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전재형 부회장은 임선미와 함께 삼전 전자의 새 광고를 보고 있었다.
성국이와 저스트 멤버들의 합이 잘 어우러진 광고였다.
임선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전까지 삼전 전자 광고 하면 우아한 여자 모델 먼저 생각했는데, 이젠 성국이 먼저 떠올릴 것 같아.”
“훨씬 친근한 이미지가 강하긴 하네. 삼전 전자가 이미지를 확 바꾼 기념으로 특별히 성국이랑 ‘저스트’ 멤버들 데리고 쇼케이스도 진행해 보려는데, 어때?”
“괜찮은 거 같은데. 아무래도 모델이나 광고 콘셉트가 갑자기 바뀌면 대중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잖아. 자기야, 협찬을 해보는 게 어때?”
“협찬?”
“‘저스트’ 멤버들 다음 달에 새 앨범 나오고 숙소도 옮긴다는 것 같아. 숙소 옮기면서 거기 제품들 모두 삼전 전자 제품으로 협찬하는 거 어때? 성국이네도 한번 알아보고.”
“안 그래도 협찬은 공격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좋은 생각이네.”
전재형 부회장은 물을 마시며 시계를 봤다.
저녁 7시였다.
“오늘 저녁은 선미 좋아하는 프렌치 레스토랑 갈까?”
“내가 오늘 굉장히 특별한 거 준비했어.”
임선미는 미소를 빙긋 짓더니, 전재형의 손을 이끌고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는 보쌈이 놓여 있었다.
“보쌈이잖아. 직접 한 거야?”
“설마…. 성국이네 아빠가 일하는 <원아저씨 보쌈> 거기 가서 사온 거야. 궁금해서 저번에 몰래 매니저 시켜서 사다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더라고.”
“그래?”
전재형은 미심쩍은 얼굴로 보쌈을 바라봤다.
“우선 한번 먹어봐. 맛없으면 자기가 말한 프렌치 레스토랑 바로 가면 되잖아.”
전재형은 젓가락을 들어 보쌈을 한 점 집어 들어 맛을 봤다.
따뜻한 보쌈이 입안에서 스르륵 녹아 없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전재형 부회장은 곧바로 한 점을 더 집어 들었다.
“어머, 자기 입맛에도 맞아?”
“응. 괜찮네.”
이건 세계 각국의 산해진미를 다 먹어본 전재형 부회장이 할 수 있는 극찬이었다.
임선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참, 나 이번에 소속사 바꾸려고.”
“신성 기획. 지금까지 일 잘해왔잖아.”
“성국이네한테 하는 것 보고 실망 많이 했거든.”
“무슨 소리야?”
“강약약강. 성국이네, 내가 기획사 소개해 줬는데, 처음에 말도 안 되는 노예 계약서를 내밀었더라고. 다행히 성국이 지금 매니저가 그때 도움 준다고 해서 그쪽으로 옮긴 것 같아. 나도 이번에 재계약인데, 벌써 업계에 우리 관계를 푸니 마니 하는 말을 은근히 흘리거든.”
전재형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예계 관행은 전재형 부회장도 잘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전주신 회장이 사업을 일으키던 때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재형 부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마. 찌라시 정도야 우리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어. 근데, 새 소속사는 정했어?”
“아직…. 나 성국이네 회사로 가면 어떨까?”
“거기 성국이 혼자 있는 1인 기획사잖아.”
“자기야, 나 임선미야. 대한민국에서 임선미가 나오지 않는 드라마와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잖아. 나 한 명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 기획사는 먹고산다고.”
임선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전재형 부회장은 그런 임선미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동시에 자꾸 자신과 성국이가 엮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 * *
“성국아, 이것 들고 들어가면 돼.”
“녜엥!”
나는 얼른 대답하며,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삼전 전자 광고의 일환으로 ‘저스트’의 옮긴 숙소 집들이를 하는 게 이번 프로그램의 콘셉트였다.
일요일 저녁 황금시간대 오락 프로의 한 꼭지를 특별 방송으로 편성한 것만 봐도 삼전의 영향력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김미영은 이제 제법 자란 내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올렸다.
“성국이, 다음 주에 미용실 가야겠어.”
