았지?”

“…….”

열 살의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금 내 눈앞에는 임선미가 재희를 안고 서 있었다.

재희는 조금 짜증이 난 듯 온몸으로 바동거렸다.

임선미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얼굴을 잔뜩 뒤로 밀고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콧등을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가린 것을 보니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오늘 촬영은 나랑 친해져야 하는데. 애가 낯을 가리나 봐요, 어머님.”

“촬영장이 낯설어서 그럴 거예요. 제가 좀 달래볼게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모가 일어나서 재희를 안았다.

그제야 재희는 진정됐지만, 여전히 얼굴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나는 어떻게 재희가 임선미의 코를 한 대 팍 쳐버릴 수 있을지 고심에 들어갔다.

[말귀가 통하는 놈은 아닐 거고….]

똑. 똑.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로 양 비서였다.

나를 모시던 양 비서의 아버지 양 비서.

양 비서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안의 자질구레한 대소사를 정리하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양 비서 아저씨는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양 비서 아저씨! 저예요!]

양 비서 아저씨는 나를 얼핏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기가 낯도 안 가리고 잘 웃네요.”

“저희 애가 좀 순해요.”

엄마는 감사하다며 고개까지 숙였다.

잠깐, 양 비서 아저씨가 왔다는 것은 아버지가 움직인다는 의미인데?

나는 열린 문틈으로 서 있는 사람을 단번에 확인했다.

큰 키에 늘 단정한 옷차림. 2 대 8 가르마로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 중년의 나이에도 뱃살 하나 없었고, 자세는 꼿꼿했다.

바로 나의 아버지 전재형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나는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손까지 흔들었다.

엄마가 나를 얼른 안아 들었다.

“성국아, 사람들 많으니까 좋지? 앞으로 엄마가 자주 데리고 나올게.”

[하아. 이게 아닌데….]

지금 나의 외침과 몸짓은 이들에게 그저 재롱일 뿐이다.

양 비서 아저씨는 임선미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같이 대기실이 빠져나갔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내가 임선미를 좋아한단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임선미의 광고 촬영장에 나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임선미에게 소개해줬다.

임선미는 내 뺨을 몇 번 손으로 어루만져 주고는 아버지와 사라져서 잠시 후에 화장이 지워진 얼굴로 나타났다.

그사이 나는 촬영장에서 양 비서 아저씨와 공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곧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파마머리 조연출이 난처한 얼굴로 들어왔다.

“사모님, 촬영이 조금 지연될 것 같습니다.”

“우리 재희 곧 밥 먹고 잠들 시간인데, 그 시간 맞춰 준다면서요?”

“죄송합니다. 그게, 임선미 씨가 약간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어디서 거짓말을….]

임선미는 아버지의 차 뒷좌석에서 한창 바쁠 때였다.

아버지가 좀 급하시니까 길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년의 보모가 잠시 재희를 내 옆에 내려놨다.

“사모님, 저 화장실 급히 다녀올게요. 재희 좀 봐주세요.”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은 급여에서 까든지 해야지. 어서 다녀와요.”

“죄송합니다.”

보모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도 사모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조연출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나갔고, 엄마와 나는 어색한 기류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내 옆 소파에 앉은 재희는 한눈에도 무기력해 보였다.

말이나 걸어볼까? 비슷한 나이이니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야, 너 촬영하기 싫지?]

의외로 재빨리 재희가 응답했다.

“응애. 응. 응어웅응어웅.”

[뭐지? 대충 알아듣겠는데….]

나는 놀란 얼굴로 재희를 쳐다봤다.

재희는 연신 불만을 옹알거렸다.

[그래, 어서 다 말해봐!]

요약하자면 조명이 너무 뜨겁고 따가워서 촬영하기 싫다는 거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것도 짜증 난단 말도 했다. 심지어 지금은 배도 고프고 졸리다는 내용이었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은 이런 일이 귀찮은 모양이었다.

추억이야 다 자란 후에나 생기는 거지, 지금 당장은 이런 먼지 폴폴 날리는 촬영 현장이 싫을 만도 하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처리해주는 것.

그거야말로 비즈니스 관계에서 신임을 얻는 방법이었다.

나는 임선미의 약점을 그대로 재희에게 알려줬다.

[아까 그 누나 코 때려. 그 누나, 코가 약점이야. 아마 한 방이면 너 촬영 안 해도 될 거야.]

“응애?”

[당연히 진짜지. 걱정 말고 있는 힘껏 때려버려.]

“응애.”

재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둘이 사이가 좋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

돌아온 중년의 보모가 재희를 안아 들었다.

* * *

“촬영 곧 시작합니다.”

조연출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소리쳤다.

재희는 준비를 마치고 엄마와 보모를 대동하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나는 재희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파이팅!]

“응애!”

재희는 있는 힘껏 답해줬다.

나는 슬슬 재희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부잣집에서 자라서 심기가 뒤틀리는 일은 하기 싫은 게 분명했다.

[저런 녀석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나 대신 개고생 좀 해야 하는데….]

