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는 라디오가 교통정보를 알려주고 있었다.
길이 꽤 막히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아기 띠를 잠시 풀고는 부른 배 위에 내 손을 올려놨다.
“성국아, 동생이 지금 엄마 배 속에서 놀고 있어.”
정말 배 위로 무언가 쿡쿡 찌르는 게 느껴졌다.
삼전 그룹에서 동생의 탄생은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경쟁자가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형제만 봐도 형제 사이가 남보다 못할 때가 많았다.
나는 엄마 배에서 매몰차게 손을 뗐다.
[경쟁자 녀석….]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미영을 엄마는 물끄러미 봤다.
신성 기획을 나온 이후로 단발머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김미영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언니,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죠?”
“있긴 한데….”
김미영은 말을 아꼈다.
그때, 엄마가 먼저 김미영의 손을 훅 잡았다.
“언니, 혹시 우리 성국이 매니저 안 해볼래요?”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을 막 했다.
삼전 기획에서 경리부지만 과장까지 단 여자이다. 거기다 최후의 고졸 사원이다.
그 정도의 끈기라면 내 매니저로 합격점이었다.
나는 칭찬의 의미로 엄마의 배를 두 번 도닥였다.
토닥토닥.
나는 얼른 김미영을 봤다.
[단발머리,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
그 순간, 엄마가 내 배를 도닥였다.
“성국아, 잠시만 조용히 해줘.”
[쳇. 어쩔 수 없지.]
나는 입은 닫고, 팔짱은 끼고 김미영을 매섭게 쳐다봤다.
김미영은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내가 그 말 먼저 하려고 했는데. 107호한테 선수 빼앗겼네요.”
[김미영,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진짜 한다는 거지?]
나도 놀랐고, 엄마도 놀랐다.
“언니도 생각한 일이에요?”
끄덕.
김미영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근데… 언니 회사는 어쩔 생각이세요?”
“그만 다니려고요. 30대 후반의 노처녀, 회사에서 반가워하지도 않거든요. 모아둔 돈으로 창업 준비 하려고 했는데… 성국이 매니지먼트를 내가 해보면 어떨까 잠시 상상은 해봤어요.”
단발머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계약 조건이야 당연히 신성 기획보다 좋을 거고, 내가 그동안 경리부에서 일한 경력 있으니 돈 문제는 깔끔하게 처리할 거예요. 삼전 기획에서 매니저들이 일하는 방식이나 관리하는 거 많이 봤어요.”
김미영은 이미 계약 조건부터 자신의 어필까지 모든 것을 다 생각하고 있었다.
[단발머리, 다 계획이 있었구나.]
나는 엄마의 원피스 자락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단발머리 정도면 내가 재벌이 되는 데 좋은 발판이 되어줄 인재였다.
[엄마, 계약서 쓰자고 해!]
마치 엄마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편하게 말해요. 거절도 괜찮아요.”
김미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언니, 성국이 아직 어리고, 저희 가난하지만 성국이 힘든 모습 보면서까지 연예인 시키고 싶지 않거든요. 제가 예정일이 얼마 안 남아 알아본 건데요. 이번 일만 하고 성국이 더는 안 할 수도 있어요.”
“그럼 더 잘됐네요. 저런 회사는 묶이면 기본 10년이잖아요. 나는 성국이가 일 그만두면 그때 계약 해지하는 걸로 해요.”
“언니….”
“나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나한테 고마워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어요. 물론 나도 일한 만큼 보수는 받을 거고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어 보였다.
나는 다시 엄마의 옷을 잡아당겼다.
[어서 같이 일하자고 해, 엄마.]
“언니…. 염치없지만, 성국이 매니저로 저 좀 도와주실래요?”
“당연하죠.”
단발머리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나는 배에 두 팔을 올린 채 단발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김미영 씨, 앞으로 내가 지켜볼 테니 잘해야 해.]
“열심히도 종알거리네. 앞으로 잘 부탁해, 성국아.”
김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비록 고아로 태어나 외롭게 자라고 공부도 제대로 못 했지만, 대신 하늘에서 인복이라는 것을 내린 게 분명하다.
똑 부러지는 집주인을 만나고, 거기다 나 같은 준비된 재벌을 만나다니….
나는 엄마를 꼭 안았다.
엄마의 부른 배 때문에 거슬리긴 했지만, 이 배 속에 들어 있는 동생이란 놈도 천운을 타고 태어난 건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나 전성국이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배를 통통 쳤다.
[동생, 넌 적어도 14K 금수저 예약이야.]
* * *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가 저번 주에 시청률 25%를 넘겼습니다! 오늘 끝나고 회사에서 회식 준비했으니 다들 참여해 주세요.”
