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그래, 오늘은 마이클 믿어보자.”
그룹의 맏형인 태형이 마이클을 두둔하자, 다른 멤버들은 어쩔 수 없이 각자 잠자리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부엌으로 슬금슬금 기어갔다.
벽을 붙잡고 걸을 수도 있었지만, 빠르게 움직일 때는 아직 기어가는 게 편했다.
이때, 범선이 나를 한 팔로 낚아챘다.
“성국아, 부엌 위험해.”
[저 녀석이 먹는 거에 무슨 장난을 치려는지 지켜봐야지. 니들은 마이클을 믿냐?]
내가 옹알거리자, 범선이 나를 안아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마이클, 우리 성국이 저녁 뭐야?”
“어…. 이유식이지. 성국이 어머니가 낮에 만들어준, 뭐 죽 같은 거 있잖아.”
“근데 너 뒤에 뭐야?”
범선이 마이클의 뒤를 보려고 하자, 마이클이 얼른 무언가를 뒤로 감췄다.
“뒤에 뭐가 있다고 그래?”
마이클이 역정을 냈다.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반증이었다.
“야, 어서 내놔봐. 무슨 장난 치려고 그러는 거야!”
범선의 소리에 멤버들이 모두 우르르 달려왔다.
“마이클, 뒤에 숨긴 거 뭐야? 어서 내놔봐.”
태형의 말에 마이클은 갑자기 해맑게 웃으며 핫소스를 내밀었다.
“형들, 재미 삼아 이유식에 넣으려고 했지. 근데, 아직 안 넣었어.”
[이놈의 새끼를! 내 신성한 밥에 핫소스를 뿌리겠다고!]
내가 바동거리자, 범선은 나를 더욱 꼭 안았다.
태형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곤 이를 악물고 마이클에게 속삭였다.
“너, 이번만 봐준다. 앞으로 이런 장난 치기만 해봐.”
태형은 얼른 핫소스를 빼앗아 들었다.
그날 밤, 마이클은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걸었다.
가만히 있는 내게 탁구공을 던지기도 했고, 내가 졸려 하자 옆에서 삐익 장난감 나팔을 불어대기도 했다.
그 바람에 난 소스라치게 놀라 대성통곡을 했다.
마이클 이외의 멤버들이 나를 철벽 방어한 덕분에 그나마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사다난한 밤이 끝나고, 아침이 밝았다.
엄마 없이 보낸 최초의 밤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엄마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엄마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벽을 잡고 기어갔다.
“어엄. 마앙!”
그러곤 엄마의 치마에 매달려 눈물, 콧물을 쏟았다.
[엄마, 나 마이클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
나는 얼른 마이클을 손가락질하며 옹알거렸다.
“성국아,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대성통곡하며 엄마의 품에 안겼다.
“으아앙. 엄. 마! 으아앙. 엄. 마!”
* * *
21.9%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파일럿 프로가 주말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정규 방송으로 편성해 달라는 시청자 의견으로 방송국 전화가 난리가 났다.
학교는 물론 회사나 시장에서도 저스트의 인기 상승과 더불어 세탁기 광고로 얼굴을 알린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엄마를 찾아온 단발머리가 이런 나의 인기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었다.
엄마는 반응이 좋다는 이야기를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감독한테 들었을 뿐이다.
“107호,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반응 장난 아니에요. 우리 회사에서도 다들 성국이 이야기뿐이에요.”
“저스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성국이 이야기를 그렇게 해요?”
“저스트 이야기도 많이 하죠. 근데 그 관계성 중심에 다 성국이가 있잖아요. 벌써 다들 태형이는 아빠, 재현은 엄마. 마이클은 앙숙. 이렇게 관계를 정해서 말한다니까요. 성국이가 완전 주인공이에요.”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리에 힘을 팍 넣고 낮은 선반에 손을 댄 채 걸어 다니는 연습을 했다.
정규 방송에 편성되면 첫 녹화에서 나의 걸음마 연습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단발머리가 나를 흘깃 쳐다봤다.
“성국이는 마치 스타가 되려고 태어난 애 같아요.”
[무슨 소리야. 내가 겨우 연예인 나부랭이나 되려고 태어난 줄 알아? 내 목표는 재벌이라고! 이건 재벌이 되기 위한 첫 단추일 뿐이라고. 단발머리.]
나는 두 주먹을 앙 쥐었다!
엄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언니, 근데 전 너무 걱정이에요. 아직 두 돌도 안 지난 아이한테는 스케줄이 너무 힘든 것 같아서요. 마지막 밤 촬영 끝나고 아침에 갔는데 성국이가 나 붙잡고 정말 많이 울었거든요.”
[그건 마이클 때문에 화가 많이 나서 울은 거야. 분노의 눈물이랄까.]