순간 엄마의 손이 훅 들어와서 내 배를 도닥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기술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손으로 내 배를 도닥이면 근심 걱정이 모두 한순간에 날아가고, 마냥 행복했다.

“성국아, 오늘 촬영 못 해도 네 덕분에 엄마도 좋은 구경 하고 정말 좋아. 엄마가 임선미도 봤잖아. 성국아, 엄마가 진짜 많이 사랑해.”

엄마는 내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울컥.

이번 생에서는 진짜 감정 조절이 너무 안 됐다.

겨우 사랑해란 말에 울컥하다니.

회귀 전에는 사랑해란 말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두들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존경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때는 그게 좋은 줄 알았다.

나는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엄마는 볼록 나온 배 위로 나를 안아 올렸다.

“엄마는 우리 성국이가 제일 이쁜 거 같은데… 여기 아저씨들은 아닌가 봐. 그래도 감독님이 여기저기 추천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우리 또 기회가 있겠지?”

[기회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엄마.]

“그래, 그래. 우리 성국이도 엄마랑 기다리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 순간,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파마머리 조연출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저기요. 준비하세요.”

“네?”

엄마가 놀라 되물었다.

“촬영 준비하라고요! 말귀도 못 알아들어요?”

“우리 성국이가 찍는 거예요?”

“아, 그렇다고요.”

[이게 어디서 짜증이야?]

아무래도 저 녀석은 기억해둬야 할 것 같았다.

곧 스태프들이 들이닥치더니 나에게 재희가 입었던 내복을 입히고 촬영장으로 안고 뛰어갔다.

임선미가 잔뜩 화난 얼굴로 화장을 고치는 게 보였다.

그 옆으로는 똑같이 화가 난 재희의 엄마가 서 있었다.

“아니,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데 그걸 못 줘요? 네?”

재희의 엄마는 감독에게 따지듯이 묻고 있었다.

“지금 벌써 1시간이나 기회를 줬는데 똑같잖아요. 애가 말을 안 듣고, 여자 모델 얼굴을 손으로 퍽퍽 치는데 어쩌라고요? 오늘 안에 촬영 끝내야 해요. 이대로라면 내일도 못 찍는다고요!”

“내가 우리 아버님한테 당장 전화 걸 거예요.”

“거세요! 나도 안 해, 이 광고!”

감독은 화가 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재희는 울음까지 터트렸고, 촬영장은 난장판이 됐다.

재희의 사모님은 벽돌 사이즈의 핸드폰을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때였다.

화장을 고치던 임선미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모델 주제에.”

“지금 우리가 어디 광고 찍는 줄 알지?”

“감히 어디서 반말이야?”

재희의 엄마는 독하게 임선미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임선미도 만만치 않았다.

“네가 반말했으니, 나도 하는 거지. 덕풍 제지 사모님. 사모님으로 대접해줄 때 제대로 했어야지. 애가 말을 더럽게 안 듣는 데다가 재능도 없는데 어쩌자고?”

“이게… 야!”

재희 엄마의 손이 올라가자마자 임선미가 재희 엄마의 손을 탁 잡았다.

촬영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 역시 넋을 놓고 봤다.

임선미는 주위를 한 번 휙 보더니 재희 엄마를 똑똑히 쳐다봤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시집 잘 가 세상이 만만한가 본데, 여기 그런 곳 아니야. 재능 없으면 찬물이나 마시고 집에 가시지. 이 자리는 재능 있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는 게 맞는 거지. 안 그래?”

“이 손 안 놔? 너, 삼전 그룹 부회장 스폰 받는 거 다 알아. 그래서 삼전 전자 전속 모델 하는 거면서. 넌 뭐 그렇게 당당해?”

[오호, 사모님도 센데.]

나와 엄마는 손을 꼭 잡고 흥미진진하게 두 여자의 대결을 지켜봤다.

“그럼 잘 알겠네. 내 뒤에는 삼전 그룹이 있는데, 겨우 중소기업 며느리 주제에 어디서 깝쳐?”

“…….”

나는 하마터면 손뼉까지 칠 뻔했다.

중소기업 며느리 주제에 어디서 깝쳐!

내가 해주고픈 말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감독과 스태프들 모두 너무 놀라 입조차 뻥끗 못 하고 있었다.

임선미는 재희 엄마의 손을 한 번에 확 뿌리쳤다. 그리고 감독에게 걸어갔다.

“감독님, 후보 모델이랑 촬영 시작하죠. 저 내일은 영화 촬영 있어서 시간 안 돼요. 아까 대기실에서 보니까 후보 모델이 훨씬 이쁘고 낯도 안 가리더라고요. 저 아줌마가 뭐라고 하면 제가 삼전 부회장님한테 전화 한 통 할 테니까, 그냥 무시하고 촬영 시작하죠. 어디 돈 좀 먹였나 본데, 삼전 그룹 회장님한테 돈 먹인 거 아닌 이상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요.”

“오케이. 촬영 시작합시다. 성국이 준비됐지?”

감독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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