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나는 조르르 엄마에게 가서 안겼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성국아, 유치원 재미있었어?”
“네에!”
그 말 뒤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전미진 껌딱지 때문에 귀찮지만, 영어랑 프랑스어 쓰는 건 엄청 좋아. 선생님들이 이제 내 수준을 좀 못 따라오는 것 같긴 한데. 다들 착해서 조정하기는 편해.]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아빠가 한 보쌈 먹자.”
“와아! 배고파요. 아빠!”
“어서 앉아. 양 비서님도 앉으세요. 마저 음식 좀 가지고 올게요.”
“참, 저희 회사 사람들 주게 보쌈 세트 열 개만 포장해주실 수 있죠? 일 마치고 들어가는 길에 야근하는 친구들 주게요.”
“그럼, 준비할게요.”
“우선 성국이 이야기 하고 준비해 주세요. 아버지도 이야기를 들으셔야죠.”
아빠는 앞치마를 벗고 테이블에 앉았다.
아빠와 엄마, 김미영 매니저와 나. 구석에 유모차에서 버둥거리는 민국이까지.
전주신 회장의 말대로 지금 나에게는 양 비서를 상대할 내 편이 많았다.
아빠가 얼른 양 비서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한 잔 괜찮으시죠?”
“보쌈에 소주 빠지면 안 그래도 서운할 뻔했어요.”
양 비서의 주량은 소주 반 병.
물론 이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주량이다.
사실 양 비서는 소주 네다섯 병도 너끈히 마시지만 언제나 긴장을 놓을 수 없기 때문에 밖에서는 적당히 마시는 타입이었다.
꿀꺽.
양 비서는 첫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성국이 아버지 보쌈은 언제 먹어도 맛있네요. 혹시 앞으로 사업 확장 같은 거 하실 생각 없으세요?”
“고객들에게 인정받는 게 제일 먼저잖아요. 점점 고객이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초창기라서요.”
“성국이가 아이답지 않게 신중한 면이 있는데, 아버님을 닮은 거군요.”
양 비서는 나를 보며 웃었다.
[양 비서, 웃지만 말고 이제 속내를 드러내야지. 언제까지 보쌈만 먹고 있을 거야?]
“참, 제가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한 거는요. 말씀드렸다시피 성국 군 교육 문제 때문인데요….”
양 비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좀 전의 차 안에서 나눈 내용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철의 여인이겠지?
나는 턱을 매만졌다.
“이런 말씀 드리려니 쑥스럽네요. 성국 군 교육에 저희가 너무 많이 참여하는 것 같아서요.”
[내 말이. 양 비서, 선 넘지 말자고.]
나는 팔짱을 딱 꼈다.
“사실은 성국 군이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 익히 들었습니다. 가르치신 선생님들의 말씀도 한결같이 성국 군이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말씀해 주시고요.”
[이런 말 너무 들어도 지겹군. 자, 어서 본론을 말해보라고, 양 비서.]
“제가 드리는 의견은 의견일 뿐이니 참고하시라는 것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빠는 얼른 양 비서의 빈 잔에 소주를 다시 채웠다.
양 비서는 소주를 반쯤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전재형 회장님께서.”
[철의 여인 아니고?]
“전재형 회장님께서 성국 군의 미국 유학을 조심스레 추천하셨습니다.”
[뭐라고!]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나는 오늘 양 비서를 당연히 철의 여인이 보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도 피아노 영재로 나를 키워보려는 속셈으로.
그런데 지금 양 비서는 전재형 회장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 김미영 매니저 모두 놀란 눈치였다.
“양 비서님, 성국이 유학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물론 부모님이 허락하시면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아직 영재교육은 미비한 수준이지 않습니까. 성국 군 같은 인재를 좀 더 큰물에서 교육 시켜야 하는 게 맞다고 보시는 거죠. 곧 회장님 자녀분인 전미진 양과 전태국 군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거든요. 그때 제 아들과 함께 가는데, 성국 군도 같이 가면 어떨지 회장님께서 조심스레 제안하셨습니다.”
아빠와 엄마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혼란이란 없었다.
내 의견은 단호했다.
“싫어요.”
“성국아, 싫어?”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네에! 엄마, 아빠랑 떨어지기 싫어요.”
