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전재형 부회장은 뻐근한 목을 돌렸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됐나….”
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똑. 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양 비서가 들어왔다.
“부회장님, 퇴근하셔야죠.”
“참, 내일 삼전 전자 마지막 촬영인가?”
“그것도 기억하세요?”
“성국이란 아이 덕분에 삼전 전자가 완전히 이미지 바꾸는 데 성공했으니 기억하지. 한결 친근한 이미지로 돌아섰고, 매출도 럭키 제품을 처음으로 이겼고.”
“그렇죠. 작년에 야구에서 럭키에게 우승 뺏긴 값을 단단히 했습니다.”
전재형 부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야 플레이오프도 진출 못 했는데, 우승을 뺏겼다고는 할 수 없지.”
그래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전재형 부회장만큼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삼전 그룹은 기대에 매번 못 미쳤다.
“나도 내일 촬영에 가볼까 하는데…. 어디서 하지?”
“삼풍백화점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팬 사인회 행사도 이어지고요.”
“성국이랑 ‘저스트’ 그리고 선미가 나오는 건가?”
“네, 삼전 전자 전속 모델들 총출동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성국이의 마지막 촬영이라서요.”
“시간 참 빠르네.”
전재형 부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은 빠른데 전주신 회장은 여전히 건재했고, 동생이란 놈은 호시탐탐 전재형 부회장의 실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 비서가 전재형 부회장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부회장님, 이번 삼전 전자가 크게 이미지 바꾼 것을 계기로 회장님께서 무척 흡족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난 이제 반도체를 좀 키우고 싶은데, 아버지가 너무 고리타분하셔서….”
“걱정 마십시오. 전주신 회장님도 분명히 삼전 전자의 이번 성공을 부회장님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여기시고 다음 행보에도 힘을 실어주실 겁니다.”
전재형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 비서는 전주신 회장도 곁에서 모신 적이 있고, 지금도 양 비서를 통해서 전재형 부회장의 모든 게 보고됐다.
어쩌면 전재형 부회장보다 전주신 회장을 잘 아는 이도 없었다.
“참, 내일 내가 방문하는 건 비밀로 해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말은 성국이를 비롯한 삼전 전자 전속 모델에게는 비밀이지만, 유력 언론사 몇 개에는 비밀이 아니라는 말과 같았다.
삼전 전자 부회장의 깜짝 방문으로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고, 홍보를 위한 수단이었다.
* * *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이 말이 다섯 살 인생 처음 온몸으로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숨도 정말 자지 못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잠들지 않았다.
졸음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삼풍백화점이라니!
그것도 오늘은 정확히 1995년 6월 29일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삼풍백화점 인근의 아파트에 삼전 그룹의 임원들이 꽤 살았다.
무사한 이들도 있었지만, 가족을 잃은 이들도 많았다.
이 일로 한동안 삼전 그룹도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다.
부스럭부스럭. 아빠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아직 수유리에 있는 <원아저씨 보쌈>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사 후에 근처 상권을 파악하고 가게를 알아보는 중이라 지금은 먼 <원아저씨 보쌈>까지 출퇴근을 하는 중이었다.
아빠는 부스스 눈을 뜨더니 나와 민국이에게 입을 맞췄다.
[아빠, 입 냄새 나.]
그러나 난 눈을 뜨지 않았다.
곧이어 아빠가 씻는 소리가 들렸고, 엄마도 일어나서 나와 민국이에게 입을 맞추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가 아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영아, 오늘 성국이 일은 언제쯤 끝나?”
“낮에 카탈로그 촬영하고, 팬 사인회도 한대. 그거 끝나고 삼풍백화점에 맛있는 집 있다고 선미 씨가 예약했다고 거기 가서 저녁 먹고 끝날 거 같아.”
[맙소사!]
이건 뭐 빼도 박도 못 하는 죽음의 스케줄 표였다.
“성국이도 이제 진짜 모델 일은 끝이네. 성국이 유치원은 알아봤어?”
