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30화 (30/231)

제30화

양 비서가 개입하자 나의 유치원 입학은 빠르게 진행됐다.

가을 학기부터 입학이 이미 결정 났고, 반도 정해졌다.

A반이라고 양 비서가 말했고, 부모님은 그 의미를 몰랐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A반은 바로 특별반을 의미했다.

내 모든 인맥은 사실 삼전 유치원부터 시작했다.

정재계의 자녀들은 자라서 다시 정재계를 움직였고, 나는 그들의 도움이 언제든 필요했다.

그렇다면 유치원에 집중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리고 슬슬 연예계는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기도 했다.

민국이는 어린이집에 가고, 나는 엄마를 따라 SKJ 기획 사무실에 갔다.

SKJ 기획 사무실은 이제 가로수길에 위치했다.

엄마와 내가 들어서자 김미영 매니저가 시원한 물을 내밀었다.

“많이 덥죠?”

“언니, 저도 운전면허 따야 할 것 같아요. 애들 데리고 다니려면요. 성국이 유치원 다니면 배울까 봐요.”

“삼전 유치원 정말 좋다고 친구들이 자랑하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참, 성국이 이번에 또 광고랑 여러 가지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는데요.”

김미영은 들어온 제안들을 정리해서 엄마에게 보였다.

“방송국 프로그램, 이거 괜찮은 것 같아요. 성국이 유치원 가다! 이런 콘셉트인데, 또래 아이들과 지내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는 건데, 어때요?”

“사실은 안 그래도 요즘 고민이에요. 성국이 아빠랑 삼전 전자 전속 끝나면 더는 이 일 안 하기로 했거든요.”

“스케줄에 무리 없으면 광고라도 하는 건 어때요?”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인가.]

탁!

나는 테이블을 소리 나게 내려쳤다.

“성국아, 왜 그래?”

엄마가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엄마!”

“왜?”

“나… 일 시로.”

나는 최대한 또박또박 내 의사를 밝혔다.

모두 놀란 눈치였다.

여태 내가 일을 하기 싫다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워커홀릭에 잘난 척을 안 하면 살 수 없는 인간이기에, 아기 전성국으로 일한 게 즐거웠다.

하지만 이제 나도 어엿한 다섯 살이다.

1995년 당시 과거의 나는 한창 사춘기 시절을 겪던 중이었다. 당연히 사회 물정은 잘 몰랐다. 굵직한 일들이야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번 생에서 성공하기엔 부족하다.

삼전 그룹의 유치원 A반은 정재계의 자녀들이 골고루 다니는 곳이다.

이제 슬슬 인맥도 만들고, 다시 경제 공부도 시작해서, 좀 더 정확한 의사표시가 가능한 초등학교 입학 연령이자 IMF 시기가 오면 위기를 기회 삼아 도약할 계획이다.

나는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난 전성국이야. 완벽한 계획이야.]

김미영 매니저는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제안서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러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성국아, 일하기 싫어?”

“네에! 성국이 유치원 갈 거야.”

엄마는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안았다.

“성국이도 공부하고 싶구나.”

[엄마, 공부가 아니라 인맥 만들러 가는 거야.]

“성국이 엄마, 성국이 의견도 그렇고 우선은 이 제안들 다 거절할게요. 성국이가 다시 일하고 싶을 때 해도 되니까요.”

“언니, 미안해요. 이렇게 성국이가 갑자기 일을 안 한다고 할 줄은 몰랐어요.”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성국이 덕분에 고졸 출신 삼전 기획 경리부 직원이 SKJ 기획 대표 하고 있는데요. 임선미 씨도 예전만 못하지만, 고정적인 출연도 꾸준하고요. 이 기회에 우리도 신인 배우들 좀 더 키워보면 어떨까 해요.”

“신인 발굴하시게요?”

“성국이 일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줄면 시간이 될 것 같아요.”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했다.

김미영이 SKJ 기획의 대표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소유자는 우리 가족과 김미영이었다.

김미영은 생각보다 포부가 큰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김미영.]

나는 김미영에게 다가가 등을 손으로 두 번 토닥거렸다.

엄마가 그 모습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언니, 봤죠?”

“어, 진짜네.”

