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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2화 (22/231)

제22화

꾸벅.

무거운 머리가 앞으로 푹 꺼졌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때렸다.

찹. 찹. 찹.

엄마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안아 들었다.

“성국아, 졸려?”

[졸리지만, 자면 안 돼.]

나는 도리도리를 했다.

“성국아, 엄마가 재워줄게.”

[뭔 소리야! 자면 안 된대도.]

나는 얼른 엄마 품에서 빠져나와서 아장아장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 엄마와 김미영 그리고 아빠는 임선미 영입에 대해서 중대한 토론 중이었다.

이런 중요한 어른들의 대화를 안 들을 수 없었다.

아빠는 걱정이 앞서는 얼굴이었다.

“임선미 씨가 온다면 조건도 조건이지만, 저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선 임선미 씨가 같이 다니는 매니저는 함께 움직이기로 했어요. 계약 논의 중인 작품이 두 작품 정도 있는데, 모두 계약서에 사인만 남은 상태고요. 계약서 사인은 기획사 옮기는 대로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김미영은 임선미와 연락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무리 고졸이지만, 삼전 기획에서 잔뼈가 굵은 김미영이었다. 일만큼은 확실했다.

“계약금이 없는 대신에 계약 기간은 3년으로 하고, 비율은 9 대 1로 했으면 하더라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임선미 씨 광고나 드라마, 영화 계약금의 10%라고 해도 저희 규모로는 충분히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거든요.”

아장아장.

나는 하염없이 방을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선미는 생각보다 야무졌다.

가족들에게 빨대 꽂힌 채 평생을 사는 연예인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적절히 가족도 쳐냈고, 이제는 본격적인 노후 대비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3년 후면 임선미도 30대 중후반이 된다.

90년대 초반에 30대 중후반의 여배우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다가 결혼으로 은퇴하는 게 연예계의 정해진 패턴 중 하나였다.

아빠가 고민되는 얼굴로 김미영을 쳐다봤다.

“이렇게 되면 정말 제대로 된 회사가 되는 건데요. 저희도 신경을 써야 할 텐데, 저는 솔직히 지금 하는 일을 좀 더 잘 해보고 싶거든요.”

“자기야.”

엄마가 끼어들었다.

“내가 일해보면 어떨까?”

“소영아….”

아빠는 잠시 멍한 상태로 엄마를 쳐다봤다.

“나 상과 나와서 경리 일 했잖아. 고등학교 3년 내내 배운 것도 있고, 짧지만 일한 경력도 있잖아. 회사 재무재계 정도는 나도 파악하고 정리할 수 있어. 언니가 대외적인 것을 지금처럼 맡아준다면, 난 회사 살림 챙기는 거 하면 될 것 같아.”

엄마는 나름 강단이 있었다.

김미영도 덧붙였다.

“성국이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전 괜찮은 제안 같거든요. 안 그래도 임선미까지 영입하면 회사 살림 돌보는 직원 한 명은 필요한데, 성국이 엄마만큼 믿을 만한 사람도 없잖아요.”

“자기야, 나 일하고 싶어.”

엄마는 아빠를 살짝 졸랐다.

“성국이랑 민국이는 어쩌고?”

[내 걱정은 마. 이제 기저귀도 나 혼자 갈 수 있어.]

“종종 민국이 봐주시는 이모님 있잖아. 그분 겪어보니까 일도 잘하시고, 민국이도 좋아하셔서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아.”

“한창 애들 손 갈 나이인데….”

아빠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아장아장 걸어가서 모른 척 아빠의 등짝을 내려쳤다. 쫙!

[아빠, 정신 차려. 이 집안이 일어서려면 맞벌이는 기본이야.]

“성국아, 그러지 마.”

아빠는 가뿐히 나를 안아 들었다.

아직 20대 젊은 아빠의 힘에는 세 살짜리는 도대체 감당할 수가 없었다.

“소영아, 네 마음은 알겠으니까 시간 좀 두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그렇게 하세요. 솔직히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임선미 계약이 성사되면 그때부터 일 시작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와, 일한다니까 막 가슴이 두근거려. 나 옛날에 공부한 것들 좀 다시 꺼내 봐야겠어.”

엄마는 꽤 들뜬 얼굴이었다.

* * *

임선미는 포커페이스로 신성중을 바라봤다.

신성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선미야, 니가 나한테 이럼 안 되지.”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너 어려울 때 거둬주고 키워줬는데, 지금 와서 재계약을 안 한다고?”

“어려울 때 거둬주고 키워주신 것에 대한 것은 제 개런티로 이미 갚고도 남은 것으로 아는데요.”

