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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5화 (15/231)

제15화

철커덕.

이 소리는 늦은 밤 귀가하는 아빠가 현관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이다.

어느새 잠든 나는 부스스 실눈을 떴다.

아빠가 보쌈 봉투를 흔들었다.

“성국아, 깼어?”

[나 원래 예민해서 암막 커튼 없이는 잠도 못 자고, 사방 100미터 안에서는 그 누구도 숨도 안 쉬었다고. 에휴, 말해봤자 뭐 하나. 5평 원룸에서 지금 네 명이 숨 쉬고 있는 거 실화냐….]

“성국아, 아빠가 보쌈 싸왔지.”

“자기야, 웬 보쌈이야?”

“사장님이 싸주셨어. 아기 낳았다고 보너스도 5만 원이나 주셨어.”

“와, 민국이도 복덩이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민국이 밑으로 앞으로 얼마나 들어갈 건데, 겨우 5만 원에 복덩이 운운하는 거야. 이 철없는 엄마, 아빠야.]

내가 종알거리자, 아빠가 얼른 나를 안아 들었다.

“우리 성국이 나날이 무거워지네. 성국아, 너도 이제 형이야. 알지?”

[말 안 해도 안다고, 아빠야.]

“자기야, 성국이도 보쌈 좀 먹여야겠어. 요즘 일이 많아서 성국이가 살이 빠지는 것 같아.”

[뭔 소리야. 나 화면에 잘 나오려고 다이어트 중이었는데.]

“그러게. 성국이 볼살이 확 줄었네. 우리 성국이 매력 포인트인데.”

아빠는 내 볼에 뽀뽀를 해댔다.

[하아…. 사내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아빠야.]

엄마가 얼른 보쌈을 풀었다.

잘 익은 돼지고기에 보쌈김치가 먹음직스러웠다.

꼴깍.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역시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

“성국이, 먹고 싶어?”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안 돼, 다이어트 중인데.]

생각과 반대로 나는 보쌈을 향해 홀린 듯이 기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비계가 없는 보들보들한 보쌈 고기를 잘게 찢어 내 입에 밀어 넣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아빠 보쌈이야. 여기엔 호주산 쉬라즈 와인이 제격인데. 캬아.]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보쌈 고기를 오물오물 씹어 넘겼다.

아빠는 어느새 보쌈을 싸서 엄마에게 내밀었다.

“소영아, 애 둘 키우느라 고생 많아. 어서 먹어.”

“자기가 먼저 먹어. 자기야말로 하루 종일 서서 요리하느라 힘들잖아.”

“나야 여기서 일하는데, 자주 먹지.”

아빠는 웃으며 엄마 입에 보쌈을 밀어 넣었다.

그걸 또 엄마는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어쨌든 가난해서 그렇지 금슬은 참 좋은 부부였다.

그러니 벌써 이 환경에서도 애가 둘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회귀 전에 나에게 2세를 만드는 것은 거의 의무에 가까웠다.

정략결혼 한 와이프는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대대로 국가 요직을 지낸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과학의 도움으로 미모도 나름 괜찮았고, 나와 대화가 될 정도로 공부도 좀 한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정략결혼 한 사이라 와이프와 나 사이에는 벽이 있었고, 우리는 누구도 그 벽을 넘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행복한 척, 와이프를 무척 사랑하는 척했다.

어차피 모든 조건을 맞춰서 결혼한 사이에 애정까지 바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갓 나기 시작한 어금니로 보쌈 고기를 씹었다.

엄마는 보쌈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기야….”

“왜? 보쌈 맛없어?”

“그게 아니라… 미영 언니가 그러는데. 성국이 광고 제의가 많이 들어온대. 특히 삼전 전자에서 전속 계약까지 이야기한다나 봐.”

“전속 모델? 우리 성국이를?”

“응. 삼전 전자 전속 모델 하면 성국이 학비도 마련되고 좋을 것 같다고. 조건도 좋대.”

“그건 생각지 못한 거라서….”

아빠는 얼떨떨한 얼굴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잘나갈 줄은 둘 다 몰랐겠지?]

엄마가 아빠의 손을 잡았다.

“자기야, 우리 성국이 커서 뭐가 될지 모르지만, 좋은 기회인 것 같아. 성국이 앞으로 저축해두면 성국이 우리처럼 어려워서 공부 못 하지는 않을 거잖아.”

