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6화 (16/231)

제16화

“두 번째?”

“녜에!”

마이클도 약간 기분이 풀린 듯했다. <거짓이야>에서 마이클의 랩 분량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 <거짓이야> 한번 대표님에게 밀어볼까?”

“난 원래 <거짓이야>가 제일 좋았어.”

범선이 대답하자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 성국이한테 다시 들려보자.”

“그럴까.”

루카스의 제안에 태형은 다시 노래를 들려줬다.

[미심쩍은가 보군. 그렇다면!]

나는 <거짓이야>가 나올 때 애절한 눈빛으로 엉덩이를 좌로 세 번, 우로 세 번 흔들다가 클라이맥스 때는 범선의 다리를 붙잡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멤버들 역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마 이 모습 아래에는 이런 자막이 달릴 것이다.

- 성국이가 형들과의 헤어짐을 노래로 달래봅니다. 그나저나 ‘저스트’ 2집은 대박 예감이네요.

“컷!”

감독이 소리를 지르자, 여운이 남은 멤버들이 붉어진 눈시울을 꾹꾹 눌렀다.

“성국이는 잠시 쉬고, 저스트 멤버들만 남아서 촬영 시작입니다!”

스태프가 나를 밖으로 안내했다.

김미영과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성국이 생일 서프라이즈 하려고요. 멤버들이 케이크도 직접 만들고, 상도 직접 차릴 거예요.”

[하아….]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내 눈앞에서 생일 서프라이즈 한다고 소품 들고 돌아다닐 때부터 다 알고 있었다.

마지막 촬영의 방송일은 두 달 후쯤 내 생일 전후라 그날에 맞춰서 촬영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놀라는 척하지?]

나는 머릿속으로 놀랄 표정과 포즈를 정리했다.

우선 눈을 동그랗게 떠야 할 것 같고, 곧 눈물도 터트릴 준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얼마 정도 기다리면 될까요?”

“적어도 2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요. 차에서 쉬고 계세요.”

“네, 그럴게요.”

김미영은 나를 안고 차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갔다.

* * *

7월이라 햇살이 뜨거웠다.

“성국이 엄마, 촬영 준비 좀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조연출이 그러네요.”

“언니, 그럼 차에서 쉴까요?”

김미영이 다른 제안을 했다.

“성국이도 답답할 거 같은데, 공원 갈래요? 5분만 걸어가면 작은 공원 있어요. 어때요?”

“잘됐네요. 성국이도 좀 걸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이제 제법 능숙하게 공원을 향해 걸었다.

다리에 힘도 많이 생겼고, 혀 놀림도 점점 더 좋아졌다.

“성국아, 천천히 가.”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곤 다시 직진을 선택했다.

뒤에서 엄마와 김미영이 나를 뒤따라오며 이야기를 나눴다.

“참, 광고는 생각해 봤어요?”

“삼전 전자 전속이요?”

“네.”

“남편이랑 상의해 봤는데, 남편도 아무래도 삼전 전자 전속이면 성국이가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재요.”

김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결정이에요. 나도 삼전 기획 다녔지만, 모델들에게는 최고로 대우해주는 회사예요. 그럼, 삼전 전자 쪽에 긍정적으로 대답할게요.”

“언니가 민국이 봐줄 아주머니도 구해주셔서 성국이 마지막 촬영에도 나오고, 정말 고마워요.”

민국이 녀석 떼준 것은 나도 고마웠다.

나는 부른 배를 꺼트릴 겸 열심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때, 저 멀리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였다.

독일의 장인이 특수 제작한 대한민국에 딱 한 대밖에 없는 자동차.

바로 삼전 그룹 전재형 부회장의 차량이었다.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설마 나를 보러 온 건가.

* * *

전재형은 창문 너머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성국이를 바라봤다.

잠시 광고 촬영장에서 스치긴 했지만, 제대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를 본 이후로 전재형의 머릿속에는 성국이란 아이의 존재가 각인됐다.