“헛-.”

급기야 신성중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더니 앞으로 자세를 모았다.

임선미는 팔짱을 낀 채 신성중을 여유롭게 바라봤다.

신성중이 깔 패가 뭔지 너무 보여서였다.

“선미야, 너 말이야. 내가 입만 뻥긋하면 어찌 되는 줄 아니?”

“…….”

임선미는 신성중의 다음 말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너 말이야. 내가 증권가에 찌라시 확 풀면.”

“저는 더는 이렇게 더럽게 일하는 신 대표님과 일을 못 하겠습니다.”

“야!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알죠. 당연히. 그 찌라시 어디든 풀리는 날에는 신 대표님도 이 바닥에서 더는 못 버틸 겁니다. 전재형 부회장님이 삼전 전속 모델인 제가 더러운 오물통에 빠지는 건 안 보고 계실 거거든요. 아시죠? 삼전 그룹에 찍힌 전신 기획이 어떻게 망했는지요. 대한민국에서 삼전 전자 광고 안 들어가는 프로는 하나도 없잖아요.”

신성중은 말을 잃었다.

말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전신 기획은 삼전 그룹 전속 모델로 활동하던 배우의 마약 스캔들을 막지 못했다.

그 일로 삼전 그룹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는 바람에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려 완전히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임선미는 자리에서 유유히 일어났다.

오늘따라 입은 샤랭의 트위드 재킷과 스커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신 대표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날 때도 신성 기획 대표였으면 좋겠네요.”

“뭐?”

화가 난 신성중이 뒤따라 일어섰지만, 임선미는 그대로 뒤돌아 신성 기획 대표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신성중에게서 벗어났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성국이 덕분이라는 생각이 임선미 머릿속을 스쳤다.

성국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 * *

1994년 7월 4일.

스포츠 신문 전면에 임선미의 재계약 소식이 전해졌다.

<신성 기획을 떠난 임선미.

신생 기획사인 SKJ로!

SKJ는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의 스타 전성국 군의 일인 소속사!>

벌써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나는 사무실을 꾸리고 있는 엄마와 김미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자꾸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는 걸까.]

나는 겨드랑이를 올려서 선풍기 앞에 대고 말렸다.

엄마와 김미영은 책상을 이리저리 놓아보고 있었다.

“언니, 임선미 새 소속사가 사무실도 제대로 없는 거 알면 사람들이 놀라 자빠질 거예요.”

“우리처럼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들이 뭐, 꼭 사무실이 필요한가요. 그리고 이게 무슨 사무실이에요. 우리 건물에 원룸 하나 뺀 건데요.”

“덕분엔 전 아이들 근처에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러니까 내 최초의 기획사는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의 원룸이었다.

마침 나간다는 세입자가 있었고, 계속 나와 민국이를 걱정하는 아빠의 시름도 덜 적절한 선택이었다.

원룸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테이블도 마련하니 대충 사무실 같긴 했다.

엄마가 선풍기에 겨드랑이를 열고 말리는 나를 보고는 빙긋 웃었다.

“성국아, 사무실 멋지지?”

도리도리.

[너무 직설적이었나. 엄마 기 좀 살려줘야지.]

끄덕끄덕.

“언니, 성국이도 마음에 드나 봐요.”

“성국아, 원래 시작이 소박해야 다음이 멋진 거야.”

[그놈의 초라한 시작은 내가 안 해본 거라 모르겠어, 김 매니저. 그나저나 에어컨 안 달아? 1994년 여름은 최악의 더위라고!]

엄마와 김미영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언니, 이번 여름 정말 덥죠?”

“7월 초인데, 이렇게 더우면 얼마나 더울지 걱정이 되긴 해요.”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언니, 전화요!”

엄마가 놀라 전화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건 이제부터 성국이 엄마 담당이죠.”

“아, 맞다.”

엄마는 부랴부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SKJ 기획사입니다. 네. 7월 8일 금요일 저녁 스케줄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툭.

엄마는 전화를 끊고는 놀란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언니, 저 방금 삼전 전자 기획실에서 온 전화 받았어요.”

“무슨 일이에요?”

“7월 8일에 전재형 부회장 첫째 아들 생일이라고요. 삼전 호텔 다이아몬드 홀에서 저녁에 생일 파티하는데, 성국이 좀 와달라고 하네요.”

7월 8일은 평생 내 발 뒤꿈치도 못 쫓아온 전태국의 생일이었다.

나는 팔짱을 꼈다.

