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철의 여인은 뛰는 심장을 겨우 안정시키고 물었다.
조성원은 마치 꿈꾸는 듯한 얼굴로 성국의 피아노 치는 모습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저도 피아노를 처음 친 게 다섯 살 때였거든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보는데, 그냥 무척 행복했어요. 건반 하나하나를 칠 때마다 미소가 저절로 났고요. 성국이한테 그런 얼굴이 보였거든요.”
조성원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성국이가 또래보다 손가락이 길고 유연하다는 사실.
거기다 아까 시험 삼아 자신이 먼저 친 음계를 성국에게 시켰을 때, 바로 따라 하는 절대음감이라는 것도.
이런 건 어쨌든 예술을 취미로든 특기로든 배우려는 아이의 엄마에게는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철의 여인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말씀 감사해요. 다음 주가 연주회라 바쁘실 텐데, 수업도 감사하고요.”
“언제나 좋은 마음으로 후원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조성원 역시 삼전 그룹에서 후원하는 인재 중 한 명이었다.
철의 여인은 잠시 멈칫하곤 조성원의 얼굴을 다시 봤다.
“죄송한데요. 성국이란 아이를 가르쳐줄 만한 선생님이 있을까요?”
조성원은 의아한 얼굴로 철의 여인을 쳐다봤다.
“그건 왜….”
“성국이, 사실 저희 삼전 그룹에서 후원하는 아이거든요. 재능이 있다면 그쪽으로 키워주고 싶어서요.”
“괜찮으시면 제가 어릴 적 다녔던 피아노 학원 선생님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그분 덕분에 피아노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고, 기초도 탄탄히 배울 수 있었거든요.”
“알아볼게요.”
철의 여인은 가뿐한 마음으로 조성원과 인사를 나누고 차로 향했다.
성국이란 아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면 그걸 키워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성국이는 그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고, 전재형 회장도 더는 성국이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 *
“카레 좋아. 맘마 좋아.”
나는 엄마가 만들어준 카레를 앞에 두고 어깨춤을 추며 숟가락을 들었다.
[하아, 내가 이 싸구려 맛 나는 카레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정말 저번 생에서는 꿈도 못 꾼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만들어주는 카레는 이 세상에서 삼전 호텔의 짜장면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맛있었다.
“성국아, 천천히 먹어.”
“잘 먹겠습니댜!”
나는 인사를 하고는 얼른 카레를 입에 밀어 넣었다.
[역시 맛있어.]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이때,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엄마는 얼른 젖은 손을 닦고는 전화를 받았다.
“양 비서님, 잘 지내시죠?”
[양 비서가 무슨 일로 전화를 했지?]
“성국이 진로에 대해서 상담할 내용이 있으시다고요? 네. 다음 주 월요일이 남편 가게 쉬는 날이에요. 알겠습니다.”
엄마는 전화를 끊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성국아,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흠….]
나는 우선 도리도리를 했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일어났던 일 중 하나는 분명히 알았다.
바로 조성원을 만난 일.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철의 여인.
철의 여인의 생각이 조금 짐작이 됐다.
[설마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들 작정인가.]
철의 여인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살가운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자식의 앞날을 방해하는 것은 뭐든 정리해줬다.
“성국아, 엄마 잠시 빨래 널고 올게. 민국이 좀 봐줄 수 있지?”
“응. 엄마, 빨리 와.”
“엄마가 와서 바나나 줄게.”
“응!”
나는 밥을 먹고는 거실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민국이 녀석을 봤다.
책은 한 줄도 안 읽었고, 뉴스에도 관심도 없고,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싸고, 노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민국이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너 대체 커서 뭐 될래? 아무리 형이 돈 많이 벌어도, 너도 돈을 벌어야 해. 사지 멀쩡한 사람이 놀면 안 된다. 알았지?]
“혀엉.”
민국이 녀석이 내 곁으로 오더니 얼굴을 들이밀더니 뺨에 얼굴을 부비부비했다.
내가 잔소리를 하면 요즘 이 녀석은 맨날 나한테 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리 가라. 좋게 말할 때.]
“혀엉.”
민국이는 혀 짧은 소리로 헤헤 웃을 뿐이었다.
