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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0화 (20/231)

제20화

뜨거운 조명이 또다시 나를 향해 쏟아졌다.

[역시 나는 무대 체질이야.]

곽 감독이 나와 ‘저스트’ 멤버들에게 일일이 콘티에 나와 있는 동선을 알려주며 체크하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성국이를 안아서 들고 놀다가 그만 쌓아놓은 레고를 넘어뜨리는 거야. 그러다가 아래를 보니까 난장판인 거지. 음료수 먹다 흘리는 태형이. 재현이가 부엌에서 음식 들고 나오면서 화를 막 내는 거야. 여기서 어떻게 밥을 먹냐고.”

곽 감독은 이제 나를 쳐다봤다.

“난장판인 거실을 보고 성국이가 아까 그 포즈 하는 거야.”

곽 감독은 내 시그니처 포즈를 따라 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우리 성국이가 심각하게 포즈를 지으면 범선이가 이때 삼전 전자 허리케인 청소기를 들고 나와서 걱정 말라고! 외치면서 이 거실 바닥을 한 번에 휙 쓸고 지나가는 거야.”

“네!”

‘저스트’ 멤버들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맨날 투덜거리고 말썽 부리는 마이클이 없어서인지 어느 때보다 단결이 잘됐다.

“자, 그럼 리허설 한 번 해 보자고.”

“네, 감독님.”

“우리 성국이도 준비됐지?”

“녜에!”

나는 얼른 손을 번쩍 들었다.

주위에선 내 반응에 모두들 웃음을 지었다.

“정말 저 녀석은 분위기 메이커라니까.”

감독은 카메라 뒤로 자리를 잡았다.

루카스가 나를 번쩍 안고는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아파트 거실 모양의 세트장 안에서 리허설이 시작됐다.

리허설은 단번에 끝났다.

“좋아! 촬영도 이대로만 하자고!”

* * *

“커엇!”

곽 감독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꽃미남 재현이 자꾸만 NG를 냈기 때문이다.

재현의 대사는 단 하나였다.

“여기서 더러워서 밥을 어떻게 먹어? 이걸 언제 다 치우냐고!”

이 쉬운 대사를 씹고 또 씹었다.

이제 제법 무게가 나가는 나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던 루카스도 점점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형, 제발. 성국이 이제 진짜 무거워.”

곽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현아, 너 대사 좀 다시 읽어보자.”

“감독님, 죄송합니다. 연습 많이 했는데, 왜 이러죠.”

재현은 불안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에서 엄마 역할을 한 재현이었고, 자상한 재현의 인기는 멤버들 중에 제일 높아졌다. 하지만 재현은 연기가 잘되는 편이 아니었다.

나는 얼른 범선을 쳐다봤다.

범선의 대사는 딱 한마디. “걱정 말라고!”였다.

마이클이 나와 앙숙 관계가 정리되고 분량이 점점 줄면서 범선의 비중이 후반부로 갈수록 많아지긴 했다.

나와 어색한 사이를 형성했던 범선의 츤데레 같은 모습이 여자 팬을 긁어모았다.

[범선이가 연기는 더 잘하는데….]

재현은 ‘저스트’ 해체 이후에 연기를 몇 번 시도하긴 했지만, 썩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 연기에 기본적으로 재능이 없었다.

그에 반해 범선은 주연이 아닌 조연부터 시작해서 차곡차곡 필모를 쌓아 결국에 주연 자리를 꿰차고, 영화제 남우주연상도 수상했다.

재현이 곽 감독과 함께 대사를 연습하는 게 보였다.

나는 아장아장 걸어 그 옆으로 갔다.

“재현아, 여기 딕션이 그게 아니잖아.”

“감독님 죄송해요. 왜 이렇게 안 되죠오?”

재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말투 자체에 애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같은 리얼리티를 할 때는 매력으로 돋보였지만, 광고 촬영에서는 화내야 하는 장면도 장난스럽게 바꿔버리는 역효과를 냈다.

곽 감독이 머리를 싸안았다.

“어쩌지? 여기서는 좀 심각해야 하는데….”

“감독니임. 제가 다시 해볼게요.”

재현은 다시 읽고 또 읽었지만, 여전히 콧소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범선을 쳐다봤다.

범선은 청소기를 든 채로 한 마디밖에 없는 대사를 여러 톤으로 해보고, 액션도 섞어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범선에게 아장아장 걸어갔다.

“성국아, 형이 놀아줘?”