[이게 어디서 오라 가라 갑질이야. 나 안 가! 절대 안 가!]

김미영이 수첩을 꺼내더니 스케줄을 확인했다.

“성국이 의류 촬영이 다음 주니까, 금요일은 시간 괜찮을 것 같아요. 시간이랑 시간당 페이 제가 한번 조율해 볼게요.”

[이봐, 김 매니저. 안 간다고!]

내가 종알거리자, 김미영이 귀엽다는 듯 볼을 꼬집었다.

[김 매니저, 내 몸에 손대지 마.]

“아우, 귀여워라. 성국아, 그날 내가 특별히 너 좋아하는 짜장면 주문해줄게.”

[짜장면?]

꼴깍.

민망하게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태국은 싫지만, 짜장면은 먹고 싶다.

나는 짧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부여잡았다.

[짜장면이냐, 전태국이냐. 이것이 고민이네.]

“언니, 그 말 나오니 저희도 점심 먹어야죠. 중국집 어때요?”

[엄마, 난 짜장.]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성국이는 짜장면 엄마랑 나눠 먹자.”

[엄마, 나도 이제 한 그릇 먹는다고.]

이때, 초인종이 울리면서 임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그 유명한 SKJ 기획사 맞죠?”

“어머, 어서 오세요.”

엄마가 임선미를 환하게 맞았다.

“마침 잘 오셨어요. 저희 점심 먹으려고 하거든요. 선미 씨, 중국집 괜찮으세요?”

“저 다음 달에 영화 들어가잖아요. 다이어트 중이랍니다. 이거 전해드리고 가려고요. 금전수예요. 앞으로 저도 SKJ 기획도 대박 나야 하잖아요.”

엄마는 얼른 금전수를 받아 들었다.

“감사해요.”

임선미는 쀼루퉁한 나를 발견하곤 옆으로 다가왔다.

“성국아, 덥지?”

나는 일부러 겨드랑이를 오픈하고 선풍기 앞에 앉았다.

[선미 누나, 내가 지금 겨드랑이 벌리고 선풍기 앞에 서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임선미가 엄마를 뒤돌아봤다.

“성국이 어머니, 제가 개업 기념으로 에어컨 선물할게요.”

“괜찮아요. 저희는 쭉 선풍기로 잘 견뎠어요.”

[에어컨 없이 살아본 것은 지금까지도 족하다고. 서민 체험 많이 했느니, 어서 받아, 엄마!]

“제가 잘 보여야 하는데, 금전수 하나는 부족하죠. 사실은 주문 다 넣고 왔어요. 올해 여름 너무 더워서 계약이 너무 밀려 있어서 며칠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임선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온몸에 땀띠 나서 죽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고마워, 선미 누나.]

김미영이 임선미에게 차가운 보리차를 내밀었다.

“이건 다이어트에 상관없으니 괜찮으시죠?”

“그럼요. 참, 저 다음 영화 촬영 지방이 많은데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내일 영화사 만나서 숙소부터 다 정리하기로 했어요.”

“제가 딴 건 다 괜찮은데, 잠자리가 좀 예민해요.”

“당연히 예민하셔야죠. 잠이 가장 중요한데요. 그런 거 걱정 마세요. 혹 더 살펴봐야 할 것 있으면 격 없이 말하세요. 제가 그런 것도 다 알아야 챙기죠.”

“그럼, 오늘 가서 저녁에 좀 적어보고 내일 아침에 일찍 전화 드릴게요.”

“네!”

김미영은 어느새 제법 프로처럼 대답했다.

[김 매니저, 이게 다 내 덕분이라고. 그러니 어서 짜장면 부탁해.]

* * *

“성국아,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아, 눈 뜨기 싫다.]

나는 몸을 뒤척였다.

돈만 아니면 전태국의 생일에 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성국아, 세수하고 치카해야지.”

[시로. 시로.]

나는 졸린 눈을 최대한 비볐다.

그러면서 어느새 익숙하게 엄마 품에 안겼다.

[하아, 엄마 품은 역시 따뜻했다. 난 왜 이 좋은 것을 회귀 전에는 몰랐던 걸까.]

엄마가 내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성국아, 오늘은 집에서 쉴래? 전재형 부회장님 아들이 널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는데, 네가 싫다면 쉬어도 돼.”

[엄마, 뭔 소리야. 얼굴 비치고 천만 원이야. 전태국이 아니라 38선 넘어 김일성 생일 파티에도 갈 판이라고. 아, 맞다….]

그 순간, 나의 뇌리에 스치는 사건 하나가 있었다.

1994년 무더운 여름.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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