‘저스트’의 매니저가 크게 소리쳤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의 인기 덕분에 수많은 신인 그룹 중 하나였던 ‘저스트’의 인기도 덩달아 급상승했다.
“자, 회사에서 산다니 다들 참석하고. 촬영 들어가자고!”
감독의 한마디에 다시 주변은 조용해졌다.
엄마 역할을 맡은 꽃미남 재현이 나를 안아 올렸다.
이때, 부엌에서 마이클이 바나나를 입에 물고 나오자 재현이 기겁했다.
“마이클, 그거 성국이 거야. 그걸 네가 먹으면 어떡해!”
“나는 입도 아니야? 배고파 죽겠어.”
“아우, 진짜. 넌 언제 철들래?”
재현은 마이클을 타박했지만, 마이클은 나를 보며 혀를 날름 내밀며 메롱을 했다.
나는 또 거기에 맞춰서 마이클을 한 대 칠 기세로 손발을 바동거렸다.
내가 설정한 ‘저스트’ 다섯 멤버와의 관계성에서 의외로 마이클과의 앙숙 관계가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첫 밤 촬영 때, 마이클이 내 이유식에 핫소스를 뿌리려던 모습이나 밤새 나를 괴롭힌 모습이 마치 아직 덜 자란 어른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편집됐다.
거기다 자막까지 ‘철없는 막내는 새로 생긴 동생이 부럽나 봅니다.’ 이렇게 박는 바람에 졸지에 마이클은 마치 막둥이에게 사랑을 다 빼앗겨버린 형이 되었다.
정말 악마의 편집이었다.
각종 게시판에서는 나와 마이클의 관계를 톰과 제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제 마이클은 아예 어린아이와 같은 유딩의 면모를 더욱 부각했다.
사람들은 나와 마이클을 엮어 ‘유딩즈’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제 아빠 역할의 태형이 나서서 이 상황을 정리하면 오늘의 한 에피소드는 마무리다.
“마이클 그만! 재현, 성국이 얼굴 안 좋네. 기저귀 한번 봐.”
“어, 형.”
[뭐야, 또 아랫도리 까야 하나.]
아무리 모자이크 처리해서 나간다지만, 태형의 에피소드 정리 방식은 언제나 기저귀 갈기 아니면 우유 먹이기 같은 원초적인 것이었다.
재현이 얼른 바지를 벗겼다.
곧 아랫도리가 시원해졌다.
“성국이 아직 오줌 안 쌌는데.”
카메라가 불쑥 들어와 나를 찍어댔다.
[그렇다면 제대로 오줌 한번 날려줄까?]
나는 있는 힘껏 인상을 쓰고는, 그대로 카메라를 향해 오줌을 뿜었다.
[준비하시고… 발사!]
“컷!”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감독도 흥분에 들뜬 목소리였다.
“오늘 완전 대박이야. 어쩜 때맞춰 오줌도 싸주냐. 우리 성국이 진짜 천재 아니야? 이번 편 시청률 또 오르겠는데. 이러다 우리 30프로도 넘는 거 아니야? 자, 30분만 쉬고 다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감독의 칭찬이 이어졌다.
촬영 스태프들도 모두들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관심과 환호. 저번 생과 별반 다를 게 없군.]
나는 모두의 관심을 온몸에 받았다.
엄마가 얼른 다가와 바지를 입히고, 내 손에 바나나를 쥐여줬다.
나는 물컹한 바나나를 앞니로 아작아작 씹었다.
“성국아, 안 힘들어?”
[엄마, 원래 돈 버는 건 힘든 거야. 이 정도야 뭐. 삼전 그룹 부회장으로 있을 때는 정말 스트레스 때문에 원형 탈모도 왔었다고.]
엄마는 내 엉덩이를 도닥이더니 옆에 선 스태프에게 나를 부탁했다.
“쓰레기 좀 버리고 올게요. 성국이 좀 봐주세요.”
“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나는 뽀송뽀송한 기저귀를 차고는 잠시 몸을 뒤척였다.
[이번 기저귀는 쓸 만하네. 역시 돈이 좋아.]
한동안 몸에 맞지 않는 기저귀 때문에 피부가 쓸려서 꽤 고생을 했었다.
그 이후로 좀 더 비싼 기저귀로 바뀌고 나서 발진도 더는 일지 않았다.
이때, 마이클이 가까이 오더니 나를 슬쩍 건드렸다.
“자식, 너 아까 진짜 발로 나 한 대 치려고 했지?”
[지금 이 녀석이 나랑 해보자는 건가.]
마이클 이 자식은 얄밉게 생겨서는 인성은 더 쓰레기였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이런 건 안 보는 게 인성에 도움이 된다.
“야, 너 지금 나 무시해?”
[가지가지 백만 가지 하네, 진짜.]