또랑또랑한 눈빛.

야무진 행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사랑을 독차지하는 존재.

전재형에게는 이미 아들과 딸이 있었고, 밝혀진 혼외자도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기분을 받은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보다는 와이프를 많이 닮았고, 이제 슬슬 공부로 두각을 드러내야 하는 여덟 살 태국이나 다섯 살 미진이 모두 성과가 좋지 못했다.

혼외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한 명 더 낳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더는 족보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와이프랑 잠자리를 하기는 더 싫었다.

하지만 성국이는 마치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을 보듯 영특했다.

양 비서가 뒤돌아봤다.

“매니저 통해서 멀리서 보겠다고는 했습니다.”

“흠… 직접 볼까.”

전재형은 말이 끝나는 동시에 차 문을 열고 나갔다.

* * *

나는 검은 차로 힘차게 걸어갔다.

회귀 전의 아버지를 한 번 제대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993년이면 아버지는 아마 40대 초반일 것이다.

직위는 부회장일 테고….

5년 후에 할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할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이 시절의 아버지는 나에게 무섭고,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우선 철의 여인과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멍청한 동생들 대신 내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아버지가 살가운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서울 지역 1등을 한 때였다.

이건 내 노력으로 달성한 눈에 보이는 최초의 성과였다.

그만큼 아버지는 성과 지상주의였다.

회사도, 여자도, 자식도.

덜컥.

차 뒷문이 열렸다.

나는 순간 멈춰 섰다.

[설마?]

열린 뒷문으로 아버지 전재형이 나오고 있었다.

목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광고 촬영장에서 본 회귀 전 아버지를 이렇게 가까이 보다니.

온몸이 얼어붙었지만,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나는 태양 아래에서 회귀 전의 아버지와 마주 보고 섰다.

아버지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입가에는 평소 볼 수 없었던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 빠?”

그 순간, 전재형도 멈칫 섰다.

저 단순한 말 한 마디가 심장을 가격했다.

[아차.]

나는 바로 실수를 깨달았다.

전재형 부회장이 계산 없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삼전 전자에서 광고 제의가 왔다고 하더니, 분명 나를 한 번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번 생에서 우리는 남이다.

앞으로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통통한 등을 보이며 엄마에게 걸어갔다.

엄마는 얼른 나를 안아 들고 인사를 했다.

“어머, 죄송합니다.”

“애가 저 때문에 놀란 거 아니죠?”

삼전 전자 부회장 전재형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 애 때문에 놀라셨죠?”

“혹시 이 애가 그 방송 나오는 애인가요?”

전재형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맞아요.”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기쁘게 대답했다.

지금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가 일개 아기 모델까지 관리한 기억은 없는데….]

나는 정신을 다잡았다.

잠시 알 수 없는 울컥함에 아버지의 바지를 잡고 침을 흘릴 뻔했다.

“아기가 예쁘네요. 근데 아가야.”

아버지가 나를 바라봤다.

“아까 나보고 아빠라고 한 거야?”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얘가 요즘 엄마, 아빠라고 말을 잘하거든요.”

엄마는 연신 사과를 했고, 김미영은 한 발 뒤에 물러서 있었다.

이 상황은 아무래도 삼전 쪽에서 만든 것 같았다.

김미영도 이미 아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아저씨가 놀라게 해서 미안. 맛있는 거 사먹어.”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엄마는 미안해하며 사양을 했다.

“안 받으면 제가 죄송해서 안 돼요.”

나는 얼른 만 원을 집었다.

아버지에게 만 원이야 없어도 그만인 돈이었다.

“착하네. 그럼, 또 보자.”

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

김미영이 얼른 다가왔다.

“성국이 엄마, 이제 슬슬 다시 촬영하러 가봐요.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어머, 그러네요.”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

나는 최대한 냉정한 등을 전재형 부회장에게 보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 전재형 부회장과 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에 불과했다.

