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역시 기회는 만드는 것이다.
이 광고는 나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삼전 전자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통돌이 세탁기 광고였다.
삼전 전자의 전속 모델인 임선미가 출근한 남편의 셔츠를 들고 냄새를 맡는다.
각종 음식 냄새부터 땀 냄새, 담배 냄새까지 나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세탁 바구니 안에 집어넣으려다가 그만 바닥에 흘리고 만다.
놀고 있던 아기가 기어 오더니 아빠 셔츠의 냄새를 맡고는 “아. 빠!” 이렇게 말하는 게 킬포인 광고였다.
엔딩에는 통돌이 세탁기에서 세탁된 셔츠를 안고 자는 아기의 평화로운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임선미가 외친다.
“빨래 끝!”
내 머릿속에 콘티가 완벽하게 들어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아빠라는 말과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의 얼굴을 연출하면 됐다.
“선미 씨, 아기 신부터 촬영할게요.”
“감독님, 더는 시간 잡아먹으면 저 정말 곤란해요.”
“최대한 금방 끝낼게.”
감독과 임선미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걱정 붙들어 매라고.]
나는 우선 짧은 목을 가볍게 풀었다.
감독이 파마머리 조연출을 화난 얼굴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넌 이따 끝나고 보자.”
“네… 감독님.”
파마머리 조연출은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현장이 일제히 다시 정리됐다.
코디가 달려오더니 몇 가닥 안 난 내 머리카락을 빗으로 곱게 빗겼다.
“얘가 어떻게 후보였어. 아까 걔보다 백배는 이쁜데.”
[걔 돈 먹인 거야.]
“어머, 애가 내 말에 옹알거리네. 누나가 이쁘게 해줄게.”
[내 얼굴이 다 할 거지만, 뒷머리 좀 잘 눕혀봐.]
코디는 내 머리를 손질하고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감독이 엄마와 함께 다가왔다.
“어머니가 여기 계셔주세요. 선미 씨 보고 방긋 웃는 장면인데, 아기 모델 클로즈업 샷 먼저 딸 거거든요.”
“네, 감독님. 성국이 잘 웃어요.”
감독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제발 빨리 끝내자.”
[오케이!]
감독이니 고개는 끄덕여줬다.
“저 녀석, 꼭 내 말 알아듣는 거 같네.”
감독은 사방에 대고 소리쳤다.
“자, 다들 스탠바이!”
“네에!”
대답 소리가 들렸고, 곧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조명이 쏟아졌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싼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나는 화려한 조명을 만끽하며 카메라를 쳐다봤다.
카메라 바로 아래로 엄마가 몸을 최대한 낮춘 채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콘티 이미 다 안다고, 엄마. 자, 이번 컷은 한 번에 간다!]
나는 엄마를 향해서 집에서 거울 보고 연습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입 동굴이 개방되면서 목젖까지 보이는, 그야말로 누가 봐도 기분 좋은 함박웃음이었다.
“커엇!”
감독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돌려봐.”
“네, 감독님.”
조연출이 얼른 녹화된 화면을 돌렸다.
“이거 두 번 찍을 필요도 없네. 다음 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다음 신을 시작했다.
아빠라는 단어를 말하는 이 광고의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아빠라는 단어의 억양을 미세하게 분석해서 끝을 올려보기도, 끝을 내려보기도 하면서 단 세 번 만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광고장의 분위기는 활기차지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컷들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얼른 다가와서 기저귀를 확인하고, 물을 먹였다.
“성국아, 힘들지?”
[남의 돈 먹는 건 다 어려운 거야, 엄마.]
코디가 다가와서 다시 내 머리를 체크했다.
이제 임선미와의 마지막 촬영만 남았다.
임선미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국이라고 했지? 내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면서 빨래를 네 앞에 흘릴 거야.”
[응. 알고 있어.]
임선미는 엄마를 보고도 설명을 이었다.
“어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저만 잘하면 되는 촬영이에요. 성국이는 아기니까, 여기에서 기어 다니기만 화면 감독님이 알아서 편집해서 잘 이어 붙여주실 거예요.”
[무슨 소리야. 난 화면 밖에서도 연기하는 배우라고. 내 몸 연기, 기대해!]
임선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잘하자.”
[걱정 마, 임선미. 이 광고는 20년 후에도 회자되는 그런 광고가 될 거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시 카메라가 돌아갔다.
임선미는 빨래 바구니를 들고 세탁기로 향하면서 그만 남편의 셔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을 쭉 뻗어 셔츠를 탁 잡았다!
“퍼펙트!”
감독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임선미가 밝은 미소로 고개를 숙이며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태프들에게 소리쳤다.