[뭐가 진짜라는 거지?]

“성국이가 언니 의견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이 녀석 정말 천재 맞나 봐요. 우리 말 다 알아듣고.”

나는 얼른 손을 빼고는 뒷짐을 졌다.

[이런, 들켰군.]

아무래도 앞으로 토닥 기술은 신중히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 * *

단정한 네이비색 유치원 교복을 입은 내가 아파트 앞에서 삼전 유치원의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나는 아빠와 엄마 손을 나란히 잡고 서 있었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와 아빠는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미영 언니 친구도 삼전 그룹 다녀서 애들 삼전 유치원 보냈는데, 완전 만족했대. 다음에 학부모 참관일에 우리 꼭 가보자.”

“와, 우리 성국이도 이제 제대로 된 유치원 다니네. 아빠가 더 설렌다. 아빠, 유치원도 못 나왔잖아.”

[내가 갈 반은 아마 김 매니저가 친구 자식들이 다닌 반이 아니야. 거기는 일반적인 집안의 애들이나 다니는 반이라고.]

저 멀리 노란 삼전 유치원의 스쿨버스가 다가왔다.

버스가 멈춰 서자 젊은 남자 선생님이 나를 보고 알은척을 했다.

“성국이 맞죠?”

“와, 어떻게 이름도 아세요?”

아빠가 신기한 듯 물었다.

“A반 학생들은 수가 많지 않아서 다 알아요. 성국아, 유치원 가자.”

남자 선생님은 아빠로부터 내 손을 건네받았다.

나는 살짝 슬픈 얼굴로 엄마와 아빠를 돌아보곤 유치원 버스에 올랐다.

남자 선생님은 나를 자리까지 안내해 안전벨트까지 채워줬다.

“성국아, 30분만 더 가면 돼. 근데, 너 실제로 보니까 더 잘생겼다. 선생님도 완전 팬이었어. 친구들도 엄청 좋아할 거야.”

“녜에. 감따합니다.”

나는 앉아서 배꼽 인사를 했다.

없는 집 애일수록 예의는 있어야 하니까.

곧 차가 출발했다.

창문 너머로 엄마, 아빠는 계속 손을 흔들었다.

나도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들어가, 엄마. 아빠. 나는 유치원 접수하러 갈게.]

* * *

“안녕하세요. 전. 성. 국. 입니다.”

나는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했다.

조르륵 앉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나를 보고는 박수를 쳤다.

남자가 둘, 여자가 셋이었다.

여기에 내가 들어가면서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맞았다.

A반 담당인 이지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나를 다시 소개해줬다.

“여기 성국이는 너희들도 잘 알지?”

몇 명만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반이라면 아마 환호가 터져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반의 아이들에게 연예인 따위 안중에도 없다.

이지은 선생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얼른 끝냈다.

“성국이가 중간에 전학 왔지만, 모두 같이 잘 지내요. 그럼, 30분 자유 시간 후에 영어 수업 시작할게요.”

아이들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 아이들은 원래 어릴 적부터 부리는 사람에게 굳이 친절하게 대할 필요 없다고 배웠다.

유치원 선생도 이들에게는 부리는 사람일 뿐이다.

이지은 선생님의 관찰 아래 30분의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한 손에 거대한 로봇을 든 남자아이가 일부러 어깨를 세게 부딪치고 지나갔다.

[다섯 살 인생이란.]

남자아이들은 다섯 살부터 이미 서열 싸움을 시작했다.

[전학 첫날부터 손봐줄까?]

아이의 명찰에는 ‘강주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강주성. 강주성. 누구 아들이지?]

번뜩 뉴스에서 봤던 검찰총장 강현웅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 손주쯤 되는 놈인가 보다.

강주성은 다시 내게 오더니 어깨를 부딪치려고 했기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일 때야 검찰총장이 아니라 대통령의 손자가 건드려도 무서울 게 없었지만, 나는 이 특별반에서 유일하게 사회 배려자일 뿐이었다.

“성국아.”

쭉 찢어진 눈에 말간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그 순간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전미진?]

전미진은 전태국의 여동생. 즉, 저번 생의 나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너무 어릴 적 얼굴이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잠시 얼얼한 얼굴로 전미진을 바라봤다.