“중간에 옮기는 거라 어렵긴 한데, 지금 대기 한 군데 걸어뒀어. 미영 언니 친구가 이 동네 살아서 좋은 유치원 추천해줬어.”
“김 매니저님은 진짜 은인이야.”
“자기야, 이제는 김 대표님이라고 불러야지. 나는 김 대표님 회사의 직원이고.”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SKJ 기획은 나와 임선미를 주축으로 돌아가는 어엿한 사무실이 됐다.
김미영도 원룸 건물을 정리하고 이쪽으로 집을 옮기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더불어 SKJ 기획 사무실도 접근성이 좋은 강남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쉬는 날에 나도 돌아다니면서 이 동네 상권 빨리 알아봐야겠어. 아파트도 많고 해서, 배달 위주로 하는 보쌈집이면 가게가 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빠는 나름 장사에서만은 선구안을 가진 것 같았다.
[그래, 앞으로는 배달이 대세지. 나도 저번 생에서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치킨 배달시켜 먹었다고. 하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내가 지난 5년 동안 얼마나 뼈 빠지게 살아왔는데, 오늘 죽는 건가….]
내가 뒤척이자, 잠에서 깬 민국이가 내 얼굴을 슬쩍 손으로 쓰다듬었다.
“형아. 아띰. 형아, 아띰.”
내가 눈을 뜨자 민국이는 기뻐서 내 얼굴에 뽀뽀를 해대며 침을 발라댔다.
[이러지 마. 정든다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 *
김미영이 운전하는 차도 최근에 새로 뽑은 95년식 국산 지프차였다.
승차감이 훌륭하진 않았지만, 이전에 타고 다니던 경차에 비해서는 공간도 여유로웠고 안정적이었다.
나는 카시트에 앉아서 눈살을 찌푸렸다.
김미영이 백미러로 나를 살폈다.
“성국이 엄마, 성국이 오늘 컨디션이 영 별로인 것 같은데요.”
“저도 걱정이에요. 아침에 잠깐 샤워하고 나와 보니까 애가 영 이상해서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잠시 고민했어요.”
“걱정이네요. 카탈로그 촬영 끝나고 5시부터 팬 사인회도 있는데.”
나는 차에 달린 시계를 봤다.
오후 2시.
내 기억으로는 삼풍백화점은 저녁 시간에 가까워져서 무너진다.
저녁 준비를 위해 장을 보러 온 주부들이 많이 희생됐단 뉴스가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하다.
덜컹.
차가 거친 노면 위를 지나갔다.
때마침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 삼풍백화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미영이 운전하는 차가 삼풍백화점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덜컹.
주차장 방지턱을 넘어가던 김미영의 차가 다시 한 번 덜컹거렸다.
그래, 이때다!
“우우욱-.”
“성국아, 왜 그래?”
나는 그대로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우우욱- 우우욱- 우우욱-.”
새 차를 산 김미영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3시간 후에는 나에게 고마워할 게 분명하다.
엄마는 얼른 휴지로 내가 토한 것을 닦으며 문을 열었다.
“언니,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먹은 거 토해야겠어요.”
“아무래도 병원 가야 할 것 같으니까, 토하고 어서 나와요. 여기서 차 대기시켜 놓고 있을게요.”
“네, 언니.”
엄마는 나를 안고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엄마의 긴박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성국아, 어디가 아픈 거야.”
[엄마, 나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근데… 화장실 말고 병원을 가야 하는데….]
한숨도 못 자서 잠은 쏟아졌고, 속은 뒤집어졌다.
거기다 힘을 꽉 주고 있는 항문도 곧 활짝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저귀는 이미 뗐는데….]
엄마가 얼른 나를 안고 삼풍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전재형 부회장이 양 비서를 비롯한 임원들과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전재형 부회장까지 있잖아. 오늘 잘못하면 다 저세상에서 만나겠네…. 그건 좀 곤란한데….]
전재형 부회장은 엄마와 나를 단번에 알아봤다.