“오늘 저녁은 내가 쏠 테니 한 명도 빠지지 말고 모여!”
“네, 감독님!”
여기저기서 유쾌한 대답이 들렸다.
“참, 조연출! 너 나 좀 보자.”
“네… 감독님.”
파마머리 조연출은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감독은 파마머리 조연출을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감독님, 무슨 할 말 있으세요?”
“너, 나랑 일한 게 이번이 처음이지?”
“네.”
“회사에 말해둘 테니까, 이번 일 정산받고 다른 회사로 옮겨.”
파마머리 조연출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더니 목소리가 격앙됐다.
“감독님,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뭐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감독은 한숨을 팍 내쉬었다.
“저도 위에서 까라고 해서 깐 거예요.”
“진짜 이 새끼가 끝까지….”
감독은 잠시 숨을 골랐다.
“덕풍 제지 그 사모님인가, 누가 나가면서 너한테 돈까지 따로 찔러줬다고 그러더라! 어! 그런데 위에서 까라고 해서 깐 거라고?”
“그, 그게….”
“그래, 위에서 까라고 할 때도 있지. 나도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어. 근데 너처럼 미리 콘티 빼서 애한테 알려주고, 돈 더 받는 짓은 안 해. 너 당장 나가고, 성국이네한테 가서도 사과해!”
“그건….”
“못 하겠어?”
파마머리 조연출은 입을 앙다물었다.
“가서 사과 안 하면 너 이 광고 바닥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일 줄 알아. 내가 그 정도 입김은 있는 거 너도 알지?”
“…네. 감독님, 죄송합니다.”
파마머리 조연출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 * *
달콤한 바나나를 한입 깨물 찰나였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대기실 문이 열렸다.
파마머리 조연출이 누가 봐도 오늘 잘린 얼굴로 들어왔다.
그러곤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흘깃 쳐다봤다.
저 눈빛만으로도 뭔지 알 것 같았다.
해고된 것도 억울한데, 지금 나한테 사과까지 하라고 감독이 시킨 모양이었다.
삼전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요직에 필요한 인재들을 자르고 고용하는 일을 수없이 했다.
내가 직접 말한 경우는 없지만, 어쨌든 우연치 않게 얼굴을 다시 볼 때면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나나를 앙 깨물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어댔다.
파마머리 조연출은 엄마에게 다가가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 저 때문에 기분 나쁘신 일 있으셨으면 사과드릴게요.”
그때였다.
문틈 사이로 지나가던 감독이 버럭 소리를 쳤다.
“야! 제대로 안 해!”
뜨끔 놀란 파마머리는 얼른 엄마와 내게 고개를 푹 숙이고는 문밖에 있는 감독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저 때문에 기분 나쁜 일 있으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바나나를 우물거리며 파마머리 조연출을 눈에 담았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었다.
원래 이런 기생충 같은 놈들이 생명력은 미친 듯이 끈질겼다.
이때, 감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 끝났으면 마무리해.”
감독은 마무리까지 아주 깔끔하게 알려줬다.
“네, 감독님. 전 가볼게요.”
파마머리 조연출은 연신 고개를 숙이고는 나갔다.
엄마는 얼른 감독님에게 음료수 하나를 내밀었다.
“감독님, 고생 많으셨어요.”
“아우, 우리 성국이가 고생했죠. 이 녀석 때문에 촬영 시간이 반으로 줄었어요.”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임선미도 고개를 삐죽 들이밀었다.
“다 여기 있네요. 뭐야, 나 주인공 뺏긴 거예요?”
임선미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더니 내 칭찬을 늘어놨다.
“어머니, 진짜 성국이 떡잎부터 달라요. 어머니도 이렇게 미인이신데, 성국이 큰 모습도 기대돼요.”
“과찬이세요. 우연히 참가한 건데, 광고까지 찍고 임선미 씨도 보고. 너무 행복했어요.”
엄마는 정말 해맑게 웃었다.
감독도 잘 챙기고,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방을 올려주는 것이, 엄마에게서 사회생활 만렙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 와중에 나는 광고 촬영에 너무 열과 성의를 다 쏟았는지 잠이 쏟아졌다.
엄마에게 안겨 꾸벅꾸벅 졸았다.
감독이 얼른 말을 건넸다.
“이 녀석, 피곤한가 보네. 어머니, 회사 가는 봉고 타지 마시고 제 차로 같이 가세요. 집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회사 가서 모델료도 받아야 하고.”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해놓을게요.”
“저희 집 멀어서요. 저희 데려다주고 가시면 회식 늦을 거예요.”
엄마는 한사코 만류했다.
“집이 어디신데요? 전 내일 영화 촬영 때문에 어차피 회식 못 가거든요. 저녁에 먹으면 바로 붓는 스타일이라서요.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임선미가 나섰다.
