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4화 (24/231)

제24화

삼전 호텔 다이아몬드 홀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값비싼 샹들리에.

격식 있게 차려진 테이블들.

그 주변으로 장식된 화환들과 절도 있게 음식을 나르는 직원들.

전태국은 잔뜩 볼멘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재형 부회장과 어머니 철의 여인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양 비서가 그 옆에 앉아서 전태국을 달래느라 진땀을 쏟고 있었다.

[사내자식이 속 좁긴. 사람 안 변해. 쯧쯧.]

“주문하신 짜장면 나왔습니다.”

단정한 옷을 입은 직원이 내 앞으로 삼전 호텔의 짜장면을 한 그릇 내려놓았다.

나는 얼른 내 앞에 놓인 삼전 호텔의 짜장을 한 포크 집어서 돌돌 말아 호로록 먹었다.

엄마가 내 등을 어루만졌다.

“성국아, 천천히 먹어.”

끄덕.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짜장면을 호로록 먹었다.

엄마와 김미영은 부모도 없는 이 화려한 생일 파티가 적응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언니, 아무리 김일성 주석이 죽었다고 해도 아버지도 아들 생일에 안 나타나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재벌들은 진짜 우리 같은 사람이랑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다르다 뿐일까. 일반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입가가 짜장 범벅이 됐다.

“성국아, 짜장 맛있지?”

“녜엥!”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부모 없는 전태국 생일 파티에 와서 첫사랑 정희도 만나고, 맛있는 삼전 호텔 짜장면도 먹고. 나는 저절로 어깨춤이 나왔다.

“성국아!”

뒤에서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보니 ‘저스트’ 멤버들이 모두 몰려와 있었다.

전태국은 요즘 가장 잘나가는 ‘저스트’도 부른 모양이었다.

리더인 태형이 다가와서 짧게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 잘 지내시죠?”

“오늘 공연하시는 거예요?”

“네, 근데 끝나고 바로 가봐야 해서 지금 성국이한테 인사하려고요. 성국이가 뽑아준 <거짓이야>로 저희 대박 났잖아요. 성국아, 고마워.”

[고마움은 마음이 아니라 물질로 표시하는 거야.]

다른 멤버 셋이 차례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또 보자.”

[바빠져서 이젠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들 거야. 고생해, 다들.]

나는 싱긋 웃어줬다.

‘저스트’ 멤버들은 엄마와 김미영에게 마저 인사를 하고는 급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요즘 ‘저스트’ 멤버들 잠잘 시간도 없대요.”

김미영이 요즘 ‘저스트’가 얼마나 잘나가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나야 익히 알고 있던 일이다.

‘저스트’는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이후로 인기가 급상승하더니 삼전 전자 광고까지 귀한 몸인 나와 찍고 연이어 낸 앨범까지 대박이 났다.

애만 키우는 그룹인 줄 알았는데, 노래까지 잘한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뽑은 <거짓이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무대에 선 ‘저스트’ 멤버들은 전태국을 향해 90도로 인사했다.

“전태국 도련님 열 살 생일을 축하드려요! 오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 되시라고 저희가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초록색 풍선 불러 드릴게요!”

태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저스트’ 멤버들은 TV 방송국 음악 방송보다 더 열심히 무대를 누렸다.

심지어 라이브였다.

어린아이의 생일 파티라고 무시하면 안 됐다.

바로 오늘은 삼전 전자의 후계자가 될 전태국의 생일 파티였고, 엄청난 페이가 보장된 무대였다.

나는 원래는 내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전태국을 바라봤다.

전태국의 뚱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억지로 옆에 앉은 정희는 ‘저스트’를 보며 신나 할 뿐이었다.

이때, 뒤에서 전태국의 어깨를 잡는 손이 보였다.

전태국이 뒤돌아본 자리에는 전재형 부회장이 있었다.

전재형 부회장은 곧 빈 옆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전태국의 굳은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저게 무슨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전태국이 짜증 났던 것은 원래 성격이 못된 것도 있었지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겨우 열 살이다.

