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25화 (25/231)

제25화

잠실에 위치한 34평 아파트.

전체 23층 중 흔히 로열층이라고 불리는 12층.

작은 용달이 그 아파트의 입구에 멈춰 섰다.

여기저기 곤돌라를 이용해 이사하는 집들이 보였지만, 우리 집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입던 옷과 식기, 내가 보던 책 빼고는 가져올 게 아무것도 없었다.

뒤따라온 김미영도 차에서 내렸다.

나는 민국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세 살이 되더니 다리에 힘이 솟은 민국이는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바람에 제어가 좀 불가능했다.

이런 날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면 안 되지.

[가만있어.]

“혀엉!”

[가만있으라고 형이 그랬다.]

“으응.”

민국이는 입을 살짝 내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전태국과 달리 인성은 올발랐다. 형인 내 말도 잘 들었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내가 길들여볼 만할 것 같았다.

김미영이 다가오더니 내 손을 스윽 잡았다.

“제가 성국이랑 민국이 보고 있을게요.”

엄마는 미안한 얼굴로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밀었다.

“언니, 성국이가 요즘 그림책이나 동화책에 관심 많거든요. 근처 서점 가서 책 좀 사주시고, 점심 맛있는 거 드세요. 매번 이렇게 신세 져서 너무 죄송해요.”

“우리는 파트너잖아요.”

“파트너인데, 제가 항상 더 도움 받는 거 같거든요.”

“나야말로 성국이 덕분에 새 직장 생긴 건데요. 그리고 나 성국이 매니저잖아요. 이게 일이죠. 암튼, 성국이랑 민국이, 이사할 동안 제가 볼게요.”

김미영은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내민 돈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그림책 보러 갈까?”

“조아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요즘이야 다섯 살 아이가 한글을 읽는 게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이 당시만 해도 한글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떼는 거였다.

솔직히 내가 영어, 일어에 프랑스어 그리고 중국어까지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아직 오픈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었다.

* * *

민국이는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지쳐서 유모차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나는 민국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팍 내쉬었다.

[짜식. 공부 머리는 없는 거 같네. 너 대체 커서 뭐 먹고 살래? 없는 집 애가 머리라도 좋아야지. 쯧쯧.]

나는 뒷짐을 진 채 어슬렁어슬렁 경제 코너로 걸어갔다.

내가 공부한 대학의 도서관에 비하면 어림없는 장서 양이었지만, 이런 것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서민의 삶이라는 게 5년 동안 내가 배우고 습득한 거였다.

나는 괜히 옆구리에 재미없어 보이는 동화책은 눈속임용으로 낀 채였다.

어슬렁. 어슬렁.

95년의 경제서들은 서울대를 나오고 미국에서 MBA를 딴 내가 보기엔 코웃음만 나는 수준이었다.

[2년 후에 IMF 온다고 예측하는 책들은 하나도 없네. 쯧쯧.]

나는 책 몇 권을 훑어보다 서민들 선동하는 단어들이나 나열한 책들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때, 뒤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바로 김 매니저 김미영의 발걸음 소리였다.

설마, 내가 책 읽은 것을 알았을까.

순간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어쩌면 커밍아웃할 시점인지도 몰랐다.

다섯 살 아이가 한글을 안다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성국아, 책 읽어?”

“녜에!”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눈여겨본 경제학 서적 몇 권을 김미영에게 내밀었다. 고르고 보니 김미영이 의심할 만한 책이기도 했다.

“성국아, 이거 네가 읽을 거야?”

“사두세요.”

“<맨큐의 경제학>이랑 <자본론>을?”

나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거 옛날에 다 읽은 거야. 그래도 요즘 나오는 헛소리하는 경제 서적보다는 고전이 낫잖아, 김 매니저.]

“진짜, 읽을 거야?”

김미영은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다.

나는 일부러 어눌한 발음으로 두 책의 제목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어쩔 수 없이 커밍아웃해야겠네.]

“맨큐의 경데학. 자봉론. 사두세요.”

“성국아….”

김미영은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그럼 대본 그렇게 쉽게 이해하는 게, 뭐 다 김 매니저가 설명 잘해서인 줄 알아? 나 태어날 때부터 5개 국어 한 남자야. 왜 이래.]