[청담동에 내가 잘 아는 숍 있는데, 거기 부탁해도 될까, 김 매니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 성국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임선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총총총 걸어왔다.
“매니저님도 함께 계셨네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임선미가 김미영에게 알은척을 했다.
나는 순간 턱을 매만졌다.
[임선미가 왜 김미영에게 이렇게 알은척을 하지? 설마… 소속사 계약 종료 시점인가.]
연예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때는 촬영 중을 빼면 바로 소속사 계약 종료 시점 전후였다.
임선미는 내 손을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성국아, 오늘은 나도 같이 집들이 갈 거야. 우리 다 같이 삼전 전속 모델이잖아.”
[잘 알지.]
나는 임선미의 손을 꼭 잡았다.
재벌들은 서로 악수를 하면서도 순서를 정하고, 누구와 몇 분의 이야기를 나눌지. 어떤 이야기를 화제에 올릴지 정한다.
지금 나는 임선미와 아주 중요한 일 이야기를 해야 할 타이밍이다.
임선미만 영입한다면, 현재 내 1인 기획사 같은 이곳도 엄청난 성장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흠….”
제조업은 이미 재벌들이 터를 닦아놔서 신흥 재벌이 생기는 구조는 대한민국에서 거의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다르다.
잘 키운 그룹 하나가 엔터테인먼트사 하나를 세계적 그룹으로 이끌기도 한다.
나는 임선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성국아, 왜?”
나는 팔을 쫙 벌렸다.
안아달란 표시였다.
“안아달라고?”
“녜예!”
“아우, 우리 성국이는 어쩜 낯도 안 가릴까.”
[당연히 안 가리지. 저번 생에서도 우리 종종 본 사이야.]
나는 임선미의 품에 폭 안겼다.
감독이 얼른 달려오더니 나와 선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입장해도 그림 좋겠네요. 자, 그럼 촬영 시작합니다. 성국아, 잘하자!”
“녜에!”
“자, 문 엽니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카메라가 돌아갔다.
문이 열리면서 ‘저스트’의 멤버들이 나와 임선미를 반갑게 맞이했다.
반지하를 벗어난 ‘저스트’ 멤버의 숙소는 강남의 고급 빌라였다.
햇살도 잘 들었고, 멤버들 한 명 한 명이 쓸 방도 보였다.
그리고 내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삼전 전자의 가전이었다.
곳곳에 삼전 전자의 가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이면 삼전 전자 대리점에 ‘저스트’ 숙소의 가전제품을 찾는 전화가 불티날 것 같았다.
* * *
“고생 많았어, 성국아.”
임선미가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선미 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김미영이 다가왔다.
나는 얼른 이 틈을 타서 임선미의 손을 잡고 김미영에게 갔다.
“가티. 가티.”
“성국아, 뭐라는 거야?”
“가티. 가티.”
나는 최선을 다해 혀를 굴렸지만, 세 살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같이라는 말 같은데요.”
임선미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역시 센스 있네, 선미 누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김미영은 눈치를 채고는 임선미를 쳐다봤다.
“시간 되시면, 저희랑 식사 같이 하실래요? 성국이 고생해서 짜장면 먹으러 가려고요.”
“좋죠. 저도 요즘 드라마 하나 끝나고 시간 좀 많거든요. 제가 삼전 호텔 중식당 예약할게요. 그쪽으로 가요.”
[드디어 삼전 호텔 짜장면을 만나는구나!]
나는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로 살 때야 원할 때면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 집안에 태어나고 나서는 그런 건 꿈도 못 꿨다.
집 앞에서 파는 동네 짜장면만 먹어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성국아, 춤추는 거야?”
[좀 더 보여줄까?]
나는 좀 더 어깨를 들썩이며 손뼉까지 쳤다.
“까르르.”
“와, 성국이 특기 하나 더 나왔는데요.”
임선미가 기분 좋게 이야기를 건넸다.
민국이 어린이집 하교 때문에 뒤늦게 도착한 엄마도 어느새 도착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성국이 기분 좋구나?”
[에라, 기분이다. 오늘 어깨춤 좀 춰주지. 삼전 호텔 짜장면 먹으러 가는데, 이 정도 애교는 서비스!]