이건 표면적인 이유였고, 유학이라는 거 가봤자 내가 배울 건 별로 없었다.
이미 저번 생에서 지겹도록 한 게 유학 생활이었다.
거기다 전태국이랑 전미진과 함께라니. 그 꼴통들과는 어디도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
양 비서는 소주잔을 마저 비웠다.
“성국이 의견이 단호하네요.”
“양 비서님, 성국이 유학을 지원하신다는 것은 미국에서의 영재교육을 말씀하시는 거죠?”
김미영 매니저가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입니다. 우선 한 1년 정도는 적응 시간을 거쳐야 하겠지만, 성국 군의 지금 실력이라면 좀 더 단축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다음에 미국의 영재교육 프로그램에 성국 군을 입학시킬 예정입니다.”
[뭐야! 다 계획했네, 했어.]
나는 쀼루퉁한 얼굴로 양 비서를 바라봤다.
“성국 군이 훌륭한 인재로 자라만 준다면 저희 삼전 쪽에서는 무척 기쁜 일이거든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아무래도 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시죠. 이번 달 말까지 고민의 시간 드리면 될까요? 유학 절차를 밟으려면 그 정도 시간은 있어야 해서요.”
“네, 그럴게요. 성국이 의견도 중요하고요.”
“성국 군은 유학을 안 가더라고 여기서도 분명 뛰어난 인재로 성장할 겁니다.”
[난 이미 뛰어난 인재라고. 걱정 마, 양 비서.]
* * *
나는 베개를 안고 일부러 엄마, 아빠, 민국이가 자는 방으로 갔다.
오늘은 아무래도 여기 구석에서 자면서 엄마, 아빠 대화를 엿들어야 할 것 같았다.
민국이 녀석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나는 민국이 옆에 베개를 놓고 누웠다.
“성국아, 오늘은 여기서 자게?”
엄마가 내 배를 도닥였다.
“응.”
“그래, 오늘은 우리 네 식구 모두 여기서 자자.”
막 씻고 나온 아빠가 수면등만 켠 채 안방의 불을 껐다.
이 좁은 방에서 네 식구가 자다니. 저번 생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민국이 녀석이 몸부림을 치면서 자꾸 팔로 내 얼굴과 배를 가격했지만, 참을 만했다.
[이게 다 사람 사는 거지.]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자는 척을 해야 엄마, 아빠가 대화를 시작할 것 같아서였다.
“성국이 자나 봐.”
엄마가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아, 아까 양 비서님이 하신 말씀 있잖아.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 생각이 안 나.”
[엄마, 아빠. 나 키우면서 이런 일 앞으로 수두룩할 거야. 각오들 좀 해.]
턱.
민국이의 팔이 내 얼굴을 또 가격했다.
[해보자는 거지?]
나는 몸부림치는 척 다리를 민국이의 다리에 툭 올려놨다. 그러자 민국이의 몸부림이 잦아졌다.
“소영아, 성국이를 이렇게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보내도 될까 싶어. 심지어 그 재벌 집 아이들이랑 섞여서.”
[난 싫다고 말했어, 아빠.]
“성국이도 싫다고 하고. 이렇게 뛰어난 아이이니 여기서도 잘해줄 것 같지만, 양 비서님 말대로 큰물을 접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너무 좋은 기회 같아서 망설여지네.”
[엄마, 저번 생에서 오대양 육대주, 내가 안 밟아본 데가 없다고 말했던가.]
“우리가 배운 게 너무 없어서 성국이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키나 고민되네.”
[아빠, 난 알아서 잘 크니까 걱정 말래두.]
턱.
민국이 이 녀석이 다시 다리를 내게 올려놨다.
나는 몸부림치는 척 다시 민국이를 제압했다.
“소영아, 성국이랑 민국이 좀 봐.”
“성국이 민국이 챙길 때 보면 정말 형 같아.”
[엄마, 인생의 짐이라서 챙기는 거야. 더 큰 짐이 될까 봐.]
아빠의 낮은 한숨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시간 좀 있으니 성국이 의견이랑 김미영 매니저 의견도 들어보자.”
“성국이 미래 생각하면 너무 좋은 기회인데. 또 이렇게 어린 애를 미국에 혼자 어떻게 보내. 아무리 요즘 해외여행 자유화라지만, 우리가 미국 가기 쉽지 않을 거잖아. 자기야, 나 성국이 보고 싶어서 맨날 울 것 같아.”