[정말 이 녀석 미래가 걱정된다, 돼.]
“에휴-.”
난 벌써부터 민국이 걱정에 눈앞이 캄캄했다.
이 녀석 잘 커서 사람 구실이나 할까?
이런 내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국이는 내게 안기더니 헤헤 웃어댔다.
“혀엉. 조아.”
[난 너 별로 안 좋아해. 이젠 경쟁자가 아니라 넌 내 인생의 짐이야, 짐.]
나는 축 처진 어깨로 민국이를 내려다봤다.
“밍구가. 형이 좋아?”
“응!”
“왜에?”
“형이자나.”
뭉클.
진짜 이번 생에서는 심장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말에 심장이 뭉클했다.
[그래, 한번 안아줄게. 이리 와봐.]
민국이는 나를 꼬옥 안았다.
민국이 몸에서 베이비파우더 향기가 솔솔 올라왔다.
[아하, 이 녀석 미래도 내가 좀 설계해 봐야겠구나.]
나는 민국이를 엄하게 쳐다봤다.
“전민국, 내 말 잘 들어야 해. 아랐어?”
“녜에!”
민국이가 해맑게 웃었다.
[흠… 유치원 다니느라 잊고 있었는데, 이 녀석 좀 귀엽게 생겼네. 나보다야 못하지만, 이 정도 얼굴이면 뭐든 할 수 있겠어.]
웃는 모습은 제법 귀여웠고, 나보다 멍청하긴 했지만 말귀는 잘 알아들었다. 아역 모델이나 배우에게 그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다.
“성국아, 민국이랑 잘 놀고 있었네. 엄마가 얼른 바나나 줄게.”
“엄마!”
나는 엄마를 불러 세웠다.
“왜, 성국아?”
“민국이. 민국이 아역 시켜 봐요.”
“뭐라고?”
엄마가 놀라 나를 쳐다봤다.
“민국이 연기 잘해요. 잘 웃어요.”
“민국이가 그렇긴 한데….”
“성국아, 그거 네 생각이야?”
물론 내 생각이지만, 내 생각이라고 말하면 엄마를 움직이긴 어려울 것 같았다.
“민국이가 그랬어요.”
“민국이가?”
“응.”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민국이의 어깨를 잡더니 눈을 맞췄다.
“민국아, 너 아역 모델 하고 싶어?”
“녜에!”
민국이가 크게 대답했다.
사실은 내가 좀 전에 엄마 말에 무조건 네라고 하면 잘 때 엄마 곁을 양보해 준다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베개를 안고 일어났다.
자려고 누운 엄마와 아빠가 이상하게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잠이 안 와?”
아빠가 나를 안으려고 다가왔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성국아, 왜 그래?”
“아빠, 나 혼자 잘래요.”
“갑자기? 지금?”
“네에!”
나는 어느새 엄마 옆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 민국이를 내려다봤다.
비록 세 살짜리와의 약속이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오늘부터 내 방에서 잘 거예요.”
나는 또박또박 말을 하고 책상만 덩그러니 있는 내 방으로 걸어갔다.
엄마와 아빠가 놀라 뒤따랐다.
“성국아, 진짜 혼자 잘 거야?”
“네에!”
엄마와 아빠가 상의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소영아, 우선 이불 깔아주자. 문 좀 열어두고. 자다가 무서우면 오겠지.”
“갑자기 왜 저러지?”
“낮에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는 홀로 어둑한 방에 섰다.
조명 스위치는 내 손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저번 생에서는 돌이 갓 지나자마자 홀로 방을 썼다.
[이 어둠에도 익숙해져야겠지.]
나는 쓸쓸히 베개를 꼭 안았다.
달칵.
불이 곧 켜졌다.
엄마와 아빠가 이불을 가지고 와서 덮어줬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번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진짜 혼자 잘 수 있겠어?”
“…….”
나는 말 대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든 여자든 한 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야, 엄마.]
나는 베개를 꼭 껴안았다.
엄마와 아빠는 차례대로 나를 꼭 안더니 방문을 살짝 열어두고 나갔다.
“성국아, 무서우면 안방으로 와.”
도리도리.
