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오는 동안 깜빡 졸아서인지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저번 생에서 내 어린 시절 주치의였던 인상 좋은 서병관 소아과 원장이 나를 진료하고 있었다.
서병관 원장은 인상을 좀 쓰더니 엄마를 바라봤다.
“어머니, 뭐 잘못 먹이셨어요?”
“평소대로 아침에 밥 먹이고, 간식으로 바나나 먹었어요. 흰 우유랑요. 이거 먹고 탈 난 적은 없거든요.”
서병관 원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성국이한테 매운 김치 같은 거 먹이셨어요?”
엄마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김치 언제 먹었어?”
“띰치. 마싰어.”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삼풍백화점 화장실에 위와 장에 있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전재형 부회장의 고급 세단에서 잠을 푹 잤더니 어느새 몸이 회복되고 있었다.
서병관 원장이 내 볼을 꼬집었다.
“이 녀석, 엄마 안 보는 사이에 몰래 집어 먹었구나.”
히죽.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한시름 놓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선생님, 이제 괜찮은 건가요?”
“아직 매운 것에 적응 안 된 아이들이 잘못 집어 먹고 탈 나는 경우 많아요. 근데 이 녀석, 대체 김치를 얼마나 먹은 거야?”
서병관 원장은 혀를 내둘렀다.
엄마가 촬영 준비물을 챙기느라 바쁜 틈을 타서 나는 냉장고를 열고, 아빠네 보쌈집에서 파는 보쌈김치를 입안에 우겨넣었다.
솔직히 얼마나 먹었는지 기억도 없다.
최대한 많이 먹는 게 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범죄를 위해 손 닦고 베이비 로션까지 바르고 나는 태연하게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선생님, 정말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김치 매워서 평소에 줘도 다 물에 씻어서 주거든요.”
“이 녀석도 놀라서 당분간은 김치 근처에는 가지도 않을 거예요. 그래도 오늘 몸 상태는 안 좋으니 수액 하나 맞고 가세요. 약도 처방해 드릴게요. 3일 후쯤 다시 오시죠. 예약 잡아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엄마는 나를 안고 수액을 맞으러 이동했다.
간호사 한 명이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얘가 그 유명한 성국이 맞죠?”
“네.”
“애가 어쩜 그렇게 이쁜가 했더니, 어머니가 완전 미인이세요. 정말 이런 아들 둬서 너무 좋으시겠어요.”
“평소에는 말도 잘 듣는 녀석인데, 오늘따라 왜 안 먹던 김치를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성국이는 그래도 김치 먹은 거죠. 먹으면 안 되는 거 먹고 오는 애들 진짜 많아요. 부모님들이 아무리 잘 봐도 애들은 정말 순식간에 사고 치잖아요.”
“그러게요. 앞으로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때였다.
병원에 동시다발적으로 삐삐 알림음이 울렸다.
삐삐- 삐삐- 삐삐- 삐삐- 삐삐-.
“어머, 무슨 일이지?”
간호사도 놀란 눈치였다.
엄마가 가지고 다니는 삐삐도 울렸다.
“아빠가 연락했네.”
뒤늦게 도착한 김미영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언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삼풍백화점이요. 삼풍백화점이….”
김미영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언니, 삼풍백화점이 왜요?”
“…무너졌어요.”
“네에?!”
엄마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 로비에 있던 커다란 TV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긴급 뉴스가 흘러나왔다.
엄마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를 안은 채 병원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성국이 엄마… 성국이 엄마, 괜찮아요?”
“언니…. 성국이가 우리를 살렸어요.”
* * *
삼전 병원 정원을 산책하던 전재형 부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양 비서도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부회장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나도 막 들었네. 남아 있던 임원들은?”
“삼풍백화점 임직원들이 붕괴 전에 미리 연락을 해서 다 피했다고 합니다. 삼풍백화점 근처 아파트에 저희 회사 임직원들이 워낙 많이 살아서 가족들 피해가 예상됩니다.”
“회사로 가지.”
전재형 부회장은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멈춰 섰다.
“참, 성국이 상태는 나왔나?”
“사고 연락 받기 전에 서병관 원장이 연락 왔습니다. 배탈이 심하게 나서 탈수증세가 있지만, 별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다행이네.”
“부회장님, 진짜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국이를 저희도 2년 동안 봐왔지만, 단 한 번도 촬영에 늦거나 엄살을 피운 적이 없는 아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하필 배탈이 났을까요.”
“…….”
전재형 부회장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성국이라는 아이와 엮이면서 삼전 전자의 이미지도 바뀌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입지마저 탄탄해졌다.
거기다 오늘 일은… 정말 운명이라고밖에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삼풍백화점의 관리 직원들은 미리 알고 대피했고, 자신 역시 그랬겠지만, 그건 오히려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은 성국이 덕분에 사건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기 전에 이미 자리를 떠난 것이다.
