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탁.
나는 무릎을 쳤다.
[조금만 더 나이가 먹었어도, 방산 주식 잔뜩 사는 건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오동통한 몸을 내려다봤다.
어쩜 발가락마저 작고 귀여운 건지.
꼼지락꼼지락.
“성국아, 뭐가 그렇게 슬퍼?”
“성구기. 성구기. 슬퍼옹.”
나는 할 수 있는 몇 단어를 겨우 뱉었다.
“성국아, 일하는 거 힘들지? 우리 이제 일 그만할까?”
[앗, 그건 아니야, 엄마. 나, 일하는 거 엄청 좋아. 나 원래도 엄청난 워커홀릭이었다고.]
나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목이 조금 찢어진 곰돌이를 발견하고는 엄마에게 내밀었다.
“곰. 아야. 아야. 호- 해줘.”
“우리 성국이가 이래서 슬펐구나. 엄마가 미안해. 어서 곰돌이 호 해줄게.”
엄마는 얼른 실과 바늘을 들고 와서 곰돌이의 목을 꿰맸다.
[겨우 넘겼네, 휴우-.]
쓰윽. 쓰윽. 쓰윽.
이때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방바닥을 온몸으로 밀며 민국이가 나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입가에는 침이 한가득이었다.
저 녀석에게 잡히면 온몸이 침 구덩이가 된다.
나는 얼른 아장아장 민국이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국이 이 녀석도 만만치 않았다.
[운동신경은 좋군.]
나는 그만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도망갈 데 없는 나를 본 민국이의 입가에 침과 함께 미소가 터졌다.
[제발,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혀-.”
형이라고 제대로 말도 못 하면서 민국이는 그대로 나를 덮쳤다.
민국이는 내 발 하나를 잡고는 연신 침을 묻혀댔다.
[저리 가라, 좋은 말 할 때.]
히죽.
[야, 뭐가 그렇게 좋아? 너 앞으로 공부도 못하고, 부모님 속 썩이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호적에서 파버릴 거라고. 그래도 내가 좋아?]
히죽.
[이 녀석, 내 소리가 뭔 소리인지 알아듣기나 하는 건가.]
민국이의 침은 이제 종아리까지 점령했다.
[그래, 다 침으로 점령해라, 해!]
히죽. 히죽. 히죽.
철커덩.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국이를 봐주는 이모님이 오시는 소리였다.
“민국아, 형이랑 놀고 있어?”
민국이가 이모님을 보더니 히죽거리며 몸 방향을 틀었다.
그러곤 나에게 보이던 그 해맑은 미소를 이모님에게 보이고 있었다.
히죽. 히죽.
내 다리에는 민국이의 침만이 남아 말라가고 있었다.
[민국이 이 지조 없는 자식. 이게 뭐라고 서운하지…. 치이.]
* * *
삼전 호텔 로비.
짜장면 먹으러 올 때도 봤지만, 역시 1990년대 인테리어는 나랑 안 맞았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성국아, 잘 지냈어?”
양 비서가 날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양 비서, 오랜만이야.]
“어머니도 잘 계셨죠? 성국이는 안 본 사이 더 컸네요.”
“요즘 한창 크나 봐요.”
이때, 양 비서 뒤로 고개를 삐죽 내민 양 비서가 보였다.
“양 비서님, 아드님이세요?”
“철수야,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양철수입니다.”
[오랜만이야, 양 비서.]
나는 반갑게 손까지 흔들어줬다.
“성국이가 형 엄청 좋아하네요.”
나는 아장아장 걸어가서 어린 양 비서의 손을 탁 잡았다.
어린 양 비서가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아버지 양 비서를 올려다봤다.
“아빠, 나 성국이랑 로비 한 바퀴 돌아도 돼요?”
“위험한 데 가면 안 돼.”
“응.”
어린 양 비서는 내 손을 꼭 잡고는 조심스레 발을 뗐다.
역시 어린 양 비서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나보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항상 남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성국아, 형이 천천히 걸을게. 형이랑 같이 걷자.”
“옹!”
나는 얼른 신나게 대답을 해줬다.
어린 양 비서는 어른들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온 로비를 구경시켜 줬다.
“성국아, 여긴 삼전 그룹에서 하는 호텔이야. 아버지가 그러는데, 여기 로비에 있는 그림들 모두 부회장님이 직접 사신 거래.”
