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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8화 (8/231)

제8화

허겁지겁 이유식을 먹어치우는 동안에 단발머리는 닭다리를 뜯었다.

엄마는 옆에서 퍽퍽한 가슴살만 먹어치우고 있었다. 집주인 눈치를 보는 거였다.

단발머리가 엄마 앞으로 남은 다리 하나를 내밀었다.

“먹어요.”

“언니 드세요. 전 괜찮아요.”

“맛없는 퍽살 고문 그만하고, 이거 먹어요. 난 먹을 만큼 먹었어요.”

“감사해요.”

그제야 엄마는 다리를 받아 들었다.

나는 그릇째 이유식을 후루룩 마시면서도 단발머리를 응시했다.

이가 조금 더 많이 나고, 혀가 마음대로 굴러가 준다면 다짜고짜 물어봤을 텐데…. 속만 탔다.

“근데 언니, 저희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엄마, 완전 순진하지만은 않네. 그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내 생각 나서요.”

“언니가 왜요?”

“내가 20대 초반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여상 나와서 지금 회사 경리부에 들어갔어요. 그땐 그래도 나 같은 여상 출신들 많았는데, 지금은 다 잘리고 나밖에 안 남았어요.”

만년 과장인 이유가 그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를 비롯해서 대학 나온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었다.

회귀 전에 우리 집안은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기본 코스였다.

영어와 프랑스, 일어는 네이티브 수준이었고 그 외에 독일어와 중국어는 생활 대화 나눌 정도로 했다.

어울리는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 모두 나보다는 못해도 유학 정도는 다 다녀왔다.

내가 아는 고졸은 학벌 상관없는 아이돌이나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 몇 정도였다.

“언니,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뭔데요?”

“직장 생활만 하신 건데, 이 집은 어떻게 장만하신 거예요? 진짜 대단하세요.”

“대단하긴요. 경매 받았어요.”

“경매요?”

[경매라면… 뭐, 망한 기업 인수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단발머리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도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어요. 그럼, 돈이라도 있어야겠단 생각에 악착같이 월급 모아서 경매를 했거든요. 처음엔 지하 원룸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진짜 대단해요, 언니! 언니, 저도 좀 가르쳐주실 수 있어요? 성국이 아빠도 열심히 일하는데, 저도 성국이 크면 나가서 이런저런 일 해보게요.”

[흠, 부동산이라.]

나는 짧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비록 금수저로 태어나진 못했지만, 대한민국은 딱 두 가지만 잘하면 된다.

부동산과 주식.

흙수저가 14K 금수저 정도 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경매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내가 경매로 집을 살 일은 없었다. 넘어갈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성국이네도 이제 둘째 곧 나오잖아요. 얼른 돈 모아서 집 장만해요. 나도 보고 듣는 게 있는데, 아기 모델이라고 무시 못 해요. 오히려 지면 광고부터 해서 공략할 데가 많아서 우리 부장님 연봉쯤은 월급으로 버는 아기 모델도 많아요.”

“와, 진짜 신세계네요.”

엄마는 닭다리를 한 손에 들고 감탄했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월 50만 원 수준의 월급.

티끌은 모아봤자 티끌이다.

이 가난한 집구석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 했다.

근데 왜 이렇게 졸리지.

무거운 머리가 연신 바닥을 향해 돌진했다.

엄마가 얼른 나를 안아 들었다.

“성국아, 씻고 자야 하는데….”

[졸려. 아무것도 못 하겠어.]

“성국아, 치카치카만 하자.”

[치카치카 몬 해. 몬 해.]

단발머리가 나를 보며 웃었다.

“성국이는 정말 엄마, 아빠 말 다 알아듣는 거 같아요.”

[그럼… 다 알아듣고말고. 당신 말도 다 알아들었다고…. 단발…머…리. 조심해….]

* * *

광고는 촬영 2주 뒤에 첫 방송 된다고 감독이 직접 전화까지 줬다.

시청률 50%에 육박하는 주말드라마 시작 바로 직전이었다.

엄마와 나는 주말에 쉴 수 없는 아빠를 위해서 아빠 가게에 가서 같이 광고를 보기로 했다.

아빠가 일하는 가게는 처음이었다.