“그렇겠지만… 성국이가 너무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아빠야, 그런 생각은 하는 거 아니야. 나 재벌일 때는 하루에 5시간 넘게 자본 게 손에 꼽아. 지금은 하루 12시간을 자잖아.]

내가 옹알거리자, 아빠는 얼른 야들야들한 보쌈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나는 얼른 다시 보쌈삼매경에 빠졌다.

[이딴 게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이미 입가는 침으로 축축했다.

엄마는 계속 아빠를 설득했다.

“나는 생각해 보니까 진짜 좋은 기회 같거든. 자기만 오케이 하면 한번 만나보고 생각해보자. 성국이 생각보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좋아하고, 진짜 성국이 앞으로 착실하게 저축해두면 성국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잖아.”

“그래, 와이프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는데. 나야 소영이 말 따라야지.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 보지.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잖아.”

아빠는 결심한 듯 이야기했다.

* * *

전재형은 지금 삼전 전자의 온양 공장 착공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대통령까지 내려오는 큰 자리였고, 회장인 아버지가 자숙 기간을 거쳐 다시 공식적인 자리에 처음으로 나오는 자리였다.

양 비서가 뒤를 흘끔 돌아봤다.

“부회장님, 일전에 부탁하신 전성국 군 프로필 준비됐는데요.”

“말해봐.”

양 비서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성국이네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성국이 아빠는 수유에 <원아저씨 보쌈>이라는 작은 보쌈집 주방에서 일하고, 그게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버는데?”

“최근에 월급이 올라서 60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60만 원?”

전재형은 손가락으로 살짝 미간을 긁었다.

삼전 전자의 초봉은 100만 원 정도였다.

업계 최고이긴 했다.

월에 60만 원으로 네 가족이 살 수 있단 말이지….

전재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성국이 엄마는 전업주부고요. 여상을 졸업하고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하다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그만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국이 아빠랑 엄마 둘 다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입니다.”

“보육원? 그럼, 고아라는 건가?”

“네, 부회장님.”

양비서가 대답했다.

삼전 그룹 차원에서 고아들을 후원하고 있었지만, 행사 때 말고 고아를 본 적도 없는 게 전재형이었다.

“흠…. 평판은?”

“둘 다 좋습니다. 성국이 아빠는 매우 성실한 편이고, 책임감이 강해서 식당에서도 빨리 주방 일을 배웠다고 합니다. 성국이 엄마도 전에 일하던 회사나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모두 칭찬하더라고요.”

전재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부회장님, 성국이네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시는 건지 여쭤도 될까요?”

“아기를 전속 모델로 써서 그 성장에 맞춰 기업이 성장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계획이니까 아무래도 더 신경이 쓰이네. 아기야 어차피 세상사 모르는 일이고, 언제나 문제는 가족에게서 터지지 않나.”

“현재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수유역 근처 원룸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성국 군의 매니저를 봐주는 사람은 김미영이라고 그 원룸 건물 주인이고요. 석 달 전까지 삼전 기획 경리과에서 근무했습니다. 성국이가 처음으로 출연한 삼전 전자 통돌이 세탁기에 추천한 사람이 바로 김미영이라고 합니다.”

전재형은 턱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슬쩍 긁었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김미영?”

“여러 루트로 조사해본 결과, 성국이네와는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계약 조건도 다른 매니지먼트에 비해서 파격적으로 성국이에게 유리하고, 계약 기간도 성국이가 일을 그만둘 때 파기되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김미영은 삼전 기획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고졸 사원이었는데, 그 때문에 만년 과장이라 어쩔 수 없이 퇴사하고 이 일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혹 그 전성국이라는 아이, 내가 볼 수 있을까?”

“자리 마련할까요?”

“공식적인 만남 말고… 촬영하는 거 한번 보고 싶은데….”

“알아보고 일정 잡겠습니다.”

양 비서는 난생처음 보는 전재형 부회장의 낯선 행보가 신경 쓰였지만, 우선은 입을 닫았다.

눈앞에 온양 표지판이 크게 들어왔다.

* * *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의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어느새 6개월이 순식간에 흘렀다.

<이별을 준비하는 하루>라는 부제가 달린 촬영이기도 했다.

나는 아침부터 이유식을 한 사발 거뜬하게 해치우고 부족한 배를 바나나로 달래고 있었다.