김미영은 잠시 멍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근처에 있던 책 하나를 집어서 내 눈앞에 내밀었다.

딱 봐도 아무거나 집은 게 티가 났다.

“성국아, 이거 읽어봐.”

나는 애써 천천히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갔다.

“우. 리. 집. 을. 지. 키. 는. 경. 제.”

“성국아, 너 한글 읽을 줄 알아?”

[한글뿐 아니라니까.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아참, 독일어도 있지. 거기다 한국어까지 하니 6개 국어네. 나 그런 남자야.]

“알았어, 성국아. 이 책 다 사줄게. 또 보고 싶은 책 없어?”

[에라, 모르겠다.]

나는 <국부론>까지 집어 들었다.

[고전은 영원한 거잖아? 김 매니저.]

* * *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했다.

막 땀에 젖은 티셔츠 차림으로 나온 아빠가 얼른 나와 민국이의 손을 잡았다.

“매니저님, 감사해요. 저녁 같이 먹어요.”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김미영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이따가요.”

“네.”

아빠는 얼른 대답을 하고는 내 눈을 손으로 가리는 시늉을 했다.

“성국아, 눈 꼭 감아야 해.”

[하아. 이런 거에도 장단을 맞춰 줘야겠지? 민국아, 눈 감아.]

나는 민국이 눈도 손으로 가렸다.

아빠는 곧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성국아, 민국아. 새집 소개할게.”

“자, 여기가 우리가 새로 살 집이야!”

[이미 봤지만, 손뼉 좀 쳐주고 어깨춤도 쳐줄게.]

나는 얼른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매우 신이 난 얼굴로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와- 우와-.”

어린애들처럼 감탄사도 연발했다.

“아빠. 징짜 우리 집이야?”

“어, 성국아. 네 방도 가보자.”

나는 아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가 찍어놓은 방으로 달려갔다.

역시 예상대로 책상이 놓여 있었다. 옆으로는 싱글 침대도 놓여 있었지만, 그건 가볍게 무시했다. 난 아직 엄마 품이 좋았다.

나는 얼른 책상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낮네.”

아빠는 얼른 의자를 올려줬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의자를 좀 더 앞으로 끌었다.

[이 정도면 뭐, 공부할 만은 하네.]

아빠는 책상에 일체형으로 달린 조명도 탁 켰다.

“성국아, 어때? 멋지지?”

[하아, 아빠. 난 이런 조명보다 루이 폴첸이나 비스타에서 나온 조명을 좀 좋아했어.]

그래도 우선 손뼉은 쳐댔다.

짝. 짝. 짝.

김미영이 뒤에서 오더니 서점에서 산 두툼한 책 세 권을 책꽂이에 끼웠다.

“성국이가 오늘 고른 책들이에요.”

아빠는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책들을 보다가 놀라 김미영을 쳐다봤다.

“김 매니저님, 이 책들을 성국이가 다 골랐다고요?”

“네. 사실 아까 드릴 말씀 있다는 게 그거였어요. 성국이가 이미 한글을 알더라고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영어랑 제3 외국어 해서 3개 국어 정도는 하는 게 기본 아니겠어?]

나는 턱을 한껏 치켜세웠다.

“설마, 진짜 이게 다 성국이가 읽고 싶다고 한 책이에요?”

“저도 안 믿기는데요. 성국이가 다 읽겠다고 집었어요.”

“뭘 모르고 집은 거겠죠.”

[아빠. 애들은 뭘 모르고 집어도 맨큐의 경제학을 집진 않아. 그림책을 집지.]

엄마가 들어와서는 두 사람을 보더니 내 앞에 놓인 책들을 훑어봤다.

“성국이가 고른 거죠?”

엄마는 너무 태연하게 김미영에게 물었다.

오히려 놀란 건 김미영이었다.

“그걸 어떻게….”

“성국이가 맨날 뉴스 보잖아요. 저도 어렴풋이 성국이가 경제 쪽에 관심 많다는 건 알았거든요. 뉴스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거 들어보면 한글도 대충 알더라고요. 앵커가 하는 말이 아니라 밑에 자막 보고 읽곤 했거든요.”

[어라, 엄마?]