전재형 부회장은 양 비서를 돌아봤다.
“우선 그룹 차원에서 삼풍백화점 사건 현장과 피해자들 돕는 데 성금 내고, 다른 지원책 알아보게.”
“네, 부회장님.”
“그리고 말이야. 조금 일이 잠잠해지면 오늘 성국이 일을 좀 이슈화시켜 보면 어떨까 싶은데.”
“그 말씀은?”
양 비서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기 모델이 갑자기 아파서 내 차를 이용해서 삼전 병원으로 직접 향한 일과 이 일로 생명을 구하게 된 일을 이슈화시키면, 삼전 그룹에 이미지에 도움이 될 듯한데, 어떤가?”
“워낙 이번 일이 큰 사건이라 역풍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중들의 반응을 보고 조심스레 움직이게.”
“네, 부회장님.”
전재형 부회장은 차에 올라탔다.
탁.
차 문이 닫히고, 미간에 손가락을 올렸다.
성국이란 아이와 엮이면 뭔가 자신도 알 수 없이 판단을 할 때가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평소 같으면 아이만 보냈을 텐데, 왜 자신까지 병원에 동행한 걸까.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길로 전재형 부회장은 목숨도 구했을 뿐 아니라, 혹여 생길 문제에서도 면죄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 * *
똑. 똑. 똑.
수액이 내 팔에 들어가고 있었다.
삼전 그룹 쪽에서 제공해준 1인 병실에서 나는 팔에 수액을 맞았다.
내 소식을 듣고 아빠와 임선미도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소영아, 나 정말 가게에서 삼풍백화점 무너졌단 소리 듣는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잖아.”
“오빠, 미안. 성국이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다른 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엄마는 아빠의 삐삐를 듣고는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공중전화 줄이 너무 길어서 연락이 닿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사실 제일 놀란 건 임선미였다.
“오늘 정말 이상했어요. 성국이랑 오래 같이 일했는데, 이런 일도 처음이고… 삼전 쪽에서 저 스케줄 취소 안 해줬으면….”
임선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암담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꾸거나, 역사를 바꾸진 못했다.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걱정 마. 엄마, 아빠가 있잖아.”
[하아, 이놈의 부실공사. 엄마, 나 엄마한테 은혜 갚은 거야.]
내가 이 젊은 부부를 처음으로 인정한 날이 떠올랐다.
콩나물을 사러 나를 업고 슈퍼로 가던 길.
엄마는 무너지는 건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 온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오늘은 반대로 내가 위장과 장을 내던졌다.
[아하, 속 쓰려.]
매운 김치 때문에 여전히 속도 엉덩이도 따끔거렸다.
1인실에 마련된 TV에서는 계속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이 나오고 있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 건물의 일부만 남기고 처참하게 붕괴된 삼풍백화점.
그곳에서 연락이 끊긴 가족들을 찾는 사람들의 절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때, 화면에 나온 아나운서의 입에서 기업들과 전국 각지에서 참사 현장 복구를 위한 성금이 도착하고 있단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엄마, 나두.”
“성국아, 뭐라고?”
“나두 저거.”
나는 성금액이 올라가는 TV 화면을 가리켰다.
“성국이 엄마, 성국이가 기부하고 싶나 봐요.”
김미영이 빨리 눈치를 챘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내 곁으로 오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성국아, 내일 아빠가 성국이 이름으로 기부할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삼풍백화점 사고가 나고 닷새가 훌쩍 지났다.
초반 생존자들이 나오고는 더는 진전이 없었다.
전재형 부회장은 조간신문 몇 개를 번갈아 봤다.
처참하게 무너진 잔해에서 기적에 가까운 생존자가 나왔고, 성국이가 삼풍백화점 참사 생존자를 위한 모금에 천만 원을 기부했단 뉴스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날 성국이의 사연도 함께 나왔다.
“전성국 군은 그날 오후에 예정된 삼전 전자 카탈로그 촬영 및 팬 사인회 때문에 삼풍백화점으로 향하는 길에 심한 배탈이 나서 병원으로 향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인기 그룹 ‘저스트’가 스케줄 문제로 팬 사인회는 참석 안 하고 카탈로그만 찍고 간 사연부터 일반인들이 아슬아슬하게 사고를 피한 사연이 줄줄이 이어졌다.
삼풍백화점 관리 직원들이 사고를 미리 알고 피한 사실이 드러난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공분이 일었다.
이제 적절하게 전재형 부회장과 성국이의 이야기를 터트릴 때가 된 타이밍이었다.
전재형 부회장은 곧바로 양 비서를 호출했다.
곧 양 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부회장님, 부르셨습니까?”
“며칠 후 성국이와의 일화를 언론에 풀면 좋을 것 같아서.”