‘저스트’ 멤버들이 하나둘씩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리더인 태형이 나를 인자하게 쳐다봤다.

“성국아,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촬영 마지막 날이잖아. 뭘 또 물어?]

“우리 성국이 보고 싶으면 어쩌지.”

엄마 역할을 충실히 해온 재현이 얼핏 눈물까지 보였다. 코는 이미 붉었다.

[코 수술한 거 티 나. 그만 울어. 내일이면 잊을 거면서.]

마이클의 존재감이 줄어들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범선이 내 손가락 하나를 잡았다.

“우리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

[연락하면 씹을 거면서. 나도 다 안다고.]

나는 바나나를 야무지게 씹었다.

루카스는 연신 웃으며 내게 장난을 쳤고, 마이클은 똥 씹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의 출산일 이후로 내가 마이클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마이클의 분량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기다 감독에게 찍힌 이후로 마이클의 유딩 이미지는 악동 이미지로 바뀌어서 시청자들의 비호감을 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마이클의 분량은 점점 줄었고, 끝에서 병풍처럼 서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듬직한 범선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츤데레 같은 성격이 여자 팬들을 긁어모았다.

나는 범선의 손을 꼭 잡았다.

미래를 본다면 그나마 가장 오랫동안 가수로, 배우로 성공적인 활약을 하는 멤버는 범선이었다.

원래 모든 인간관계는 그런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범선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성국이랑 정말 정 많이 들었는데, 아쉽네….”

“그러게. 정말 이 녀석 덕분에 우리도 대박 났잖아.”

재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카메라는 이런 것까지 모두 담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저스트’ 멤버들 그리고 이별을 직감한 것 같은 나, 전성국.

나는 콘셉트에 맞게 시무룩한 얼굴로 멤버들을 쳐다봤다.

아마 내 얼굴 위로 이런 내레이션이 흐를 것이다.

“이별을 직감한 성국이도 오늘은 영 힘이 없네요.”

이때, 리더인 태형이 뭔가 준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대본인가?]

“얘들아, 우리 이번 2집 타이틀곡 성국이한테 골라달라고 하면 어때?”

“성국이한테?”

“응. 왜, 아이들이 리듬에 즉각적인 게 있잖아.”

“난 찬성.”

범선이 제일 먼저 찬성했다.

마이클은 영 못미더운 얼굴이었다.

“형, 노래 뭐 갖고 왔어?”

“저번 주에 녹음한 <거짓이야>랑 <너에게 가는 길>, <사랑은 언제나 부족하다> 세 곡.”

“뭐야. 거기 나 분량 엄청 작잖아.”

“원래부터 이 세 곡 중에서 타이틀 뽑기로 했잖아. 그나마 네 분량 있는 <사랑은 언제나 부족하다>랑 <거짓이야> 밀어보자.”

“성국이 얘 나 싫어해. 보나 마나 내 분량 제일 작은 걸로 뽑을 거야.”

“성국이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 그냥 듣고 좋으면 좋다고 하겠지.”

태형이 마이클을 말렸지만, 마이클은 단단히 토라졌다.

“감독님, 이 부분은 편집 부탁드려요.”

“그래, 암튼 그 아이디어는 좋네. 성국이한테 한번 노래 들려줘보자.”

“네.”

태형은 CD플레이어를 가지고 와서 준비했다.

난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내 원픽은 바로 <거짓이야>이다.

태형이 CD플레이어 버튼을 누를 듯 말 듯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이제부터 잘 들어봐. 다음 후속곡 골라줘.”

“녜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범선이 어느새 나를 안아 들었다.

곧 이어서 첫 번째 곡이 나왔다. <너에게 가는 길>

[이건 두 번째 타이틀.]

다음 곡이 바로 <거짓이야>였다.

물론 나는 이것을 픽할 것이다.

<거짓이야>는 인기가요톱10에서 무려 5주 연속 1위를 하는 영광을 누린다.

“성국아, 이제 마지막 노래야.”

[들을 필요도 없다고.]

<사랑은 언제나 부족하다>는 나중에 수분을 채워준다는 이온 음료 광고 음악으로 쓰여서 뒤늦게 히트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태형은 세 노래를 다 들려주고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어떤 노래가 제일 좋아?”

나는 승리의 V 자를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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