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삼전 그룹의 재산이 얼마인지, 비자금이 얼마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다섯 살이 아는 척을 해봤자 알아듣는 이도 없을 것이다.
[이럴 땐 짜장면이나 먹어야지.]
나는 있는 힘껏 면발을 빨아 당겼다.
호로록. 호로록. 호로록.
엄마가 당황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저희가 그 큰 것을 받아도 될지….”
“부회장님, 좋은 제안 너무 감사드립니다. 성국이 아버님이랑도 상의해봐야 하니 양 비서님 통해서 자세한 제안 주시면, 저희가 고민해보고 답 드려도 될까요?”
김미영 매니저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역시 이런 일은 제3자의 눈으로 볼 때 더 정확했다.
전재형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아버님이랑 당연히 상의해 보셔야죠. 제가 식사도 못 하시게 했네요. 그럼, 이제 편하게 식사하시죠. 성국이는 이미 잘 먹는 것 같지만요.”
“따땅면. 마시떠요.”
나는 엄지까지 치켜세웠다.
전재형 부회장은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의 의미는 뭐지?]
그때, 양 비서가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양 비서가 조용히 구석에서 전화를 받더니 황급히 전재형 부회장에게 다가와 뭐라 속삭였다.
전재형 부회장은 최대한 표정을 숨긴 채 급히 인사를 했다.
“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성국 군 일은 양 비서 통해서 알려 주시고요, 다음에 다시 저녁 식사 자리 한번 만들겠습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전재형 부회장은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룸을 빠져나갔다.
[오늘이 그날인가?]
바로 전주신 회장이 쓰러진 날.
내가 죽던 날, 심장이 찢어지게 아파오던 그날.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여름 오후에 늘 그렇듯 아끼는 정원수에 물을 한가득 주시고는 거실에 들어와서 잠시 낮잠을 주무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영원히.
아마 나의 사인과 같은 심근경색이었을 것이다.
순간, 짜장면이 맛이 없어졌다.
나는 포크를 놓고 냅킨을 찾아 입가를 닦았다.
“성국아, 더 안 먹어?”
엄마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엄마!”
“왜, 성국아?”
“조올려.”
“그래, 엄마랑 매니저님이랑 이것만 먹고 우리도 집에 어서 가자.”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배가 불러서인지, 촬영의 긴장이 이제야 풀리는 건지, 나도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졌다.
* * *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쉬야를 하고는 능숙하게 TV를 켰다.
이젠 누가 켜주지 않아도 TV 정도는 쉽게 끄고 켤 수 있었다.
뉴스에서는 당연히 삼전 그룹 전주신 회장이 별세했다며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었다.
모든 뉴스에서 전주신 회장의 별세로 마치 대한민국 경제가 흔들릴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삼전 그룹 회장 죽었다고 대한민국 경제 안 망해.]
뉴스 화면에는 굳은 얼굴의 전재형 부회장과 남동생의 얼굴이 연이어 비쳤다.
전주신 회장의 유언대로 전재형 부회장이 그룹의 총수 자리를 맡게 된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정재계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엄마가 다가오더니, 내 입에 바나나를 밀어 넣었다.
“성국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야?”
“아저띠!”
나는 TV에 나온 전재형 부회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 아저씨 아버지가 오늘 하늘나라로 떠나셨대. 정말, 삼전 그룹 어쩌니.”
[엄마, 엄마는 SKJ 기획과 우리 가족 걱정이나 해. 재벌 걱정은 하는 게 아니야.]
진짜 대한민국 사람들은 좀 특이했다.
집집마다 삼전 전자 가전제품 하나 정도는 있고, 건너 아는 누군가 한 명은 삼전 그룹에 다녔다.
그래서 마치 삼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걱정하기도, 질타하기도 했다.
“엄마, 밥!”
“참, 성국아. 오늘 아빠 가게 구경 가자. 아빠가 이따가 너랑 민국이 다 데리고 구경 오라고 했어.”
“좋아!”
나는 엉덩이를 슬쩍 씰룩여줬다.
엄마가 웃으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성국이 때문에 엄마가 웃어.”
[당연하지!]
진짜 이번 생에서는 생존 스킬만 만렙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 * *
“흠….”
나는 뒷짐을 진 채 아빠 가게를 올려다봤다.
막 아저씨들이 간판을 붙이고 있었다.
“성국아, 민국아. 아빠 가게야.”
“원아저띠 보쌈. 잠실점.”
나는 간판을 또박또박 읽었다.
이제 내가 글을 스스로 깨친 것에 대해서 가족들은 무난히 받아들였다.