“안 그래도 그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국이네에서 부탁을 하나 해왔습니다.”
“부탁? 무슨 부탁?”
* * *
제2의 유리 젤라라니!
나는 한숨을 팍 내쉬었다.
실종자들을 찾아내지 못하자 무당과 각종 심령술사. 심지어 초능력자로 유명한 유리 젤라의 섭외에 실패하자 어떤 낯선 나라에서 금발의 남자아이가 와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됐다.
“여기 기운이 느껴져요.”
[그건 나도 하겠다, 이것아!]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의 마음은 초조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실종자를 찾지 못하자 이제 실종자 찾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이거 예산 낭비라고요!”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이 들고 나오는 레퍼토리는 뻔했다.
[쯧쯧쯧.]
나는 두고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김미영에게 부탁할 계획을 세웠다.
현재로서는 가장 끗발 있는 상대는 김미영이었다.
김미영이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 날, 그날도 마찬가지로 뉴스에서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실종자도 안 나오나 봐요.”
“찾는 사람들도 지치고, 구호의 손길도 줄어드나 봐요. 일각에서는 어서 사건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요.”
이때, 나는 얼른 김미영의 손을 꽉 잡았다.
“앙 돼요.”
“성국아, 뭐라고?”
“앙 돼요. 절대 앙 돼요.”
“뭔 소리야?”
“사람 있떠. 으아아앙.”
나는 눈물을 터트렸다.
순간 엄마와 김미영이 나를 쳐다봤다.
김미영인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그게 무슨 말이야?”
“부탕. 부탕. 삼전에 부탕. 일. 이. 삼. 사. 오만 뎌!”
“5일만 더?”
“녜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미영은 고심 끝에 삼전 그룹의 양 비서에 전화를 걸었다.
* * *
“성국이가 수색을 딱 5일만 더 해달라고 부탁했다고요?”
“네, 회장님.”
“아이가요?”
“혹시….”
양 비서는 말을 아꼈다.
“양 비서, 삼청동 이 선생에게 전화하지. 나 간다고.”
“네, 알겠습니다.”
전재형 부회장이 삼청동이라고 부르는 곳은 바로 대대로 삼전 그룹에서 점을 봐온 곳이다.
삼전 그룹은 전주신 회장 때부터 특히 임직원을 뽑을 때는 관상과 사주를 봤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헌데, 부회장님.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흠….”
전재형 부회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사실 자신이 궁금한 것은 전성국이라는 아이와의 관계였다.
어떻게 이 아이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시점마다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일들이 왜 삼전 전자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했다.
삼풍백화점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은 우연인지. 이 모든 게 막연히 궁금했다.
“부회장님?”
전재형 부회장이 대답이 없자, 양 비서가 조용히 물었다.
“성국이네 집에 연락해서 성국이 사주도 알아보게. 이번 삼풍백화점 일도 그렇고. 자꾸 그 아이랑 뭔가 연결된 거 같으니까, 이 일을 좀 정리하고 가야 할 것 같고… 아버지의 의중도 좀 알아봐야겠네.”
“네, 부회장님.”
양 비서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부회장실을 나왔다.
전재형은 성국이라는 아이와 엮이는 일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 이상했다. 물론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삼전 전자에 유리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원래 악마는 사탕을 먼저 주지 않던가!
* * *
전재형 부회장은 오래된 한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당에 놓인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이 집의 역사를 알게 해줬다.
일반인들이 이 집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예약을 하고도 1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곳이었다.
돈이나 권력으로도 순서를 바꿀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대한민국에서 삼전 그룹만은 제외였다.
전재형 부회장은 정갈한 한옥의 정원을 지나서 댓돌에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머리를 한 갈래로 곱게 빗은 여인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안채로 안내했다.
점집이라기보다는 고급 요정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전재형 부회장의 방문 때문에 일반 고객들은 모두 취소하거나 돌려보낸 후라 내부는 적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맨 끝에 위치한 방 앞에 다다랐다.
여인이 문을 열자, 인자한 얼굴의 노인이 전재형 부회장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이 사람이 바로 이 선생이었다.
“부회장님, 어서 오시지요.”
전재형 부회장은 이 선생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전재형 부회장이 좋아하는 국화차 향이 방 안에 가득했다.
“차가 딱 적당히 우려졌네요.”
이 선생은 전재형 부회장의 차 뚜껑을 열었다.
“어르신, 제가 부탁드린 사주 한번 보셨습니까?”
“91년 9월 12일 신시생 사주 말이죠?”
“네.”
전재형 부회장은 마시기 딱 좋게 우려진 국화차를 한 입 머금고 음미했다.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전재형 부회장을 쳐다봤다.
“부회장님, 이런 말씀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요. 혹시 숨겨둔 아들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