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철의 여인은 입꼬리를 정말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 아주 묘하게.
“성국이 어머니는 참 솔직하시네요.”
이 말은 돌려 말하면 못 배워 먹었다는 말이었다.
삼전 그룹 사람들은 솔직한 것을 결코 좋은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나도 예전에는 저랬겠지. 없는 사람들 뒤에서 조용히 조롱하고 무시하고….]
“참, 성국이 엄마는 대학 어디 나왔어요?”
“저는 고등학교만 나왔어요. 서촌 여상이요.”
“풉-.”
몇 명 엄마들은 비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철의 여인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알았다는 듯이 커피를 마셨다. 아마 이게 신호일 것이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삼전 그룹 방계인 검찰총장 며느리였다. 김주성의 엄마이기도 했다.
“사촌 오빠 목숨 구한 것치고는 너무 과분한 대우 아니야?”
[지금 프랑스어로 말하는 거냐?]
시작은 프랑스어였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빙긋 웃으며 여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한때 가수였던 여자도 말을 보탰다. 물론 프랑스어로.
“우리랑 수준이 너무 안 맞네요. 여상이라뇨.”
[아줌마, 지금 여상에 붙인 관사 틀렸어!]
아무래도 저 가수도 이 사회에 발붙이기 위해 속성으로 프랑스어를 배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법 틀린 것을 눈치챈 건 철의 여인과 나 정도였다.
여자들은 계속해서 프랑스어로 떠들어댔다.
아이들은 영어 외에 제2외국어를 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프랑스어로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아이들한테도 같이 놀아주지 말라고 해야겠어요. 친구 없으면 스스로 옮기겠죠.”
“미진이가 성국이를 엄청 챙긴다는데, 걱정이네요.”
“미진이는 내년이면 미국으로 갈 거예요. 올해까지만 견디는지 보죠.”
철의 여인은 능숙한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엄마와 김미영 매니저는 자신들 빼고 그들만 대화하는 것이 따돌리는 의미란 건 알았지만, 뭔 소리인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는 두 사람이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또 나서야 하나?
프랑스어까지 커밍아웃하면 곤란한데….
미진이가 나에게 제일 큰 케이크를 건넸다.
“성국아, 이거 먹어.”
“응, 고마워.”
내년에 미국으로 간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뒤에서 다시 여자들의 프랑스 수다가 시작됐다.
“없는 애가 참 눈치도 없네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꼴랑 꽃만 들고 와요.”
“없는 집안이 그렇죠, 뭐. 엄마, 아빠가 애 얼굴 팔아서 돈 버는 집안이 뭐, 안 봐도 뻔하죠.”
검찰총장의 며느리의 마지막 말에 한계에 다다랐다.
더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포크를 소리 나게 내려놨다.
뒤에서 이세희 엄마가 종알거렸다.
“정말 배운 게 없나 보네. 디저트 포크가 뭔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이세희 엄마와 김주성 엄마를 타깃으로 설정했다.
의자를 빼고 조용히 일어나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머, 여기가 감히 누구 생일인 줄 알고 저러나 몰라.”
“저 엄마는 아무 말도 못 알아들으니 웃고만 있네요.”
“아줌마들. 저기요.”
나는 프랑스어로 그들의 말을 끊었다.
물론 아직 다섯 살짜리의 발음이라 조금 어눌했지만, 분명 다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먹는 것 같았다.
“겨우 저 단어 하나 어디서 들었나 보네.”
김주성의 엄마였다.
[겨우 한 단어가 아닌 것을 이제부터 보여주지!]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프랑스어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줌마, 지금 저희 부모님 모욕하신 것 같은데요. 저희 부모님은 없는 집에서 태어나셔서 비록 많이 못 배우셨지만, 제가 지금 방송에 나올 만큼 잘난 얼굴과 댁의 자식들도 못 하는 프랑스어쯤은 혼자 독학할 정도의 능력 모두 저희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거거든요.”
숨을 한 번 골랐다.