이게 나, 전성국이라서 가능한 일인 것을 이들은 알기나 알까.
나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민국이 녀석을 내려다봤다.
[부모님이 널 가르쳐보면 알 거야. 형이 얼마나 천재인지.]
민국이는 뭐가 좋은지 나만 보면 히죽히죽 웃어댔다.
[내가 웃으면 정든다고 웃지 말라고 했지!]
“형, 조아.”
민국이는 내 손을 이미 입안에 넣고 쪽쪽 빨고 있었다.
[엄마, 아빠 바쁘니까 말썽 부리면 안 돼. 형 손가락이나 빨아.]
“응!”
[암튼 대답은 잘해요.]
나는 한 손을 민국이에게 준 채 가게를 살폈다.
10평 정도 되는 작은 사이즈에 주방이 절반 가까이 차지해서 테이블은 네 개밖에 없었다.
아빠는 전에 이야기한 대로 포장 전문 보쌈 가게를 차렸다.
“자, 돼지 머리 왔어요!”
김미영이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돼지 머리를 들고 들어왔다.
[고사 지내나 보구나.]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다행히 촬영장에서 스태프 누나들에게 받은 용돈 몇천 원이 나왔다.
나는 주로 커팅 행사를 했지만, 고사도 종종 지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떡까지 배달 오고 나니, 이제 제법 고사상다운 모습이 완성됐다.
<원아저씨 보쌈>의 수유 본점 대표님까지 오고 나니 작은 가게 안이 꽉 찼다.
“자, 어서 대표 먼저 절해야지!”
수유 본점 대표님의 재촉에 아빠가 쑥스러워하며 앞으로 나가 절을 하고, 잠시 기도하는 모습을 하더니 주머니에서 준비한 흰 봉투를 꺼내 인자한 돼지 입속에 쏙 넣었다.
“자, 이젠 내가 해야지. 정말 원아저씨 보쌈 대박 나게 해주세요!”
수유 본점 대표님도 인사를 하고, 김미영이 나서려는 순간, 내가 손을 확 들었다.
“저요!”
“성국아, 네가 한다고?”
“녜에!”
모두들 웃으며 나를 지켜봤고, 나는 저번 생의 기억을 더듬어서 제법 의젓하게 절도 하고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천 원짜리도 돼지 입에 쏙 넣었다.
그러자 모두 박수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우리 스타는 달라.”
<원아저씨 보쌈> 아저씨가 달려와서 나를 안으려고 해서 몸을 슬쩍 피해 엄마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 엄마 뒤에서 까르르 웃으면서 사람들을 바라봤다.
엄마가 나를 보며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잘했어.”
“엄마….”
[왜 마음이 몰캉거리지?]
이런 거 잘해도 칭찬보다는 비판받는 일이 더 많았다.
항상 뭐가 부족했다며 철의 여인은 지적을 했고, 장난치고 도망가서 숨을 엄마의 뒤는 내 기억 속엔 없었다.
[아빠, 엄마….]
“혀엉?”
민국이가 내 손을 침 범벅인 손으로 꼭 잡았다.
[민국아… 뭐야… 왜 다들 나한테 따뜻한 건데…. 내가 뭐 잘했다고, 이게 뭐라고 다들 웃고 좋아하는 건데!]
나는 순간 울컥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엄마가 나를 안아 들어서는 등을 토닥였다.
“성국아, 우리가 웃어서 놀랐어? 너 놀리는 거 아니고, 다들 너 귀여워서 그래.”
[나도 안다고… 나도 다….]
<원아저씨 보쌈> 수유 본점 사장님도 어느새 곁에 와서 만 원을 내보였다.
“아이고, 이 녀석. 아저씨가 과자 사먹게 용돈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고작 만 원이잖아.]
하지만 나는 손을 뻗어 만 원을 악착같이 잡았다.
[티끌 모아 티끌이 아니라 태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증명해 보이겠어!]
만 원을 잡고 미간을 팍 찡그린 내 얼굴을 본 가게 안의 사람들이 모두 또 웃어재꼈다.
“성국아, 기분 풀렸어?”
“녜에, 엄마!”
엄마가 내 엉덩이를 토닥였다.
* * *
“자기야, 성국이 유치원 어떻게 하지? 근방에 몇 군데 대기 넣어놨는데, 다들 연락이 없네.”
“소영아, 성국이 유치원 보내지 말까?”
쫑긋.
나는 뉴스를 보다가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 좋은 생각이야. 나 유치원 가도 배울 게 하나도 없어. 내가 누차 말하지만, 나 6개 국어 한다고 말했나? 이제 영어도 하고, 중국어랑 일본어도 좀 해볼까? 이러면 곤란한데…. 나 또 영재 발굴 프로, 이런 거에 나가라는 거 아니야? 너무 잘난 것도 힘들군….]
