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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31화 (31/231)

제31화

영어 수업 시간이 끝나고 나서는 곧 체력 단련 시간과 개인 독서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쭉 책을 훑었지만, 영 보고 싶은 책이 없었다.

이지은 선생님이 다가왔다.

“성국아, 보고 싶은 책이 없어?”

“선생님, 집에서 보던 책 가지고 와도 돼요?”

“물론이지. 이상한 책이면 안 돼.”

“녜에!”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손에 잡히는 아무 동화책이나 한 권 뽑았다.

이지은 선생님은 계속 내 옆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성국아, 선생님이 궁금한 게 있는데… 영어 배운 적 있니?”

“TV 보고.”

“TV 보고 배운 거야?”

“녜에.”

“정말?”

“녜에.”

나는 미리 준비한 대답을 했다.

이지은 선생님은 살짝 놀란 눈치기도 했지만, 내 말을 다 못 믿는 것도 같았다.

머리를 두 번 쓰다듬더니 이세희 옆으로 갔다.

[겨우, 떨궜네.]

“성국아.”

[하아, 한 명 가니 한 명 오는 건가.]

전미진이 뒤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너 오줌 마렵니?]

“성국아, 이거.”

전미진은 내 앞에 화려한 장식이 된 카드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내 생일 파티 초대장. 올 거지?”

“생각해볼게.”

“앙 돼!”

전미진은 갑자기 화를 버럭 냈다.

[어릴 때부터 성격 지랄맞았구나. 네 마음대로 안 된다고 소리 지르고 하니까 언론에도 오르내리는 거 아니야!]

“성구기, 꼭 와. 어?”

이번엔 갑자기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얼른 전미진의 팔을 뿌리쳤다.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전미진은 곧 울듯이 나를 원망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어쩔 수 없네.]

“갈게.”

“진따?”

“응.”

나는 되도록 짧게 대답했다.

이지은 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렀다.

“자, 이제 점심시간이에요. 자리로 돌아가세요.”

전미진이 바로 내 손을 잡았다.

“성국아, 밥 가치 먹자.”

[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는 이번엔 최대한 슬쩍 전미진의 손을 빼고 먼저 달려갔다.

전미진은 득달같이 달려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미진아, 거기 미진이 자리 아니잖아요.”

“여기서 먹을래요!”

전미진은 또 고집을 부렸다.

이지은 선생님도 포기한 눈치였다.

“오늘만이에요.”

“싫어요. 성국이 옆자리는 이제 미진이 자리에요.”

[갈수록 태산이네.]

다른 남자아이들은 고집쟁이 전미진이 내 곁에 찰싹 붙은 게 오히려 다행이란 눈치였다.

[말이 통해야 설득이라도 하지.]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곧 문이 열리더니 요리사 복장을 한 남자가 여섯 개의 수제 햄버거를 들고 들어왔다.

특별반의 식사는 일반반과는 천지 차이였다.

영양가 골고루 짜인 한식을 주식으로 일주일에 이틀 정도 특식이 나왔다.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었다.

내 앞에도 딱 봐도 육즙 가득 머금은 패티를 품은 수제 햄버거가 놓였다.

[이게 얼마 만이야.]

나는 얼른 손을 걷어 올리고, 수제 햄버거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한 입 깨물었다.

[바로, 이 맛이야! 근데… 왜 옆얼굴이 이렇게 따갑지?]

고개를 돌리자, 전미진이 햄버거는 먹지도 않고 턱을 두 손으로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우선 무시하고 햄버거에 집중했다.

“미진아, 햄버거 먹어야지요. 선생님이 잘라줄까?”

“네. 너무 커요.”

[네 입이 햄버거보다 더 커.]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햄버거를 계속 먹어댔다. 하나를 다 먹고 나서도 살짝 아쉬운 감이 들었다.

“성국아, 햄버거 하나 더 먹을래요?”

“녜에!”

이지은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크게 대답했다.

이지은 선생님은 기분 좋게 여유분의 햄버거를 꺼내 내 접시 위에 올렸다.