그런데 생일날 아빠도 엄마도 없다.

아무리 쇼윈도 부부라지만, 그래도 부모는 부모이다.

이때, 옆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익숙한 향수였다.

[이건?]

“이 아이가 성국이군요.”

절도 있는 목소리.

바로 철의 여인이었다.

순간 나는 숨이 턱 멈추는 것 같았다.

“어-.”

나는 얼른 입을 닫았다.

아버지였던 전재형 부회장을 볼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아무리 정 한 조각 주지 않던 철의 여인이었다 해도, 어머니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엄마는 누군지 몰랐지만, 삼전 기획에서 일한 김미영은 철의 여인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리에서까지 일어났다.

“저는 전성국 군 매니저 김미영입니다. 이쪽은 어머니 되세요.”

“실제로 보니 화면보다 더 똘똘해 보이네요. 성국이 덕분에 저희 회사 인지도가 친근해졌다고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삼전 그룹을 저희 회사라고 말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엄마는 그제야 얼른 일어나 인사를 했다.

“성국이가 엄마를 엄청 챙기네요. 그럼, 재밌게 지내고 가세요.”

철의 여인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전태국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엄마와 김미영은 한숨을 돌렸다.

“저분이 삼전 그룹 전재형 부회장 부인이시군요. 전재형 부회장님 가족도 되게 단란해 보여요.”

[엄마,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드디어 ‘저스트’의 노래가 끝나고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전재형 부회장과 철의 여인의 등장에 얼굴이 환해진 전태국이 정희의 반응을 보며 신나게 박수를 쳤다.

나는 정희의 옆자리, 전태국이 앉은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전태국, 방심하지 마. 네 자리보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테니까. 조금만… 한 20년만 기다려!]

* * *

“와!”

엄마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민국이를 안은 아빠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아,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내 평생 이렇게 넓고 좋은 집에 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뒷짐을 진 채 아파트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서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겨우 34평이야. 뭘 이것 가지고 그래. 거기다 서울 완전 외곽인 잠실이잖아. 여기 완전 촌동네네.]

아빠에게 안긴 민국이도 엄마가 울자 따라 울기 시작했다.

이제 민국이도 어엿한 세 살이 되었다.

“어엄마. 으아앙!”

“알았어. 민국아, 엄마 안 울게.”

“소영아, 이렇게 좋은 날 울면 어떡해.”

[내 말이 그 말이야.]

나는 붙박이로 시공된 아파트 곳곳도 열어봤다.

[돈 좀 쓰지. 또 싸구려 자재 썼네. 쯧쯧.]

“소영아, 이제 방도 세 개니까 우리 성국이랑 민국이 하나씩 주면 되겠다. 그치?”

“민국이는 아직 어리니까, 우리가 데리고 자야 하지 않을까?”

[잠깐만. 뭐야, 민국이만 자식이야? 이 아파트, 내가 삼전 전자랑 전속 계약하고 받은 거잖아.]

혼자 방을 쓰라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이런 마음이 문득 드는 것은 왜일까.

나는 얼른 엄마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부비부비.

“성국아, 엄마랑 자고 싶어?”

“네!”

다섯 살이 된 내 발음도 제법 정확해졌다.

“그럼, 우리 네 식구 다 같이 잘까?”

[그건 좀 별로인데. 민국이 녀석 세 살인데 이제 독립해도 되지.]

아빠가 얼른 나를 안아 들었다.

“성국아, 넌 이제 다섯 살이야. 유치원도 가는데, 방 혼자 써야지.”

[싫다고!]

나는 발버둥을 쳤다.

“자기야, 성국이 마음의 준비 될 때까지 다 같이 자자.”

“어쩔 수 없네.”

아빠는 그제야 나를 바닥에 내려놨다.