나는 엄마를 다시 봤다.

요즘 매니지먼트 일 때문에 바빠서 얼굴 볼 시간도 없었는데, 역시 엄마는 달랐다.

“소영아, 그럼 넌 성국이가 한글 아는 거 알았어?”

“대강. 촬영 콘티 같은 거나 대본보고 혼자 알아서 할 때가 많았거든. 처음엔 나도 그냥 우리가 이야기한 거 듣고 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한글을 아는 것 같더라고. 대기실에 여러 대기자들 이름 적혀 있는데, 자기 이름 적힌 대기실에 곧바로 들어가곤 했거든.”

“그걸 왜 말 안 했어?”

“성국이도 특별 대우 받는 거 원하는 거 같지 않고 해서. 그리고 사실… 우리한테서 이렇게 특별한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나도 예상치 못했어, 자기야.”

[이제 드디어 나의 가치를 알아본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이 녀석, 지 얘기하는 줄 알고 좋단다. 성국아, 짜장면 먹고 아빠랑 심도 깊은 이야기 좀 하자.”

[짜장면은 좋은데, 심도 깊은 얘기. 그건 사양할게, 아빠.]

나는 손을 저었다.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아빠 아들인 거 잊으면 안 돼!”

아빠는 애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벼대며 배를 뒤집어서 공기 방구를 놨다.

[하아, 평범한 삶이란. 전재형 부회장이 나의 이 특별함을 알았다면 벌써 세계적인 석학과 나의 미래에 대해서 논의했을 것인데.]

지금의 아빠처럼 나를 안고 볼을 비비거나, 괜히 배에 공기 방구를 놓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들려서 까르르 웃어재꼈다.

* * *

졸린 민국이가 스멀스멀 엄마 곁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는 엄마 곁에 딱 붙어서 민국이를 한 발로 쭉 밀었다.

[전민국. 너도 이제 세 살이니까 독립해야지.]

그런데 이상하게 민국이는 내 허리를 잡더니 이마를 콕 박았다.

“혀엉.”

[너 설마 나랑 같이 자려고 그런 거야?]

“헤.”

민국이는 졸린 얼굴로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못생긴 게.]

“혀엉. 코 자. 가티.”

[뭐지? 나랑 자자고?]

“혀엉. 조아. 헤.”

이 녀석 한마디에 왜 가슴이 몽글몽글하지?

엄마가 나와 민국이를 보더니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성국아, 민국이가 형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좀 모자란 경쟁자 녀석일 뿐이야, 엄마.]

“성국아, 만약 엄마가 어디가 아파도 민국이라 잘 지내야 해?”

뭐지?

엄마가 어디 아픈가.

그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더니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엄. 마. 아프지 마. 흐어엉! 흐어엉!”

막 샤워를 마친 아빠가 놀라 뛰어 들어왔다.

“성국아, 왜 울어?”

“자기야, 내가 그냥 성국이한테 혹시 내가 아프면 민국이랑 잘 지내야 한다고 했더니 막 우네.”

“소영아, 애한테 그런 장난을 치면 어떡해.”

“흑. 흑. 흑.”

나는 훌쩍이며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지금 나한테 장난친 거야? 근데 나, 순진하게 속은 거야? 이 철없는 엄마, 아빠야!]

“으아앙!”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철없는 엄마, 아빠가 내 곁에 없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저번 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성국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 건강해. 걱정하지 마.”

[다시는 그런 말 하지도 마, 엄마. 엄마가 아파도 내가 돈 벌어서 다 고쳐줄 거니까, 걱정도 말고!]

나는 눈물을 겨우 훔쳤다.

“소영아, 너도 참.”

“그냥… 나도 엄마, 아빠가 되니까 우리 버린 엄마, 아빠가 조금 이해도 돼. 자신들이 못 키우니까, 우리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란 거였을 거잖아.”

나는 엄마의 뱃살에 폭 안겼다.

“참, 내일 성국이 촬영 아니야?”

“그러고 보니 내일이 삼전 전자 마지막 카탈로그 촬영이네.”

“어디서 한다고 했지?”

“삼풍백화점에 삼전 전자 코너에서 찍는다고 했어.”

[잠깐만, 엄마 지금 삼풍백화점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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