“양 비서, 성국이 아닌가?”
“그러게요. 어디가 아픈 거 같은데요.”
“한번 살펴보고 오게.”
“네, 부회장님.”
양 비서는 얼른 엄마에게 달려왔다.
“성국이 어머님, 괜찮으세요?”
“성국이가 이상해요, 양 비서님.”
“우우욱-.”
나는 잘 닦인 백화점 복도에 토를 조금 했다.
그리고 꾹 참았던 항문도 개방해 버렸다.
뿌직- 뿌직- 뿌직-.
“어머머, 성국아.”
엄마는 사색이 된 채 나를 안고 흔들었다.
대충 음식을 게워냈고, 장도 비웠다.
한숨도 잠을 못 잔 덕분에 내 눈은 스르르 감겼다.
귓가에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전재형 부회장의 목소리였다.
“오늘 카탈로그 촬영이랑 팬 사인회 취소해요.”
“부회장님, 성국이만 빼고 진행하시죠.”
임원진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어차피 ‘저스트’는 일정이 바뀌어서 카탈로그 촬영만 예정된 상태라서요. 임선미 씨와 성국이 촬영과 팬 사인회인데,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양 비서가 의견을 내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어머니, 우선 성국이 대충 씻겨 나오세요. 삼전 병원으로 저랑 가시죠. 바로 진료 볼 수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엄마는 얼른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 등을 두드렸다.
나는 겨우 의식을 부여잡고 마지막까지 속과 장을 비웠다.
아랫도리가 시원해졌다.
양 비서 아저씨가 급히 준비한 타월을 몸에 두르자 나는 그대로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 * *
[이건 김미영 차의 승차감이 아닌데….]
간간이 들리는 목소리.
바로 전재형 부회장과 양 비서의 목소리였다.
“부회장님, 소아과에 전화했습니다. 바로 진료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오늘 저희 때문에 스케줄이 꼬여서 어떡하죠.”
“걱정 마세요. 저도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 아픈 것만큼 걱정스러운 일도 없더라고요. 우선 성국이부터 돌보고 다음 스케줄을 잡아보죠. 아이가 이렇게 아픈데, 일시키는 건 아니죠.”
전재형 부회장의 말이었다.
[아버지가 우리가 아픈 거에 관심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전재형 부회장의 차가 멈춰 섰다.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던 경호 요원들이 나와 엄마를 급히 소아과로 안내했다.
* * *
전재형 부회장은 잠시 차에서 대기했다.
조수석에 앉은 양 비서가 뒤를 돌아봤다.
“부회장님, 저희는 다시 삼풍백화점으로 갈까요?”
“‘저스트’는 카탈로그 촬영만 하는 거지?”
“네, 임선미 씨도 자택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럼, 성국이 상황만 지켜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우리 모델이 갑자기 아픈 것도 영 마음에 걸리고, 혹 아이가 지금보다 상태가 더 나빠지면 삼전 전자 이미지랑도 직결될 거 아닌가.”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우선 삼전 병원 의사들이야 국내 최고들이니 믿어보시고, 차에서 대기하시겠습니까?”
그러기엔 냄새가 심하게 났다.
“나가서 맑은 공기 좀 쐬지.”
“네, 부회장님.”
전재형 부회장은 차에서 내려 삼전 병원의 정원으로 향했다.
경호원들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조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오랜만에 병원 정원 산책하는 것 같네.”
“전주신 회장님이 쓰러지셨을 때 오시고 처음이시죠?”
“응.”
전재형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초 전주신 회장이 잠시 쓰러져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주가도 떨어지고, 후계 구도 문제도 또다시 불거졌다.
그 이후로 전주신 회장은 자신이 갑자기 죽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상속 문제를 은밀하게 해결하고 있단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삼전 전자의 이미지 변신으로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하게 만든 게 전재형 부회장이었지만, 만약 성국이가 잘못되기라도 해서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다면 삼전 그룹 왕좌의 자리는 누가 차지할지 몰랐다.
전주신 회장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