[그럴 일은 이제 없을 거야.]
곧 불도 꺼졌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엄마 옆자리는 동생인 민국이에게 물려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베갯잇을 적셨다.
[이렇게 또 어른이 되는 거겠지.]
“흐윽-.”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았다.
* * *
월요일 유치원이 끝날 시각, 양 비서 아저씨가 밖에서 기다리는 게 보였다.
엄마가 양 비서 아저씨가 데리러 갈 것이라고 이미 말해둔 상태라 나는 의심 없이 양 비서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성국아, 유치원 어떠니?”
양 비서 아저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삼전 그룹이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음을 알리는 짧은 대답을 했다.
“재미있어요.”
“그래?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니?”
“네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냥 애들이랑 안면 좀 튼 거지.]
지금이야 내가 외국어도 잘하고, 지들보다 똑똑한 줄 아니까 더는 나를 무시하지 못하지만,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인지하고 나면 저들은 나를 찬밥 취급할 것이다.
그 전에 내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올려야 한다.
“성국아, 아빠 가게 가서 저녁 먹을까?”
“보쌈 맛있어요.”
나는 얼른 양 비서의 차에 올라탔다.
양 비서의 차 역시 손에 꼽히는 명차였다.
서민들이야 비서라고 하면 전재형 회장의 자잘한 일이나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으로 안다. 하지만 양 비서는 삼전 그룹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직책 중 하나이다.
삼전 계열사 대표들과 연봉도 엇비슷했지만, 양 비서에게 주어진 특권은 더 어마어마했다.
이 차와 집. 그리고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각종 혜택이 있었다.
그래서 양 비서의 절대복종도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양 비서는 차에 준비된 유기농 바나나를 간식으로 내밀었다.
“성국이 바나나 좋아하지?”
“감사합니다.”
나는 다소곳하게 바나나를 들었다.
[저번 생에서 즐겨 먹던 유기농 바나나네.]
나는 히죽거리며 바나나를 한 입 깨물었다. 차 안에서는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이 들려왔다.
[이건 조성원 연주인데….]
“어….”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양 비서는 면밀하게 살폈다.
“성국아, 왜 그래?”
“이거. 이 음악.”
“응. 이 음악이 왜?”
“쇼팽.”
“성국이는 이 음악을 어떻게 알아?”
양 비서는 차분하게 물었다.
그제야 나는 이 모든 게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부러 조성원의 피아노 연주곡을 틀었고, 내가 음악에 얼마나 민감한지 보는 거였다.
지금부터 모든 게 테스트였다.
아니,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한 스태프 중 하나였다.
나는 숨을 골랐다. 나의 피아노 실력은 나도 잘 안다.
저번 생에서 아주 잠시 피아니스트가 되어 전 세계를 돌며 연주회를 여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재능은 그것에 한참 모자랐다.
서울의 어느 대학이나 유학까지 무난한 실력으로 갈 수 있지만, 집안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는 외국의 콩쿠르에서 수상할 실력은 안 됐다.
아마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저띠.”
나는 양 비서를 불렀다.
“왜, 성국아?”
“피아노 좋아요.”
“정말?”
“네. 근데요.”
“근데?”
양 비서의 옆으로 작은 녹음기가 보였다.
“피아노보다 공부가 더 좋아요. 공부가 재미있어요. 헤에.”
“그래….”
양 비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아빠의 보쌈 가게가 저 멀리 보였다.
* * *
가게 한 자리에는 이미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아빠표 보쌈과 반찬들. 그리고 소주까지.
오랜만에 김미영 매니저도 보였다.
아침에 학교 가면서 엄마에게 김미영 매니저가 보고 싶다고 슬쩍 흘렸다.
엄마는 양 비서를 만나는데 김미영 매니저도 오면 좋을 것 같다며 부리나케 연락을 했다.
엄마, 아빠가 좋은 사람들이고 이제 슬슬 사회적인 경험도 쌓이긴 했지만, 삼전에게 잔뼈가 굵은 김미영이 있으면 좀 더 유리하게 대화를 끌고 나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돌아가신 전주신 회장께서는 이런 말을 종종 하셨다.
“회의 테이블에 우리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