엄마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감독님께 정규 편성돼도 성국이가 힘들어해서 안 한다고 하니까요, 감독님이 출연료뿐 아니라 모든 거 다 배려해 준다고 집까지 찾아오셔서 사정사정하셨거든요.”
“이 일을 왜 안 해요?”
[내 말이!]
단발머리가 더 열을 냈다.
“성국이 겨우 돌 지났는데, 이제 곧 둘째도 나오고… 제가 성국이 다 쫓아다닐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성국이도 이쪽에 재능 있는 것 같으니까, 107호가 계속 붙잡고 있지 말고 기획사 알아봐요.”
“기획사요? 아, 맞다.”
엄마는 선반 위에 둔 명함 하나를 단발머리에게 내밀었다.
“언니가 그래도 저보다 잘 아시잖아요. 임선미 씨가 준 명함이거든요. 자기 소속사 추천한다고요. 언니, 이 기획사 아세요?”
“신성 기획이네요.”
단발머리의 미간이 구겨졌다.
동시에 내 미간도 구겨졌다.
내가 깜빡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임선미가 있던 신성 기획은 연예인과 재벌 사이를 연결해줘서 성장한 기획사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 신성 기획의 대표 신성중은 내가 싫어하는 인간 종류였다.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로드 매니저로 시작해서 신성 기획의 대표가 된 만큼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버지 전재형은 시골 출신으로 연예계에 자리 잡은 신성중을 나름 높게 평가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 철칙 중 하나는 아버지의 사람과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믿고 종종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아버지 때처럼 대해줄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감히 나, 전성국에게!
신성 기획과의 계약은 어떤 식으로든 막아야 했다.
[엄마, 계약은 신중해야 한다고….]
나는 얼른 엄마를 향해 걸어갔다.
이때, 엄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지금 걷는 거야?”
[어… 이게….]
분명 지금 나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걷고 있었다.
물론 다리에 힘이 수시로 빠져서 휘청거렸지만, 분명 나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걷고 있었다.
“엄. 마!”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장아장.
“어머, 성국아.”
엄마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나는 그 품에 쏙 안겼다.
따뜻한 엄마의 품.
엄마에게서는 깨끗한 비누향이 났다.
[아, 이게 진짜 엄마의 품이구나.]
회귀 전 철의 여인에게서는 언제나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내 최초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녀에게 안긴 건 몇 번 없었다.
나는 언제든 원하면 폭 안길 수 있는 지금의 엄마 품에서 잠시 취했다.
산통을 깬 건 단발머리였다.
“107호, 신성 기획이 좀 말이 많은 데긴 하지만 임선미가 추천한 데니 우선 만나봐요. 기획사는 여러 군데 만나보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랑 계약해야 해요.”
“경리로 일할 땐 계약서도 잘 보고 그랬는데, 너무 집에만 있어나 봐요. 그리고… 서울은 좀 무섭기도 하고요. 언니가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삼전 기획 경리부에서 일하시니 저보다는 훨씬 잘 아실 거잖아요.”
나는 엄마를 다시 봤다.
엄마는 경력자인 단발머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족한 지점을 정확히 알고, 조력자를 곁에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단발머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임선미가 준 명함에 나온 데로 전화해봐요. 나도 이 바닥 이야기는 좀 아니 도와줄게요.”
“언니, 정말 감사해요.”
나는 얼른 속으로 외쳤다.
[그래도, 신성 기획은 절대 안 돼!]
나는 엄마의 옷깃을 잡아당겼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했다.
* * *
엄마와 나 그리고 단발머리는 93년도로 치면 최신식으로 꾸며진 신성 기획의 사무실 안에서 계약서를 보고 있었다.
세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가.
신성 기획의 사무실은 퇴폐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다.
우리 앞에는 신성 기획의 아이라인이 두꺼운 직원이 앉아서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단발머리와 엄마가 보는 계약서를 읽어 내렸다.
[계약 기간 10년? 수익 배분율은 5 대 5? 장난하나, 이것들이.]
한마디로 이건 거의 노예 계약이었다.
계약 기간과 수익 배분율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와 단발머리를 번갈아봤다.
이런 일에는 엄마보다 단발머리가 더 나아 보였다.
나는 얼른 단발머리의 계약서를 두 손으로 탁탁 내려쳤다.
[여기 좀 보라고!]
특히 기간과 수익 배분율이 있는 곳을 콕 집어서.
“성국아, 이러면 안 돼.”
엄마가 나를 얼른 말렸다.
단발머리는 빙긋 미소를 짓더니 내가 손으로 툭툭 내려친 조항들을 다시 세밀히 살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직원을 쳐다봤다.
“이 조항들 그대로 계약해야 하는 건 아니죠?”