* * *

내가 ‘저스트’ 숙소의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초가 빛나며 다가왔다.

리더 태형이 내 생일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동시에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가 반지하 숙소에 울려 퍼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국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저스트’ 멤버들은 모두 입을 모아 내 생일을 축하했다.

동시에 환호가 터졌다.

불이 켜지면서 스태프들도 모두 나를 향해 박수를 쳤다.

[이러니 꼭 회귀 전 열두 살 생일로 돌아간 거 같네.]

나는 잠시 그 시절을 회상했다.

열두 살 생일에 ‘저스트’가 와서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달라진 게 있다면, 가사 정도였다.

사랑하는 우리 성국이가 아니라 그땐 사랑하는 우리 도련님이었다.

어쨌든 회귀 전의 기억도 떠오르고, 다시 ‘저스트’의 축하를 받다니 흐뭇했다.

나는 격하게 손바닥을 쳤다.

“성국아, 소원 빌고 초 불어야지.”

“네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내 소원은 간단했다.

[이번 생에는 삼전 그룹 눌러버리는 재벌 되게 해 주세요!]

나는 얼른 눈을 뜨고 두 개의 빛나는 초를 있는 힘껏 불었다.

“후우-!”

* * *

광화문에 위치한 삼전 전자 본사 회의실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감회에 찬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게 얼마 만이야.]

물론 1993년 삼전 전자를 내가 잘 알진 못하지만, 10년 후의 이곳은 내가 잘 안다.

삼전 전자는 2000년대 초반까지 삼전 그룹의 핵심 사업 분야 중 하나였다.

나는 오래간만에 익숙한 곳에서 편안하게 마들렌을 들고 녹여 먹었다. 날 위해 준비한 간식이었다.

그에 반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것은 아빠와 김미영이었다.

계약 관련 일이라 아빠가 쉬는 날에 특별히 약속 시간을 잡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나를 보러 왔던 것은 이번 계약 건 때문인 것 같았다.

아빠가 잠깐 눈치를 보더니 김미영을 쳐다봤다.

“삼전 전자 본사 와보신 적 있어요?”

“저도 처음이에요. 미리 계약서는 봤으니, 서로 몇 가지만 잘 조율하면 될 것 같아요. 성국이 아버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그게 말처럼 안 되네요. 저 같은 사람은 이런 건물 근처에 와본 적도 없거든요.”

달칵.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사이로 양 비서가 얼굴을 내밀었다.

[양 비서 아저씨!]

나는 양 비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를 모시던 양 비서의 아버지지만, 어릴 적에는 양 비서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케어했다.

양 비서는 부모님 몰래 과외를 째고 동급생 여자 친구와 놀이공원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물론 이건 나와 양 비서만 아는 비밀이었다.

양 비서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부회장님을 모시는 양 비서라고 합니다.”

순간, 난 고개를 갸웃했다.

일개 삼전 전자의 모델 계약을 하는데, 양 비서가 직접 나선다고?

양 비서의 존재는 그룹 내에서 전재형 부회장의 대리라는 게 정설이다.

그 말인즉슨, 양 비서가 하는 모든 공적인 활동이나 말은 전재형 부회장의 지시와 동일하다는 의미였다.

양 비서가 생각에 빠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 군 많이 컸네요.”

“이제 두 돌 됐어요.”

아빠는 재빨리 대답했다.

“방송은 이제 얼마 남았죠?”

“촬영은 다 끝났는데, 방송은 한 달 정도 더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는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가장 인기 있을 때 종영하기로 했다. 물론 이건 대외적인 발표이다.

사실은 마이클이 계속 걸렸기 때문이다.

민국이 출산 이후로 촬영장에서 카메라가 꺼질 때마다 멤버들은 마이클 때문에 작은 말싸움이 났고, 사이는 악화됐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는 ‘저스트’는 국민 아이돌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양 비서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아빠와 김미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버님, 어떻게, 계약 조건 만족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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