드디어 아빠의 경제 상황이나 여건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엄마는 부른 배를 잡고 몇 번이나 쉬면서 집 근처 번화가에 있는 작은 식당 앞에 멈춰 섰다.

<원아저씨 보쌈>

[하아…. 상호하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게의 사이즈가 한눈에 들어왔다.

겨우 테이블 여덟 개뿐인 소규모의 가게였다. 주방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한옥을 콘셉트로 한 것인지 서까래가 달린 천장. 조잡한 소품들이 가게 안에 가득했다.

[하아….]

나는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이 가게에 미래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막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우리를 반겼다.

“성국이 엄마 왔네.”

“사장님, 잘 계셨어요?”

“아이고, 이 녀석이 복덩이 성국이구나.”

아빠가 주방 안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소영아, 왔어?”

“응, 자기야.”

[아빠!]

나는 손을 들어 흔들었다.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이유식과 기저귀를 책임지고 있는 이 집의 가장이다, 뭐 이런 의미였다.

“성국아, 아빠 곧 나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소영아, TV 앞에 빈자리에 앉아.”

“응.”

엄마는 TV 앞 빈자리에 앉았다.

손을 닦고 온 사장이 얼른 달려오더니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지성 씨가 맨날 자랑하던데. 사진보다 실물이 백배는 더 이쁘네요.”

[당연한 말씀을….]

내가 히죽거리자 사장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냉장고로 향했다.

“성국이는 아직 보쌈 같은 거 못 먹으니 바나나 좀 사다놨어요.”

“이유식 먹고 왔어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지성 씨 없으면 우리 가게 안 돌아가요. 지성 씨가 우리 집 보쌈이 맛있다고 주막에서 보쌈 전문점으로 바꾸자고 해서 바꿔서 그나마 요즘 숨통 트였잖아.”

나는 주방에서 일하는 아빠를 다시 봤다.

그러고 보니 가게 인테리어가 일반 보쌈집 같지는 않았다.

한옥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사이사이 걸려 있는 조잡한 그림이나 소품들.

TV 드라마에서 돈 없는 서민들이 막걸리나 마시는 주점 분위기였다.

사장은 들뜬 목소리로 연신 말을 이었다.

“손님들이 보쌈 맛있다고 해도 이거 하나로 승부 볼 생각은 못 했거든. 근데 지성 씨가 메인 메뉴로 보쌈 두고, 술안주 몇 개만 남기고 정리하는 게 이윤도 더 많이 남고 테이블 회전도 빠를 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서 바꾸고 나서 정말 잘되고 있어요.”

사장은 내 앞에 바나나를 까서 내밀었다.

엄마가 얼른 작게 잘라서 내 입에 밀어 넣었다.

“성국아, 천천히 먹어.”

[이가 성치 못해서 빨리도 못 먹어.]

나는 이제 막 나기 시작한 앞니 두 개로 바나나를 잘라먹었다.

손님들이 연이어 밀려들어 왔다.

“사장님, 가서 일 보세요.”

“그럼, 광고 시작할 때 같이 봐요.”

사장은 얼른 손님을 맞았고, 엄마와 나는 TV를 보며 광고를 기다렸다.

주방에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킁킁.

[맛있겠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침이 흘렀다.

[전성국, 왜 이래. 품위 없게.]

갑자기 바나나가 하찮아 보였다.

엄마가 나를 보더니 안아 들었다.

“성국아, 바나나 별로야?”

[보쌈!]

나는 주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보쌈 달라고?”

끄덕.

무거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동시에 아빠가 그릇 가득 잘 익은 돼지고기를 들고 나왔다.

“자기야, 성국이가 보쌈 달라는데.”

“성국이도 돌 지났으니까, 연한 살코기는 먹어도 될 것 같아서 조금 삶았어.”

[역시 아빠!]

나는 까르르 웃으며 손바닥을 마구 쳤다.

사장은 나를 보곤 함박 미소를 지었다.

“엄마, 아빠 닮아서 아주 인물이 좋아. 성국아, 나중에 잘되면 우리 보쌈집 모델 해줄 거지?”

[보쌈집 모델은 사양할게, 사장. 내 품위에 안 어울린다고.]