“성국아, 나는 미진이야.”

“아, 안녕.”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전미진은 잘생긴 남자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는 아이돌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커서는 직접 배우를 만나 사귀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전미진의 저 반짝이는 눈동자는 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성국아, 너 우리 집에 와서 놀래?”

“고마워. 다음에 갈게.”

나는 최대한 애매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반에서 전미진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건 없었다.

이때, 새초롬하게 생긴 여자애 한 명이 옆으로 끼어들었다.

이름은 이세희.

“너희 아버지 뭐 하셔? 우리 아빠는 의사야.”

[아하, 삼전 병원 병원장 손녀구나.]

“우리 아빠는 식당 하셔.”

이세희가 해맑게 웃었다.

“식당이 몇 개야? 우리 언니 친구는 치킨집 하는데 100개도 넘는대. 강촌치킨이라고 알아?”

[그걸 지금 치킨집 한다고 하는 건가.]

강촌치킨이라면 전국에 많은 체인을 가지고 있는 치킨 재벌이었다.

“우리 아빠는 하나!”

난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나는 30분 동안이 특별반의 구성을 확인했다.

검찰총장 손자, 강주성.

삼전 전자 대표의 손자, 김현중.

그리고 여자아이들 역시 쟁쟁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삼전 병원 병원장의 손녀, 이세희.

전 국방부 장관의 손녀, 서여림.

그리고 삼전 전자 전재형 회장의 딸인 전미진이었다.

거기에 서민 중에 서민.

흙수저 중에 흙수저를 쥔 내가 끼어 있었다.

나에게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나를 관찰하던 서여림은 선생님에게 조르르 달려가서 뭐라고 이르는 것도 같았다.

할아버지도 이 정권, 저 정권 잘 옮겨 타더니 서여림에게도 집안사람들의 눈치가 그대로 유전된 모양이다.

선생님은 웃으며 서여림을 돌려보냈다.

서여림은 그 이후에도 나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사방이 적이군.]

정말 인생은 유치원부터 살벌한 거였다.

“자, 이제 영어 수업 시작할게요.”

이지은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체형에 맞춰진 의자에 앉았다.

곧 문이 열리면서 원어민 선생님이 들어왔다. 원어민 선생님의 손에는 고급 케이크와 음료가 들려 있었다.

원어민 선생님도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이름은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곧 케이크를 잘라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모든 말은 영어로 진행됐다.

김현중이 케이크를 보더니 아는 척을 했다.

“이거. 삼전 호텔서 머겄어.”

[겨우 삼전 전자 대표 손자 주제에, 아는 척은. 나는 수도 없이 먹은 케이크야.]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다.

나는 삼전 호텔에서 가져온 딸기케이크를 포크로 떠서 입에 넣었다.

혀끝에 닿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사라지는 쉬폰 케이크.

나는 감동하며 케이크를 먹었다.

토마스가 나를 보더니 영어로 물었다.

“성국, 맛있어?”

“물론이죠!”

나는 무의식중에 영어로 대답했다.

아이들은 전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아이들 대부분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살다 와서 영어가 한국말보다 편한 아이들도 있었다.

놀란 것은 이지은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숨기곤 나를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분명 나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삼전 전자 CF와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로 국민 베이비로 등극했지만, 고아 출신의 부모. 거기다 유학은커녕 대한민국 서울 경계선을 넘어본 적도 없는 사실도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다섯 살 이전에 내가 받은 교육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영어 정도는 커밍아웃할까. 뭐, TV 보고 배웠다고 하면 너무 천재 같은가….]

사실 삼전 그룹의 후계자 시절의 나는 피나는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었지만, 밑바탕이 된 건 뛰어난 두뇌였다.

[멘사 회원이기도 했으니까… 이 정도는 껌이지.]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려 미소 짓고는 토마스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성국은 어떤 케이크를 좋아해?”

“케이크보다는 아빠의 보쌈이 좋아.”

이건 진심이었다.

내가 자연스럽게 영어로 토마스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본 전미진은 더 황홀한 눈치였다.

계속 옆에서 영어로 귀엽다거나 잘생겼다거나 그런 감탄사를 뱉어냈다.

[정말, 저 모지리.]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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