나는 다시 뒷짐을 지고 아파트 이곳저곳을 살폈다.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종종 삼전 건설 현장에 가서 이것저것 살피며 기자들에게 과시용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단가에 맞춰 싸구려 자재를 쓰는 거야 이 업계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나마 삼전 건설이 조금은 낫긴 했다.

나는 부엌 옆에 놓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오가는 현관 바로 옆의 방보다는 이곳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슬슬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보여줄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아, 이 방 마음에 들어?”

“네! 나, 이 방.”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아까는 혼자 자기 싫다며?”

[잠은 혼자 안 자고, 공부만 여기서 할 거야.]

나는 아빠에게 텅 빈 벽면을 가리켰다.

“아빠!”

“왜, 성국아?”

“책땅.”

“책상 사달라고?”

“응!”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드디어 내일이면 이사다.

수유에서 잠실로.

투 룸에서 34평 아파트로.

내 인생도 한 단계 점프하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왠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삼전 그룹의 부회장 자리에 있을 때에는 주로 실적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집이나 차 같은 하찮은 것은 내 고민꺼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는 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나는 엄마 품으로 파고 들어가려다 그만 민국이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말았다.

[하아, 경쟁자 녀석.]

경쟁자 녀석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랐다.

거기다 몸무게도 엄청 늘었다.

여전히 나보다 작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성국아, 잠이 안 와?”

엄마가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엄마도 잠이 안 와.”

“아빠도 잠 안 온다, 성국아.”

뒤에서 아빠도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모두들 내일 이사로 인한 설렘으로 잠을 못 자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 없는 거 티 나게 왜들 그래. 다들 그깟 아파트가 뭐라고.]

하지만 내 입도 이미 싱글벙글이었다.

아빠는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돈으로 새 가구 중에 내 책상을 가장 먼저 사주셨다.

이사에 맞춰 배달도 부탁했다.

물론 내가 썼던 그 어느 책상보다 싸구려였지만, 앉아서 공부할 책상이 생긴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구석에 놓인 가방을 들고 왔다.

“자기야, 또 확인하게?”

“응. 잠도 안 오는데 마지막으로 확인하게.”

아빠가 들고 앉은 것은 통장이 든 작은 가방이었다.

가방을 열자 묵직한 통장 꾸러미가 나왔다.

“이건 생활비 통장. 이건 적금. 이건 청약 부금. 소영아, 청약 부금은 이제 집 생겼으니 없앨까?”

“그냥 두자. 미영 언니 말로는 청약 통장은 그냥 두는 거래. 이 집에서 더 넓혀갈 수도 있잖아.”

[역시 엄마!]

나는 엄마의 등을 토닥, 토닥 두 번 두드렸다.

잘했다는 의미였다.

“자기야, 내가 요즘에 성국이 가만히 관찰하니까, 이 녀석이 지 마음에 들면 손으로 두 번, 마음에 안 들면 세 번, 이렇게 두드리는 거야.”

[눈치챈 거야?]

“성국이 저 녀석 정말 보통이 아니라니까.”

아빠는 미소를 지으며 통장을 내 눈앞에 들어 보였다.

“성국아, 이거 기억나?”

끄덕.

[엄마, 아빠가 준 내 생애 최초의 선물이잖아.]

내가 번 돈 모두를 내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 엄마, 아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얼마라도 빼 쓸 만도 한데, 내가 번 돈 모두를 통장에 저금했다.

삼전 전자의 모델료뿐 아니라 사이사이 찍은 단발성 광고와 지면 광고 등으로 이미 내 통장에는 3억이 넘는 돈이 들어와 있었다.

거기다 삼전 전자의 주식까지.

[밥 안 먹어도 배부른 게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괜히 푹신한 이불 위로 앞구르기를 하며 재롱을 부렸다.

“성국아, 그렇게 좋아?”

옜다, 기분이다.

나는 팔을 쭉 뻗어 머리 위에 올리고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엄마, 아빠. 따랑해요.”

그동안 내가 번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잘 모아준 엄마, 아빠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리고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이기도 했다.

이제 전성국 인생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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