“당연하죠, 사장님. 그땐 돈도 안 받을게요.”

[내 인생에 공짜는 없어, 아빠.]

사장은 얼른 다른 테이블의 서빙을 마치고는 아빠를 의자에 앉혔다.

“아들 첫 광고인데, 같이 봐야지.”

이때,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들은 손님들이 물었다.

“누가 광고 찍었어요?”

“요 녀석이 이번에 삼전 전자 광고 찍었어요. 우리 식당 매니저 아들이에요. 이쁘죠?”

사장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우리도 광고 보고 먹게 천천히 줘요.”

“그래도 될까요?”

“대신 얼른 술이나 주세요. 축배 들어야죠.”

“제가 오늘 손님들한테 소주 한 병씩 서비스로 다 드릴게요!”

보쌈집 사장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테이블로 날랐다.

아빠도 얼른 손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이때, 한 손님이 소리 질렀다.

“TV 가리지 말고, 두 사람도 어서 앉아요.”

아빠가 위생 모자를 벗으며 엄마 앞에 앉았다.

내 광고가 나오기 5분 전이었다.

“사장님도 어서 오세요. 같이 봐야죠.”

“당연하지.”

사장은 냉장고에서 소주까지 꺼내와 자리에 앉았다.

모두 들뜬 얼굴로 TV를 주시했다.

“자기랑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다. 우리 성국이 이쁘게 나오겠지?”

“나도 궁금해 죽겠어. 오늘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제대로 안 잡혔다니까.”

후루룩. 후루룩.

나는 어느새 아빠가 삶은 야들야들한 보쌈 고기를 쪽쪽 빨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들이 한 고기 요리를 모두 섭렵한 내 입맛에도 꽤 훌륭한 맛이었다.

[아빠, 내가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성국이는 아빠 보면서 뭘 이리 종알거릴까.”

“자기야, 드라마 시작한대. 이제 나올 건가 봐.”

가게 안의 모두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엄마와 아빠는 내 손을 꼭 잡고 마치 월드컵 결승전을 기다리듯이 광고를 기다렸다.

엄마와 아빠의 두 손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TV에 드디어 빨래 바구니를 든 임선미가 등장했다. 그리고 익숙한 내용이 흐르고, 드디어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빠?

가게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빠와 엄마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보쌈 고기를 쪽쪽 빨고 있는 나를 쳐다봤다.

[뭐 이런 걸로 감격하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장이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이고, 이뻐라. 우리 성국이 TV로 보니까 더 이쁘네!”

[귀찮았지만, 아버지의 보스니 내 보스기도 하니 좀 웃어줄게.]

히죽히죽.

“웃으니까 더 이쁘네. 나도 저 통돌이 세탁기로 이번에 바꿔야겠네.”

“엄마, 아빠 인물도 워낙 좋아서, 커서도 이 녀석 한 인물 하겠어.”

“여자 여러 명 울리겠네.”

가게에 있던 손님들도 한마디씩 했다.

“기분이다. 보쌈 포장도 하나 해주세요. 집에서 공부할 우리 아들 가져다줘야겠네.”

주문까지 밀려들었다.

사장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성 씨, 내가 주방은 잠시 볼 테니 먹고 들어와.”

“아니에요. 저도 성국이한테 인사만 하고 곧 갈게요.”

아빠가 나를 안아 들어 등을 도닥였다.

“우리 성국이 장하다. 장해.”

[나, 전성국이야.]

“알지, 알지. 고생 많이 했어. 아빠가 우리 성국이 선물 사줘야 할 것 같은데. 뭐가 좋을까.”

[선물?]

돌이 갓 지난 나에게 필요한 건 딱히 없었다.

고작해야 전복과 소고기가 가득 들어간 이유식뿐이었다.

그래도 선물을 준다니 살짝 흥분됐다.

회귀 전에 나에게 주어진 선물은 이런 거였다.

열 살 생일 파티를 놀이동산 통째로 빌려서 하기.

대학 입학 선물로 강남 최고가 주상복합 펜트하우스 독립.

한도 없는 신용 카드.

차와 시계는 수시로 선물받아서 선물이라고 생각도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가난한 엄마와 아빠가 나에게 해줄 선물은 뭘까?

나, 기대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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