나는 얼른 범선의 손을 딱 잡고는 감독에게로 끌었다.

“성국아, 거긴 감독님이랑 재현이랑 뭐 하잖아. 여기서 놀자.”

[응. 그래서 가는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아기들의 힘은 생각보다 세고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장점은 이럴 때 유용했다.

범선은 어쩔 수 없이 나한테 딸려 걸어왔다.

곽 감독이 범선을 흘깃 쳐다봤다.

“너는 대사 다 외웠어?”

“감독님, 저도 한번 봐주세요.”

“그래. 재현아, 넌 다시 읽고 있어봐.”

“네.”

재현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범선은 단 하나뿐인 대사를 청소기를 번쩍 들고 자연스레 뱉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곤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감독님, 어떠세요?”

“자연스럽네. 너 발음이 좋은데, 원래 연기하려고 했어?”

“그건 아니고요. 데뷔하기 전에 이것저것 배울 때 연기도 배웠어요.”

“그래?”

곽 감독은 잠시 재현을 보더니, 범선에게 재현의 대사를 건넸다.

“네가 이거 한번 해봐.”

“이건 재현이 거잖아요, 감독님.”

“한번 읽어봐.”

범선은 재현의 눈치를 흘깃 봤다.

재현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곽 감독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범선은 잠시 대사를 보고는 곽 감독을 쳐다봤다.

“감독님, 재현이는 광고에서도 엄마 역할 느낌이지만 전 그런 게 없잖아요. 제 식으로 해도 될까요?”

“응. 편하게 해.”

“네.”

범선은 대사를 몇 번 조용히 읊조려 보더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일부러 아이 컨택을 해줬다.

[자, 나 보고 한번 해봐.]

“여기서 더러워서 밥을 어떻게 먹어? 이걸 언제 다 치우냐….”

범선은 투덜거리는 투로 가볍게 대사를 읊었다.

곽 감독은 그 부분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범선아, 다시 한 번만 해볼래?”

“지금 이 톤으로요?”

“응.”

범선은 좀 전과 똑같은 투로 대사를 뱉었다.

곽 감독은 재현을 쳐다봤다.

“재현아, 너도 다시 해봐.”

재현은 살짝 긴장한 탓인지 잔뜩 목에 힘을 주고 대사를 뱉었다.

“여기서 더러워서 밥을 어떻게 먹어? 이걸 언제 다 치우냐!”

그 바람에 이번에는 콩쥐 새엄마 같은 목소리 톤이 나오고 말았다.

“잠시만, 콘티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아.”

곽 감독이 조연출을 부르더니 콘티를 수정하는 게 보였다. 그러곤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역할 좀 바꿔서 다시 촬영 들어가 보자.”

모두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곽 감독을 쳐다봤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때 캐릭터 좀 살리려고 했는데, 아까 촬영하는 거 보니까 다들 개성이 좀 다른 것 같아서. 루카스는 계속해서 성국이 안고 들어오고, 재현이가 태형이가 하는 역할 해봐.”

“네?”

재현이 당황한 얼굴로 곽 감독을 쳐다봤다.

태형이 한 역할은 소파에 널브러져 과자를 집어 먹는 거였다.

“범선이가 재현이 대사 하고, 태형이가 마지막에 청소기 들고 들어오자. 리더니까 그게 맞는 것 같아.”

“아, 네. 감독님.”

태형이 얼른 대답했다.

[드디어 촬영 좀 일찍 끝나겠네….]

조연출이 나서서 촬영장을 다시 정리했다.

“자, 다시 촬영 시작합니다!”

나는 얼른 머리를 매만지고 루카스에게 탁 안겼다.

루카스는 나를 안고는 다시 레고를 무너뜨렸고, 재현은 과자를 먹다가 바닥에 흘렸다. 드디어 범선의 차례였다.

범선은 어느새 앞치마까지 입은 채 투덜거리는 투로 대사를 뱉었다.

남자다운 범선이 앞치마를 입은 모습이 오히려 코믹한 느낌마저 살렸다.

“걱정 말라고!”

거기다 태형이 평소 리더답게 마무리를 확실히 지어줬다.

“컷!”

짧고 간결한 목소리.

곽 감독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곽 감독은 연출부를 불러 모으더니 의견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곤 세트장을 향해 소리쳤다.

“이렇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자, 다시 한 번 가보자!”

“네에!”

“녜에!”

나도 얼른 껴서 대답을 했다.

[자, 촬영 어서 끝내자고!]