엄마는 얼른 손을 휘저었다.
“말도 안 돼요.”
“괜찮아요. 보니까 둘째 가지신 것 같은데, 봉고 타고 거기서 또 움직이셔야 하잖아요. 집 어디세요?”
“수유리요.”
엄마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배우가 수유리 같은 곳을 모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 성국이랑 진짜 인연인가 봐, 감독님. 저 수유리 출신이잖아요. 오랜만에 동네도 구경하고, 데려다 드릴게요. 사양 마세요.”
“진짜요?”
“그럼, 진짜죠. 그러니까 사양 진짜 마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는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 바람에 나도 연신 아래로 떨어졌다 위로 솟구치는 통에 조금 멀미가 났다.
[엄마, 나 멀미 난다고.]
“미안, 미안. 성국아.”
엄마는 나를 안고는 임선미를 따라나섰다.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감기는 눈으로 엄마의 미소를 황홀하게 바라봤다.
철의 여인은 한 번도 저런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어쩌면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미소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던 것인지도.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구나.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임선미의 매니저는 우리 집 골목에서 차를 멈췄다.
꿀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임선미를 보고 방긋방긋 웃어줬다.
회귀 전 철의 여인이 참 미워했는데, 오늘은 나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성국이 잠 다 잤어?”
“응애.”
“진짜 말귀 다 알아듣네. 어머니, 연락처 하나만 주세요.”
“연락처요?”
“성국이 이번 광고 나가면 아마 장난 아니게 광고 제의 많이 들어올 거예요. 어머니 혼자 감당 안 되실 거예요. 저희 기획사 괜찮거든요.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아, 그것까진….”
엄마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임선미가 재빨리 명함을 내밀었다.
“저희 회사 대표님 명함이에요. 제가 대표님한테는 잘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꼭 연락 주세요.”
[안 받고 뭐 해, 엄마!]
나는 얼른 엄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엄마는 내 제스처를 읽고는 얼른 임선미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국아, 다음에 또 보자!”
임선미가 손을 흔들었다.
* * *
엄마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멍하니 현관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고 있었다.
“107호, 왜 그래요?”
“어, 언니…?”
막 퇴근한 단발머리가 뒤에서 엄마를 불렀다. 단발머리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쾌감 같은 게 얼핏 보였다.
“성국이가 대타로 홈런 날렸다면서요?”
“벌써 소식 들으셨어요?”
“감독님이 직접 전화 와서 모델료 빨리 정산해서 갖다 주라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심지어 책정된 모델료보다 더 주기로 했어요.”
“정말요? 근데… 모델료 얼마예요?”
엄마는 눈을 깜빡였다.
[엎드려서 셔츠 냄새 맡느라 내 승모근과 허리가 빳빳하게 굳었는데, 얼마 받는지도 모르다니.]
“원래 300만 원인데, 삼전 그룹 쪽에서 보너스로 100만 원 더 넣어줬어요.”
“그, 그럼….”
“총 400만 원에서 세금 떼고 가지고 왔어요. 수령 확인서에 사인 좀 해줘요. 안 그러면 나 돈 떼먹은 사람 되니까요.”
“당연히 사인해야죠.”
단발머리가 엄마에게 누런 봉투를 내밀었다.
엄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어, 언니. 저 평생 이렇게 큰돈 처음 만져 봐요.”
[엄마, 정신 차리라고. 나 전성국이야. 그 돈의 억만 배는 넘게 벌거니까, 그만 감동해.]
“문단속 잘하고 있어요.”
“어, 언니…. 성국이 아빠가 늦거든요. 같이 저녁 안 드실래요? 저, 너무 무서워요.”
단발머리는 살짝 갈등했다.
막 퇴근한 직장인에게 아기까지 딸린 여자가 같이 밥을 먹자는 것은 노동의 연장을 의미했다.
단발머리는 사지를 덜덜 떠는 엄마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손짓을 했다.
“우선 집에 들어가서 문 잘 잠그고 있어요. 요 앞에 가서 치킨 사올게요.”
“어, 언니. 잠시만요.”
엄마가 노란 봉투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벌벌 떨며 꺼내려고 하자, 단발머리가 손으로 막았다.
“됐어요. 이 돈 모아서 더 좋은 데 이사 가요. 어서 들어가 있어요.”
“언니, 고마워요.”
단발머리는 총총걸음으로 다세대주택을 빠져나갔다.
피곤한 와중에도 나는 단발머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이전 생의 아버지인 전재형 회장은 항상 말씀하셨다.
- 아무도 믿지 마라. 부모도, 자식도.
집주인 단발머리는 왜 우리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