“성국아, 천천히 먹어야 해요.”

“천천히!”

나는 선생님의 말에 따라 이번엔 천천히 햄버거를 한 입 한 입 먹었다.

이때, 뒤통수에서 강주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햄버거도 못 먹어봤나 봐.”

“거지 같아.”

뒤이어 김현중이 말을 보탰다.

나는 강주성과 김현중을 쏘아봤다.

[지금, 거지 같다고 말했냐?]

나는 햄버거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냅킨으로 최대한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

겨우 다섯 살짜리들과 똑같이 복수를 해줄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팔뚝을 살짝 걷어 올렸다.

내가 강주성과 김현중에게 내 주먹맛을 보여준다면, 아마 우리 엄마, 아빠는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겨우 변호사나 하는 집안 자식들도 심심하면 소송을 해대는 게 이 나라의 소위 잘사는 집 사람들이었다.

특히나 지금은 1995년이다.

우리나라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르고 7년이 갓 지난 시점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곳곳에 비리와 잘못된 행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시국에 결국, 가장 불쌍한 것은 나와 같은 서민이었다.

나는 팔뚝을 마지막까지 야무지게 걷고, 일어나려는데. 짜악-. 짜악- 찰진 소리가 들렸다.

뭐지?

전미진이 강주성과 김현중의 뺨을 아주 찰지게 때리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였네.]

전미진의 저 싸대기는 나중에 커서는 아주 유명해진다.

전미진이 운영하는 패션 브랜드의 여직원 한 명이 전미진이 주문한 귀리 우유가 들어간 라떼 대신에 일반 우유가 들어간 라떼를 사와 화가 난 전미진은 그 여직원의 싸대기를 저렇게 시원하게 날렸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고, 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불만을 가진 직원 누군가가 이 장면을 몰래 찍었고, 이 일로 카메라 앞에서 대국민 사과까지 하며 집안 망신을 톡톡히 시켰다.

하지만 지금 전미진은 나 대신 복수를 한 거였다.

전미진에게 뺨을 제대로 맞은 강주성과 김현중은 얼얼한 뺨을 부여잡고는 억울한 눈빛으로 전미진을 쳐다봤다.

“왜 때려?”

검찰총장 손자 강주성이 호기를 부려봤다.

겨우 삼전 전자의 대표 손주인 김현중은 알아서 찌그러져 있었다.

전미진은 가소롭다는 듯이 강주성을 쳐다보며 팔을 걷어 올렸다.

“니네 지금 성국이한테 뭐라고 했어?”

“…….”

강주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검찰총장 자식이라고 해도 대한민국 모든 체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삼전 그룹이었다.

이지은 선생님도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잘 지도, 관찰하는 것이지 혼낼 권한도 없었다.

이지은 선생님은 그래도 중재에 나섰다.

“미진아, 교실에서 폭력은 안 돼요.”

“선생님.”

전미진은 앙칼진 목소리로 이지은 선생님을 불렀다.

이지은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저희 어머니한테 좀 연락해 주세요.”

“그건 왜요?”

“어머니한테 말씀드릴 거예요.”

전미진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제법인걸.]

나는 몰랐던 전미진의 모습을 보며 걷어 올린 팔뚝을 슬슬 내렸다.

강주성과 김현중은 나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지은 선생님은 얼른 미진이를 안고 아이들을 바라봤다.

“미진아, 어머니께는 이따 연락드리고 우선 친구들이랑 화해해야죠. 주성과 현중아, 미진이한테 사과해야죠.”

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에게 사과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삼전 그룹 유치원 특별반.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자신의 부모가 곧 서열이 되고, 우정에도 서열이 존재하는 곳.

그리고 아무도 이 서열을 부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라서 어쨌든 대한민국 정재계를 흔들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흥미롭게 이 정글을 바라봤다.

강주성과 김현중은 체념한 얼굴로 전미진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해.”

“나두 미안해.”

“그래, 용서해줄게. 성국이한테 다시는 그러지 마.”

전미진은 페르시아의 여왕처럼 강주성과 김현중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이 특별반의 서열이 한눈에 보였다.