“너, 뭐라고 종알거리는 거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안 들려. 안 들려.]
약 올라 하는 마이클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허리가 따끔했다.
마이클이 손가락으로 내 허리 살을 꼬집고 있었다.
[지금 감히 이 전성국을 꼬집은 거냐? 어?!]
나는 얼른 전투 자세를 취했다.
이런 자식은 철저히 짓밟아줘야 기어오르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콩 쥐고 마이클을 노려봤다.
마이클은 혀를 날름날름해 댔다.
“어쭈, 때리려고? 어디 때려봐. 어서.”
[어휴, 이 자식을.]
이때, 김미영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김미영이 되묻자 마이클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네가 지금 나 꼬집었잖아!
나는 옹알거렸다.
“성국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지 않는 아이거든요.”
옳은 말씀.
마이클이 잠시 기가 차단 얼굴로 김미영을 쳐다봤다.
“애가 뭘 안다고요. 그냥 밥 먹고, 자고, 싸는 게 애잖아요.”
“그런 애가 무명인 당신들 얼굴 알려주고, 각종 광고까지 하게 해줬는데. 그럼 마이클 님은 그런 애보다 못한 거 아닌가요?”
마이클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김미영의 듬직한 어깨를 올려다봤다.
“뭐래.”
마이클은 씩씩거리며 영어로 몇 마디 중얼거리곤 자리를 떴다.
분명 나나 김미영이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내뱉은 영어였다.
통역하자면, 애나 매니저나 둘 다 재수 없네. 뭐, 이런 말이었다.
나는 툴툴 걸어가는 마이클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마이클, 너는 내가 꼭 기억한다. 앞으로 조심해라.]
김미영이 씩씩거리는 내 손을 잡았다.
“성국아, 화내지 마. 세상엔 화낼 가치가 없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은 철저하게 무시를 해주면 되는 거야.”
[어라?]
그 순간, 나는 김미영을 다시 봤다.
김미영은 마이클이 어떤 인간인지 한눈에 꿰뚫고 있었다.
그래, 철저한 무시.
그동안 나는 마이클이 날 놀리면 약이 올라 바동거렸다.
그 덕분에 나와 마이클의 관계는 앙숙이 되어서 프로그램의 메인이 됐다.
앞으로 내가 마이클을 무시하거나 반응해주지 않으면 그는 카메라에서 자연스레 멀어질 게 뻔했다.
[애가 되더니, 내가 그동안 너무 감정적이었군.]
나는 통통한 팔을 최대한 끌어당겨 턱을 매만졌다.
쓰레기를 버리고 온 엄마가 나를 안아 들었다.
“마이클 씨가 봐주기로 했는데, 어디 가셨어요?”
“성국이 엄마, 앞으로 마이클한테는 안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요? 성국이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했나요?”
엄마는 놀란 얼굴로 나를 꼭 안았다.
“마이클 씨도 아직 애잖아요.”
김미영은 융통성 있게 말도 돌렸다.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나는 엄마의 옷깃을 꼭 쥐었다.
[엄마, 걱정 마. 마이클은 내가 나중에 제대로 손봐줄 거니까.]
이때, ‘저스트’ 숙소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뭐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는 동안, 한동안 눈앞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엄마는 나를 꼭 안고는 속삭였다.
“성국아, 괜찮아. 엄마가 있어.”
나는 그런 엄마 품에 파고들었다.
걱정 따위 되지 않았다.
엄마가 있으니까.
곧 플래시를 든 범선이 다가왔다.
“성국이 괜찮죠?”
“네, 괜찮아요.”
“저 따라오세요. 저희 숙소가 반지하라 플래시 준비해 뒀거든요.”
평소에 무뚝뚝한 범선은 사실 프로그램 시작 후에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촬영장에 있으면 범선이 언제나 묵묵히 뒤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계단 조심하세요.”
범선은 일일이 계단을 플래시로 비추었다.
“정전이 자주 있나 봐요?”
김미영이 물었다.
“자주는 아닌데. 이 근처가 워낙 공사를 많이 하거든요. 종종 전선 건드려서 정전이 일어나긴 해요.”
범선의 도움으로 우리는 무사히 반지하 저스트 숙소를 빠져나왔다.
스태프가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쩌죠? 한전에 연락했더니 복구하는 데 몇 시간 걸린다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촬영 접어야 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저희는 성국이랑 집에 갈게요.”
“네, 오늘은 우선 푹 쉬시고 내일 오전에 일정 나오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스태프는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범선을 쳐다봤다.
“범선 씨랑 멤버들은 어쩌실 거예요?”
“저희야 플래시도 있고, 초도 있어요. 걱정 마세요.”
범선은 배시시 웃었다.
엄마와 김미영 모두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역시 범선은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 만한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