* * *
[아, 이 영롱한 짜장의 색을 보라. 윤기 나는 짜장과 각종 채소와 소고기가 잘 버무려진 환상이 소스. 그 아래 놓인 탄력 있는 면발과 젓가락질로 한데 어우러지면 이게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삼전 호텔의 짜장이다!]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성국아, 천천히 먹어.”
[엄마, 나 말리지 마. 간만의 촬영이라 다이어트 하느라 그동안 이유식 양도 줄였다고. 오늘 나 치팅데이야!]
나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짜장면을 연신 넘겼다.
임선미가 흐뭇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이 짜장면 정말 좋아하네요.”
“저희도 종종 시켜주는데, 이 집 짜장면은 유난히 더 좋아하네요.”
엄마가 짜장면 먹느라 땀이 흥건한 내 이마를 쓸어 올렸다.
임선미도 나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성국이도 이제 삼전 호텔 짜장면 맛을 알았으니까, 다른 데 못 갈 거예요.”
[맛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엄마가 입가에 묻은 짜장을 냅킨으로 닦아줬다.
[자, 다시 시작해볼까.]
후루룩. 후루룩.
나는 또다시 짜장면을 흡입했다.
“성국아, 천천히 먹어. 이모가 다음에 또 사줄게.”
임선미는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김미영을 쳐다봤다.
“참,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아니에요. 선미 씨 덕분에 저희 성국이도 도움 많이 받았는데요. 저희가 살게요.”
“사실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훅 들어오네, 선미 누나.]
나는 짜장을 꼭꼭 씹으면서 임선미를 주시했다.
사람들은 나같이 말 못 하는 아이가 있으면 자신들의 이야기를 편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먼저 제가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대외비로 부탁드려요.”
“그럴게요.”
김미영이 칼같이 대답했다.
임선미는 젓가락을 놓더니 엄마와 김미영을 쳐다봤다.
“저 이번에 신성 기획이랑 계약이 끝나거든요.”
김미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임선미는 곧 다음 말을 이었다.
“새 소속사를 알아보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제 일도 봐주시면 어떨까요?”
엄마는 너무 놀라 두 눈만 끔뻑거렸다.
김미영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미 씨 말씀은 그러니까… 저희 기획사랑 일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네.”
“저희 기획사는 성국이 한 명밖에 없는 1인 기획사에 가까운데요. 그 말은 임선미 씨를 서포트할 인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잘 알죠. 사실은 저도 신성 기획과 일을 마무리할 생각 하면서 1인 기획사를 차릴까 고민 많이 했어요. 그러려면 믿을 만한 사람들이 필요한데, 창피한 이야기지만 저희 가족들 중에 믿을 사람이 없거든요.”
[알지. 알지.]
나는 짜장을 씹어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임선미의 집안이 막장 오브 막장인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부모님은 임선미 수입을 놓고 갈등을 빚다 이혼하시고, 어머니는 임선미 이름을 팔며 사기 치고 다녔다.
그러는 바람에 임선미가 그 뒤치다꺼리 하려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건 유명한 일이다.
다행히 전재형 부회장이 뒤를 봐주면서 부모 일은 좀 정리가 됐지만, 그 바람에 가족들과는 인연을 끊다시피 했다.
“신성 기획이랑 재계약할 때,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했는데요. 이제는 수입도 수입이지만, 마음 편하게 일을 하고 싶어서요. 저 전담 매니저는 제가 충분히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인력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김미영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리 대어라고 해도 덥석 잡으면 안 되는 법이지.]
나는 짜장면을 호로록 삼켰다.
“선미 씨,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모두 대외비로 하고 저희랑 정확한 조건 서로 교환해보죠. 신성 기획에도 비밀로 부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최대한 조용히 소속사를 옮기고 싶어요.”
김미영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신성 기획에 책잡힐 일이 있으시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그런 거야 계약 조건이 서로 맞으면 풀어야겠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삼전 쪽에서 그 정도는 막아주기로 약속한 상태거든요. 저 아직 삼전 모델이잖아요. 기간도 남아 있고요. 삼전 쪽에서도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거든요.”
임선미는 역시 프로였다.
“적절한 타이밍이네요.”
김미영이 엶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손뼉을 쳤다.
짝. 짝.
“성국아, 뭐가 그렇게 좋아?”
임선미가 물었다.
[내 회사가 커지는 일이니 당연히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