[역시 아버지랑 나랑은 취향이 안 맞아.]
나는 그제야 왜 이 로비 인테리어가 싫은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게 전재형 부회장의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글쎄, 주가에는 이미 선반영이 된 모양인데, 북한 체제가 얼마나 오래가겠어.”
옆으로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 이때만 해도 나도 1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정세를 깊이 있게 알 때가 아니었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겠지만, 북한에서 쿠데타라도 일어나면 혼란의 도가니가 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걱정 마, 아저씨들. 김정일에 이어서 그 아들까지 대대로 해먹으니까.]
“우리한테는 북한이 있는 게 이득이잖아. 정치하는 양반들도 그렇고.”
“북한은 진짜 양날의 검이라니까.”
끄덕끄덕.
[그치, 그치. 양날의 검이지. 그 녀석, 앞으로도 심심하면 미사일 쏘고 그래.]
“야! 양 비서!”
나의 심도 깊은 엿듣기를 방해하는 저 재수 없는 목소리.
어떻게 죽어서 다시 태어났는데도 잊히지가 않지?
“양 비서. 걔가 성국이지?”
“네, 도련님. 도련님이 성국이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내 친구들이 엄청 보고 싶어 해서 부른 거야. 뭐, 화면이 더 낫네.”
[뭐라고?]
“눈만 크고 별로 이쁜 줄도 모르겠네.”
[네 면상 좀 보고 이야기해, 전태국.]
전태국은 어머니인 철의 여인이 성형하기 전의 얼굴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코는 눌렸고, 눈은 찢어졌으며 턱은 둔탁하게 생겼다.
“와아! 성국이다.”
이때, 뒤에서 명품 브랜드의 아동복 라인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 한 명이 다가왔다.
[정희잖아.]
쿵.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희는 내 첫사랑이었다.
나와 함께 학원을 째고 놀이공원에 놀러 갔던 그 아이.
전태국이 얼른 심술궂은 표정을 숨기곤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정희를 쳐다봤다.
“정희야, 네가 성국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아버지한테 말해서 준비했어.”
[준비했어? 내가 뭐 물건이냐, 이 무식한 놈아.]
곧 정희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어, 고마워.”
정희가 못생기고, 성격도 더러운 전태국을 좋아할 리는 없었다. 나라면 모르지.
나는 방글방글 웃으며 정희를 쳐다봤다.
“성국아, 나랑 놀래?”
어린 양 비서가 정희를 가로막았다.
“아가씨, 성국이 어머니가 걱정하실 거예요.”
“그 생각을 못 했네. 철수야, 성국이 어머니 어디 계셔? 가서 허락받자.”
[역시 정희는 얼굴도 이쁘지만, 예의도 참 발랐다.]
정희가 내 손을 잡았다.
쿵쾅. 쿵쾅.
[심장이 왜 이러지?]
정희에게서는 예전처럼 좋은 냄새가 났다.
숱 많은 까만 머리에 단아한 눈썹. 화려한 장미가 아닌 우아한 백합 같은 미모가 정희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내가 왜 정희랑 헤어졌지?]
나는 과거를 더듬었다.
정희는 내 첫사랑이자, 나의 첫 여자 친구였다.
대학까지 우리 관계는 재계에서 소문난 사이이기도 했다.
불현듯 전재형 부회장이 떠올랐다.
정희네 집안 역시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재계 집안이었지만, 삼전 그룹에는 한참 못 미쳤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저 돈 좀 있는 집안 정도였다.
그렇다고 정말 돈 좀 있는 회사는 아니었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건설 업체였고, 부동산 보유도 상당했다.
[아, 맞다. IMF.]
정희네는 IMF때 부도가 난다.
물론 부자가 망해도 삼 대가 간다는 말처럼 먹고사는 데는 아무 문제 없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나랑 결혼할 급의 집안은 되지 못했다.
전재형 부회장은 정희가 내게서 떨어지는 조건으로 정희네 집안의 문제 하나를 해결해줬다.
우리에겐 큰일이 아니지만, 정희네에는 큰 문제.
바로 IMF로 사업체를 잃은 정희네 아버지에게 다시 일어날 하청 사업 하나를 준 거였다.
첫사랑이 모두 그렇듯 헤어짐은 가슴 아팠지만, 그 이후로 나는 정희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정희가 직접 유학 중인 뉴욕의 내 아파트까지 여러 번 찾아왔지만, 나는 만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배신감이 컸다.