도리도리.
“성국아, 뭔 말을 혼자 중얼거려?”
아빠가 나를 보며 웃었다.
“아빠, 유치원 시로.”
“소영아, 성국이도 유치원 싫다잖아.”
“애가 뭘 알아. 자기가 그러니까 성국이도 덩달아 그러잖아. 유치원 다녀야 사회생활도 배우고, 친구도 생기지. 새 동네라 동네 친구도 없는데….”
“그렇긴 하지. 나도 어릴 적에 유치원 졸업 사진, 집에 걸린 애들 보면서 엄청 부러워했어.”
아빠가 엄마의 등을 도닥였다.
“참, 자기야. 요즘 매출은 어때?”
“입소문 나서 조금씩 오르는 추세야. 배달이랑 포장 위주라 그런지 오히려 전에 가게보다 손님 스트레스도 덜하고, 편한 것 같아.”
“자기야, 나도 우리 성국이 덕분에 돈 벌고, 자기도 보쌈집 사장님이고. 우리 이러다가 재벌 되는 거 아니야?”
엄마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엄마, 재벌은 아무나 되는 줄 알아? 그래도 걱정은 마. 내가 있잖아.]
마침 뉴스에서는 삼전 그룹의 후계 계승이 마무리됐단 소식이 흘러나왔다.
전주신 회장의 유언대로 장남인 전재형 부회장이 정식으로 회장 직함을 달고 출근했고, 남동생인 전재진은 계열사 하나를 가지고 분리 독립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작은아버지, 나중에 저것도 말아먹지. 쯧쯧.]
후계 구도가 정리되면서 전주신 회장 사후 잠시 떨어졌던 삼전 전자 주식도 상승했다.
“소영아, 삼전 주식 또 올랐어. 성국이 이러다가 나중에 우리보다 부자 되겠는데.”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부자는….]
나는 아장아장 걸어서 부엌으로 향했다.
투 룸에서 살다가 34평으로 이사 오니 한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안방에서는 민국이 녀석이 세상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나는 내 책상이 놓인 방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리고 이전에 산 <맨큐의 경제학>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읽어보는군.]
나는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잊고 있었던 기초들을 새삼 기억해냈다.
이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곧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양 비서님, 어쩐 일이세요? 아, 네….”
양 비서라고?
나는 귀를 쫑긋했다.
“성국이 유치원 구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아빠는 의아한 얼굴로 엄마를 쳐다봤다.
“소영아, 양 비서님이 우리 성국이 유치원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으시는데.”
“참, 깜빡했다. 자기야, 나 애를 둘이나 낳고 났더니 완전 깜빡이야.”
“뭘 깜빡한 거야?”
“저번에 성국이 삼전 전자 카탈로그 마지막으로 촬영한 날, 전재형 부회장님이. 아니지, 이제 회장님이지. 아무튼 회장님이 성국이가 삼풍백화점 붕괴 때 자기 목숨 구해준 거나 마찬가지라고 평생 교육 책임지시겠다고 했어. 나중에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모두 다. 그리고 삼전 그룹에 특별 채용도 제안하셨어.”
“그걸 깜빡하면 어떡해!”
“미안. 당신 가게 개업에 정신없었잖아. 그리고 나는 사실 이런 게 진짜 일어나는 일인가 싶어.”
엄마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다.
[엄마, 삼전 그룹 사람들은 한 번 입은 은혜는 수십 배로 갚고, 한 번 입은 원수는 수천 배로 갚아.]
“성국이 유치원까지 혹시 관리해주실 생각이신가. 삼전 그룹이라고 해도 대기를 뚫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 그건 편법이지. 소영아, 만약에 양 비서님이 그렇게 해주신다고 해도 우리 그런 건 하지 말자.”
“당연하지, 자기야. 나도 성국이가 첫 단추부터 편법에 길들여지는 건 싫어.”
[역시 엄마, 아빠가 생각은 바른데 말이야. 엄마, 아빠. 세상은 편법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책을 천천히 넘겼다.
그때 문득 내가 어릴 적 다닌 유치원이 떠올랐다.
삼전 그룹에서 만든 삼전 유치원.
말로는 그룹 내 맞벌이 부부를 위한 유치원이었지만, 그 안에 특별반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나와 같은 후계자 및 정재계 자녀들이 다니는 반이었다.
이 반에 속한 아이들은 특별 교육을 받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잠깐, 그럼 나 유치원 가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