여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돈만 많은 당신들보다야 저에게 이런 재능을 물려주신 우리 부모님이 더 훌륭하신 분들이라는 건 좀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긴 문장을 속사포로 말하자, 다들 입을 꼭 다물었다.
제대로 알아들은 것은 철의 여인 정도였다.
나머지도 대강의 의미는 알아들었고, 가수 출신의 이세희 엄마만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철의 여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지만,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이었다.
철의 여인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프랑스어로 묻기 시작했다.
“성국아, 너 프랑스어 어디서 배웠니?”
“TV에서 하는 프랑스어 강좌 보고요.”
“프랑스어 관사 하나 틀리지 않던데. 따로 배운 거니?”
“책을 좀 많이 읽었어요.”
나는 철의 여인이 묻는 말에 바로바로 대답했다.
철의 여인의 전공이 프랑스어였다. 그래서 이 여인들의 뒷담화 언어가 프랑스어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프랑스어 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저 여인 덕분이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 혹독하리만큼 프랑스어 공부를 시켰다.
엄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철의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굳은 얼굴로 프랑스어로 내게 말했다.
“오늘 생일 파티에 와줘서 고맙구나. 그럼, 미진이랑 잘 놀고 가렴.”
“저기요, 아줌마.”
나는 철의 여인을 불러 세웠다.
철의 여인은 얇은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 나를 바라봤다.
“저희 엄마에게 사과해 주세요.”
“알아듣지도 못한 말을 사과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사모님들이 겨우 한 명 왕따 시킨 거는 안 창피하세요? 미진이가 이런 엄마의 행동을 알면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
철의 여인은 가만히 숨을 내쉬더니 엄마를 쳐다봤다.
“아드님이 참 영특하네요. 프랑스어가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나온 거 사과드릴게요. 남은 시간 잘 보내고 가시죠.”
“아닙니다. 제가 많이 부족한데, 초대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엄마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철의 여인의 사과에 다른 엄마들도 미안하단 말을 건넸다.
나는 다시 전미진 옆자리에 앉았다.
전미진이 턱에 두 손을 괴고 나를 황홀하게 쳐다봤다.
[부담스럽다, 동생아.]
그러거나 말거나 전미진은 나만 바라봤다.
“성국아, 너 프랑스어도 해?”
“좀.”
“성국이, 천재!”
[아이큐가 121이라 천재는 아니야. 사양할게, 그 말은.]
나는 다시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먹었다.
어쨌든 이 케이크는 정말 맛있었다.
* * *
“성국이가 영어에 프랑스어도 완벽하게 한다고?”
전재형 회장이 놀란 얼굴로 양 비서를 쳐다봤다.
“네, 회장님. 저희도 모두 놀랐습니다. 더군다나 모두 교육 방송 강좌나 책을 보고 익혔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한가?”
“영재 테스트 받았는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이큐는 솔직히 121로 평균보다 조금 높은 수준인데, 모든 항목에서 상위 0.1프로에 들었습니다. 특히 사고력이나 학습 능력 등이 정말 탁월하다고 하더라고요. 테스트하신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성국이가 아이큐 검사 때 딴청을 피운 게 아닌가 의심하더라고요. 머리가 좋은 아이들의 경우 일부러 그러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전재형 회장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성국 군 계속 팔로우하게. 한 명의 천재를 후원하는 게 기업 이미지에도 좋을 수 있지 않은가. 나중에 우리 기업에도 도움이 될 거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 비서가 나가려는 찰나, 철의 여인이 들어섰다.
전재형 회장은 의외의 방문에 조금 당황했다.
철의 여인과는 지난 몇 년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아버지 전주신 회장이 살아 계실 때야 어쩔 수 없이 한 지붕 아래 살았지만, 회장이 된 이후에 전재형은 독립을 준비 중이었다. 그게 어차피 서로에게 편한 일이었다.
“문 좀 닫고 나가주세요.”
철의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하명하자, 양 비서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전재형은 다 못 본 서류를 훑으며 철의 여인을 흘깃 쳐다봤다. 뭔가 단단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성국이, 당신 아들이야?”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알면서 왜 물어. 이미 뒷조사 다 해봤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이해가 안 돼.”