전미진은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 그 아래로 국방부 장관과 검찰총장 할아버지를 둔 서여림과 강주성.

그 아래는 삼전 그룹의 계열사로 분류되는 전자의 대표와 병원의 병원장 손자와 손녀인 김현중과 이세희.

그럼, 내 위치는 어디일까?

나는 지금 저 피라미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비록 다섯 살이었지만, 이제 나도 결정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 왔다.

저 거대한 피라미드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나만의 피라미드를 만들 것인지.

나는 손을 앙 쥐었다.

* * *

그날 저녁,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삼전 유치원의 이지은 선생님이었다.

저녁을 먹고, 아빠 가게에 막 놀러 가려는 참이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는 내내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간간이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우리 성국이가요? 진짜요? …혼자 한글을 깨친 건 알았는데, 그것까진 몰랐어요.”

아무래도 오늘 내가 토마스와 프리토킹을 한 것에 놀란 이지은 선생님이 진실을 알기 위해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엄마는 전화를 끊고, 민국이를 유모차에 태웠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최대한 차분히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아빠 보러 가자.”

“녜에!”

나는 현관 턱에 주저앉아서 운동화도 혼자 신었다.

엄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일어서면서 휘청하자, 엄마가 얼른 나를 잡아 세웠다.

“성국아, 괜찮아?”

“녜에, 엄마.”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아빠의 가게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이런저런 말을 걸던 엄마가 너무나 조용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살짝 잡아당겨도 봤지만, 엄마는 무슨 생각에 빠진 듯 그럴 때마다 나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엄마, 무섭게 왜 이래.]

다섯 살 인생 평생 처음 본 엄마의 모습에 살짝 긴장이 됐다.

딸랑.

가게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주방에서 아빠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도 마중 나온 거야?”

“자기야, 오늘은 어땠어?”

“조금씩 느는 중이야.”

이때, 배달 기사분이 들어오시더니 아빠가 포장해둔 봉투를 들고 휭하니 나갔다.

엄마는 빈자리에 앉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다른 손님은 없었다.

엄마는 나를 의자에 앉히더니 물끄러미 바라봤다.

[엄마, 자꾸 왜 그렇게 날 보는 거야?]

“성국아, 물 줄까?”

“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물 잔을 앞에 두더니 갑자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서 들고 왔다. 그리고 주방에다 대고 소리쳤다.

“자기야, 나 맥주 한 병 해도 돼?”

“맥주 땡겨?”

“응. 자기도 시간 되면 잠시 앉아봐. 할 말 있어.”

“이것만 하고.”

아빠는 포장된 보쌈을 카운터에 놓고 엄마 앞에 앉았다. 시간은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혼자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아빠를 바라봤다.

“소영아, 무슨 일 있어? 회사에서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자기야, 우리는 성국이 부모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엄마, 뭐라는 거야?]

나는 미간을 팍 구겼다.

“소영아, 그게 소리야?”

“좀 전에 성국이 유치원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 근데… 성국이가 영어를 엄청 잘한다는 거야.”

“어?”

아빠도 놀란 눈치였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었다.

“영어 시간이 있는데, 그 반 아이들은 모두 외국에서 살다 오거나 해서 영어를 잘해서 성국이를 좀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른 애들보다 영어를 더 잘하더래.”

[엄마, 나 사실은 중국어, 일어, 독일어, 프랑스어도 해.]

“선생님은 뭐래?”

“수업 끝나고 성국이한테 영어 어디서 배웠냐고 하니까, TV 보고 배웠다고 했대.”

아빠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빠, 입 닫아. 파리 들어가.]

나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물을 쪽 마셨다.

“소영아… 그게 가능한 일이야?”

“나도 그걸 몰라서…. 자기야, 우리가 성국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애가 혼자 영어를 깨치는데도, 부모가 돼서 몰랐잖아.”

[그건 내가 말을 안 해서 몰랐던 거지. 저번 생에서 배워왔단 말을 어떻게 하냐고, 이 어린 부모들아.]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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