엄마는 아빠 품에 폭 안겼다.
저번 생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내 미래가 우선이었다. 한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도 틈틈이 해외에 수행원들과 나갔다. 바쁜 부모님이 나를 따라갈 일은 없었다. 보고 싶다는 말로 내가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젊은 엄마와 아빠는 벌써 내가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평범한 가정이겠지.]
나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민국이를 껴안았다.
[동생, 나 좀 위로해줘.]
“혀엉. 혀엉.”
민국이는 잠결에도 나를 찾으며 안겼다.
만약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면 평생 처음 가져본 이 안락함을 포기해야 하는 거겠지?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 * *
“성국아!”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어젯밤에 씁쓸함을 달래느라 늦게 잠들어서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어, 이 축축함은 뭐지?]
특히 바지 쪽이 축축했다.
엄마가 얼른 나를 일으켰다.
“성국아, 일어날 수 있지?”
“응!”
나는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민국이, 이 녀석. 오줌을 싼 모양이네.]
나는 민국이를 발로 툭툭 쳤다.
그런데! 민국이의 바지는 뽀송뽀송했다.
[설마… 내가 싼 거야?]
나는 얼른 바지를 만졌다. 팬티까지 아주 흠뻑 젖어 있었다.
엄마는 젖은 물수건을 가져오더니 내 몸을 닦았다.
“안 되겠다. 성국아, 욕실 가서 샤워하자.”
“엄…마.”
나는 놀란 목소리로 엄마를 찾았다.
“괜찮아. 우리 성국이가 많이 피곤했나 보네.”
엄마는 나를 꼭 안아 들고는 욕실로 걸어갔다.
나는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콕 박았다.
이건 전성국 인생 최대의 쪽팔림이었다.
[내가 오줌을 싸다니! 내가! 이 전성국이!]
“성국이 이 녀석,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도 오줌싸개잖아.”
아빠가 놀리듯 다가왔다.
[아빠, 조용히 해!]
귓불까지 붉게 타올랐다.
“성국아, 아빠도 사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밤에 오줌 쌌어. 그땐 고아원 원장 선생님이 얼마나 혼내던지.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자기야, 성국이 놀리지 마.”
엄마는 얼른 내 옷을 벗기더니 따뜻한 물로 내 온몸을 씻겼다.
이런 치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기저귀를 뗀 이후로는 용변은 타이밍에 맞춰서 조절했다.
가끔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밤에 자면서 이불이 다 젖게 오줌을 싼 건 다섯 살 인생, 아니 전생까지 합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영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가?”
“밤에 오줌 싸는 이 녀석을 어떻게 미국에 혼자 보내. 나 어릴 적에 고아원 원장 선생님한테 혼날 때 정말 서러웠어. 엄마, 아빠가 있었어도 나한테 이렇게 혼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부모 없는 게 어린 나이에도 정말 서러웠다니까. 우리 성국이도 미국 가서 혼자 지내다가 실수라도 하면 우리가 못 지켜주잖아.”
[아빠, 뭔 소리야. 여태까지 내가 엄마, 아빠 지켜준 거잖아.]
“으이구, 이 오줌싸개. 너 좀 더 커서 미국 가자. 성국이 혼자서도 다 알아서 해결할 때까지, 아빠랑 엄마가 옆에서 꼭 붙어서 지켜줄게. 알았지?”
뭉클.
또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 철없는 어린 엄마, 아빠야! 왜 니들이 날 지키냐고! 내가 지킨다고!]
“흐어엉-.”
속마음과 달리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자기야, 저리 가. 아침이나 차려줘. 성국이 창피해서 울잖아.”
나는 엄마에게 푹 안겼다.
엄마는 연신 내 등을 도닥였다.
“성국아, 괜찮아. 아빠가 놀리느라 그러는 거야. 우리 성국이가 평소에 안 하는 짓 하니까. 이제 오줌 안 쌀 거지?”
“엄마.”
나는 훌쩍이며 엄마를 불렀다.
“성국이, 서러웠어?”
“엄마, 나 지켜줄 거야?”
“당연하지. 엄마랑 아빠는 성국이 지켜주려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야. 알지?”
“응!”
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엄마에게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