두 번 더 촬영을 한 뒤에 드디어 촬영이 끝났다.

곽 감독이 재현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렸다.

“재현아, 넌 보니까 좀 애교 많은 역할이 어울릴 것 같아. 다음엔 우리가 콘티 그렇게 짜볼게.”

“감독님, 죄송해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너무 기죽지 마.”

“네.”

곽 감독은 재현을 위로하고 범선에게 갔다.

“앞치마는 어떻게 생각한 거야?”

“소품 중에 있기에 한 번 해봤어요. 제가 좀 남자답게 생겨서 가전제품이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서요.”

“아이디어 좋은데. 범선아.”

“감사합니다.”

“넌 우선 외모도 외모지만, 딕션도 좋고 목소리가 좋아. 연기하는 사람들한테 가장 중요한 게 목소리거든. ‘저스트’ 활동 잘하고, 한 번 연기 쪽으로도 생각해봐.”

“아, 네…. 감사합니다.”

범선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성국아, 이거 너 덕분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범선. 기분 탓 아니고, 내가 다 이끌어준 거야.]

“암튼 칭찬받아서 기분 좋다. 형이, 뭐 맛있는 거 사줄까?”

[지금은 먹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나중에 나이 들면 맛있는 것 좀 사줘.]

“뭐라는 거야. 알았어. 형이 너 유치원 졸업식 날 짜장면 거하게 쏜다!”

[삼전 호텔 짜장이라면 인정해줄게.]

엄마가 다가왔다.

엄마의 입술이 평소보다 조금 붉은 느낌은 그냥 느낌인 걸까? 거기다 수줍어하는 내색이 역력했다. 이럴 때 보면 엄마도 여자였다.

“성국이랑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 녀석 덕분에 촬영 잘 마쳐서요. 성국이 크면 맛난 거 사준다고 했어요.”

“범선 씨가 고생하셨죠.”

엄마는 마치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안 되겠네.]

나는 얼른 엄마의 품에 안겼다. 그러곤 어깨에 얼굴을 콕 박고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성국이 졸려?”

“옹!”

“그래, 어서 가자.”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저스트’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 명성에 누가 되는 사고 치지 말고 잘들 있어.]

* * *

김미영이 차 문을 얼른 열었다.

엄마는 나를 뒷좌석에 태우고 옆으로 앉았다.

“성국이 오늘 촬영 피곤했을 텐데, 잘 견뎠네요.”

“언니, 진짜 신기해요. 이맘때 애들은 잠이 많다는데, 성국이는 촬영만 하면 잠도 안 잔다니까요.”

[엄마, 나 프로야. 프로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고, 그래야 촬영도 일찍 끝내고 쉬지.]

엄마는 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세트장 공기도 안 좋은데, 고생했어, 성국아.”

똑. 똑.

이때,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김미영이 차창을 내리자 신성중이 느끼한 면상을 들이밀었다.

“촬영 오셨어요?”

[신성중, 다 알고 온 거잖아.]

나는 손으로 엄마를 툭툭 치며 짜증을 냈다.

[아, 지금 졸리다고! 저 인간이랑 말도 섞기 싫어.]

김미영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이 세트장에서 우리 소속사 배우가 촬영 중인데, 제가 응원차 왔는데 이렇게 우연히 성국이네를 다시 만나네요. 안 그래도 제가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만난 김에 커피 한 잔 하실까요? 아니죠, 식사를 하시죠. 요 근처에 진짜 맛좋은 한식당이 하나 있어요.”

[뭔 X수작이야!]

내가 칭얼거리자 엄마가 신성중을 쳐다봤다.

“죄송한데요. 오늘 촬영이 너무 길어서 성국이가 피곤해해서요.”

[그렇지. 이럴 때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 핑계 대는 거야.]

“아, 그런가요.”

신성중은 애매하게 웃었지만, 웃음 속에 불쾌함이 느껴졌다.

“대표님, 죄송해요. 둘째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와서요. 다음엔 미리 약속 잡아서 연락 주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에는 꼭 약속 먼저 잡을게요. 안녕히 가세요.”

신성중은 첫 만남 때와 달리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했다.

김미영은 창문을 바로 올려버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곤 백미러로 엄마를 슬쩍 쳐다봤다.

“성국이 엄마, 일부러 그런 거죠?”

“언니, 눈치챘어요?”

엄마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엄마도 이제 제법인데.]

나는 엄마 품에 폭 안겨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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