“고아에 고졸인 부모 밑에서 그런 아이가 나왔다는 게 당신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럴 수는 있지. 천재들은 어느 부모 밑에서든 나오니까. 어떻게 길러지는지가 더 문제지.”
철의 여인은 팔짱을 끼고 전재형을 쳐다봤다.
“근데 내가 궁금한 건, 당신이 정말 그 집안에 사심이 하나도 없냐 하는 거야.”
전재형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내가 남의 와이프까지 넘보는 그런 난봉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난 그게 아닌데.”
철의 여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신. 태국이한테 이미 실망했잖아.”
“…….”
전재형 회장은 태연한 척 서류를 마저 정리했다.
철의 여인은 당황하더니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 아이한테 다른 것을 바라는 거 아니야?”
“삼전 그룹은 인재들에게 쭉 후원을 해줬어.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참, 나 다음 주에 삼성동으로 나갈 거야. 태국이랑 미진이 미국 유학 좀 더 빨리 추진했으면 좋겠어. 당신도 같이 나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당신 말대로 태국이 이미 실망스러운데, 미국 가서 더 실망스러워지면 안 되잖아.”
전재형 회장은 노트북을 열었고, 곧이어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흠….”
전재형 회장은 턱을 매만졌다.
사실 성국이란 아이에게 내심 기대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삼전 그룹의 인재로였다.
그런데 철의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다른 생각이 슬며시 떠올랐다.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인 태국이는 이미 후계자로서 미달이었다.
성격도 옹졸하고, 감정 기복도 심했다. 거기다 학업 성적도 좋지 않았다. 조기 유학을 보내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괜히 국내에서 돈 들여 학교 보내봤자, 부정 입학이니 말만 나오느니 일찌감치 미국의 대학을 노리는 게 나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루트는 서울대 출신으로 바글바글한 임원진들의 인정을 받기 어려웠다.
다들 흠만 잡으려고 노력했다.
전재형 회장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봤다.
최고가 되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 그래서 얻은 이 자리.
그런데 아들인 태국은 이미 그러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을 대리자를 어서 빨리 선택해서 키우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에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어릴 적부터 삼전 그룹에 완벽하게 속한 인간으로 키워야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수도 있는 거였다.
‘아직 다섯 살인데….’
전재형 회장은 생각을 한 템포 쉬었다.
자신이 너무 빨리 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성국이라는 아이의 미래가 점점 궁금해진다는 거였다.
* * *
“성국이가 프랑스어도 한다고?”
아빠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빠, 천재 처음 봐? 아, 맞다. 나 천재 아니지. 아이큐 121이지.]
시무룩.
나는 아빠가 싸온 보쌈 고기를 우울한 얼굴로 아작아작 씹어댔다.
기분은 우울해도 아빠가 삶은 보쌈 고기는 맛있었다.
엄마는 옆에서 민국이를 안은 채 아빠에게 오늘 있던 일을 늘어놨다.
“미진이 엄마. 그러니까….”
[삼전 그룹 회장 사모님!]
“암튼 그분도 엄청 놀랐어. 양 비서님이 나중에 말씀해 주시는데, 성국이 불어가 아주 완벽했다고 했어.”
“진짜?”
아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빠, 얼굴 닳아. 그만 봐.]
“성국아.”
“왜에?”
나는 이제 살짝 짜증 묻은 다섯 살의 말투로 물었다.
“성국아, 너 정말 프랑스어도 해?”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아, 너 아빠가 누구야?”
“아빠? 여기.”
나는 아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엄마는?”
“엄마? 여기.”
나는 엄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곧 아빠는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내 뺨을 손바닥으로 비벼댔다.
[아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소영아, 우리가 이런 천재를 낳은 게 믿어져?”
“근데 자기야. 우리 성국이 아이큐가 121이래. 평균보다 조금 높다는데, 천재는 아니지 않을까?”
탁!
나는 손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내 마음의 스크래치.
[대체 어떻게 내가! 이 전성국이! 아이큐 121이란 말이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