“왜 그러세요?”
직원의 자신 없는 말투가 들렸다.
저 말투는 이미 계약 조항을 바꿀 수 없다는 뉘앙스였다.
[신성 기획은 신인이라면 골수까지 빨아먹는 회사라고! 노예 계약은 사양할게!]
나는 화난 투로 종알거렸다.
“계약 기간이랑 수익 배분 같은 것은 좀 조율할 게 보여서요. 그리고 디테일한 사항들도 꽤 많이 조율해야 할 것 같고요.”
직원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대표님께 한번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네.”
나는 팔짱을 끼고 단발머리를 쳐다봤다.
[어쭈, 단발머리 제법인데.]
* * *
달칵.
잠시 후 회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신성중이 직접 들어왔다.
나는 팔짱을 끼고 신성중을 찬찬히 훑었다.
기름진 얼굴. 올백으로 넘긴 머리. 화려한 셔츠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신 대표, 오랜만이네요. 머리숱이 아직까지는 참 많네.]
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신성중을 봤을 때는 머리가 훤하게 벗겨져 있었다.
신성중은 두 손을 비비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저 제스처가 진짜 나는 싫었다.
마치 이제 내가 이야기를 시작할 거고, 난 고귀한 척 같은 건 안 하는 장사치다, 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얘가 성국이군요. 화면도 잘 받던데, 실물로 보니 더 이쁘네요.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이 녀석 두고 하는 말인가 봐요.”
[이 녀석이라니. 어디서 하대야, 신 대표.]
신성중의 시선이 엄마에게로 향했다.
“사모님도 미인이시네요. 역시 이 바닥은 유전자가 정말 중요하죠.”
그러곤 단발머리를 쳐다봤다.
“같이 오신 분은 이모? 고모?”
“이웃인데요. 삼전 기획 다니는 김미영이라고 합니다.”
그때 난 처음으로 단발머리의 이름을 알았다.
김미영.
“아하.”
신성중은 짧게 인사를 마치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계약서에서 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계약 기간이랑 수익 배분이요. 아시다시피 성국이가 완전 신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계약 기간 10년에 5 대 5 비율은 아닌 것 같아서요. 이미 성국이 방송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광고도 수두룩하고요.”
김미영이 툭 치고 나갔다.
그리고 쐐기까지 박았다.
“같이 일한 감독님들이 다른 기획사도 추천해 주셨는데, 그래도 임선미 씨가 추천한 곳이라 여기 제일 먼저 온 거거든요.”
[신성중 같은 인간은 권위에 약하지. 잘했어, 단발머리.]
나는 김미영의 등을 두 번 토닥여줬다.
신성중이 못마땅한 얼굴로 두 손을 파리처럼 비벼댔다.
신성중은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물이었다.
지금 그에게 혹처럼 딸려온 김미영은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건 잘 알죠. 요즘 광고계에서 성국이가 블루칩 아닙니까. 근데 말입니다….”
신성중은 뜸을 들였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눈치를 가늠해보는 중이었다.
곧 신성중은 판단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베이비 모델 시장이 생각보다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출연료도 성인 연기자에 비하면 턱도 없고요. 거기다 뭐, 대화도 안 통하고 그러다 보니 광고 촬영 시간도 길어지고, 그럼 저희 회사 직원들도 스탠바이 상태로 계속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졸로 봤네.]
신성중은 남루한 차림의 임신한 엄마와 어린 나, 그리고 삼전 기획의 경리부에서 일하는 단발머리를 보고는 한눈에 깔아뭉갤 상대로 본 게 분명했다.
나는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신성중의 말을 들었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대체 어떻게 말을 둘러치나 듣고 있었다.
“그리고 애 얼굴은 1년에 열두 번도 더 변하지 않습니까. 성국이 지금 이쁘지만, 한 달 후에는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고. 솔직히 잠깐의 인기 후에 얼굴 변해서 광고 제의도 줄고. 그런데도 저희의 고정 지출은 있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계약 조건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말씀이죠?”
김미영이 끼어들었다.
내 속이 다 시원했다.
신성중이 손바닥을 다 보이며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저희 회사 입장을 말씀드리는 거죠. 선미 부탁도 있고, 저도 성국이 같은 스타감이랑 꼭 계약하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을 하려는 수작이었다.
더 들을 말 따위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가 나를 얼른 안으려고 했지만, 나는 휘청거리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의 결연한 의지와 상관없이 엉덩이는 뒤뚱거렸다.
“성국아!”
안 나오고 뭐 해. 엄마!
단발머리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신성중을 쳐다봤다.
“저희는 제시하신 조건으로는 계약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계약 조건 조율하셔서 다시 연락 주시죠.”
[단발머리, 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