결국, 나를 이용해서 자신의 집안을 일으키려는 술수로 보일 뿐이었다.
가진 게 많으면 원래 남을 믿기 어렵다.
후에 어느 검사에게 시집가서 아이 낳고 잘 산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나는 문득 멈춰서 정희를 올려다봤다.
“성국아, 왜 그래?”
“미얀.”
“미안하다고?”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아, 미안할 거 없는데.”
[저번 생에서 좀 미안했어. 그래도 나랑 사귄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았잖아.]
정희가 나와 헤어지고 자살 시도를 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일찍 발견해서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뒤늦게 정희의 진심을 알았다.
그땐 내가 연락을 했지만, 정희가 받지 않았다.
“아가씨, 성국이 잘 돌보시네요.”
어른 양 비서가 다가왔다.
이제 파티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아저씨, 성국이가 절 너무 잘 따라요. 나중에 언제 또 볼 수 있을까요?”
“여기 성국이 어머니 되세요. 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허락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정희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뒤에서 고개 빳빳이 들고 있는 누구랑 비교가 됐다.
“어머니, 다음에 성국이 데리고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성국이가 아직 놀이공원 가기에는 너무 어려서요.”
“그럼, 성국이 좀 더 크면 제가 데리고 가도 돼요?”
“물론이죠.”
엄마가 방긋 웃었다.
엄마도 정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저번 생에서 정희는 나보다는 네 살, 태국이보다는 두 살이 어렸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서는 나보다는 네 살이 많았다.
[연상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첫사랑은 첫사랑일 뿐.]
그래도 난 예전의 감성에 젖어 정희의 손을 꼭 잡았다.
“양 비서 아저씨, 아빠는 왜 안 와요?”
전태국이 뒤에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언제나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성질 먼저 내는 어린애. 저 성격은 여전했다.
“오늘 좀 바쁜 일이 생기셔서요. 우선 저희끼리 생일 파티를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봐도 뻔하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죽었는데, 전재형 부회장이 안 바쁠 리가 없었다. 청와대에 불려 들어갔을 게 뻔하다.
“아, 싫어. 아빠도 없는데 무슨 생일 파티야! 생일 파티 취소해! 취소하라고!”
전태국은 투덜거렸다.
“태국 오빠.”
정희가 전태국을 타이르듯 불렀다.
“왜에?”
전태국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우리끼리 작게 생일 파티 하면 안 될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생일인데,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고 화려하게 해야지.”
“오늘 오빠 어머니도 친정에 일 있어서 못 오신다며. 어른들은 빼고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게 생일 파티 하면 더 좋잖아.”
철의 여왕이 보이지 않은 이유야 잘 알았다.
철의 여왕의 아버지이자, 한때 내 외할아버지였던 최득현 국무총리께서는 이맘때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내 기억으로는 김일성이 죽고, 외할아버지였던 최득현은 딱 한 달 뒤에 죽는다.
[그래서 내가 김일성 사망일을 정확히 기억했군.]
나는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뿔난 전태국을 쳐다봤다.
어쩌면 저 녀석은 지금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심정일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에서 최고의 요리사가 준비한 음식이 놓여 있고, 자신이 부르고 싶은 연예인들도 다 불렀다.
비록 열 살짜리에게 잘 보여야 하는 정재계 인사들도 수없이 찾아와서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생일 선물을 발아래 놨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없는 것과 같았다.
엄마, 아빠가 없는 생일 파티라니….
나는 씁쓸한 얼굴로 전태국을 바라봤다.
“싫다고! 나 생일 파티 안 할 거야!”
전태국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바람에 양 비서 아저씨와 경호원들이 뒤를 따랐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 마음대로 안 되면 도망쳐 버리는 저 버릇은 여전하구만.
정희가 쭈뼛쭈뼛 서성이는 게 보였다.
나는 걸어가서 정희의 손을 낚아챘다.
“성국아, 왜?”
[왜긴. 이번 생에서는 내가 이 손 안 놔볼게.]
“성국아, 뭐라고 종알거리는 거야?”
[그냥, 이런 남자 좀 어때?]
나는 턱을 치켜세웠다.
“뭔지 모르겠지만, 성국아. 난 네가 너무 귀여워.”
정희가 내 볼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