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37화 (37/231)

제37화

가족회의가 열렸다.

이제는 가족과 같은 김미영도 함께였다.

민국이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모두가 모인 이유는 다 나 때문이었다.

바로 나의 유학 문제.

[정말 비범하게 태어난 것도 골치 아픈 일이구나.]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짜장면을 먹었다.

오늘 저녁은 특별히 나를 위한 짜장면이었다.

아빠가 짧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양 비서님께서는 성국이는 미국 유학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시더라고요. 이번에 회장님 자녀들이 모두 미국 가는데, 거기 함께요. 아무래도 성국이 같은 영재를 국내에서는 교육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시면서요.”

김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흘금 김미영의 짜장면을 쳐다봤다.

[김 매니저, 안 먹을 거면 내가 좀 더 먹어도 될까?]

요즘 키가 크느라 배 속이 계속 헛헛했다.

김미영은 내가 짜장면을 훔쳐보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짜장을 덜어줬다.

“성국아, 많이 먹어.”

“네에, 감사합니다.”

나는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짜장면을 호로록 흡입했다.

“부모님들 생각은 어떠세요?”

김미영이 엄마와 아빠를 조심스레 쳐다봤다.

“저희야 아이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한데요. 언니, 그래도 성국이 미래를 위해서면 미국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천재를 저희가 키우다가 평범해지면 어떻게 해요.”

[엄마, 나 천재 아니야. 아이큐 겨우 121이라고. 에휴.]

“성국이 아버지는 어떠세요?”

“소영이는 아무래도 엄마니까 교육 문제에 좀 더 예민해요. 근데, 어제 글쎄, 성국이가 안 싸던 오줌을 쌌더라고요.”

“아빠!”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빠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이 창피하구나.”

[하아, 이건 비밀이라고!]

김미영과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른들이란….]

정말 종종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얼마나 예민한지 잊을 때가 있었다.

나는 그냥 짜장면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유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기야, 성국이 창피해하잖아. 그만해.”

“알았어, 알았어. 실수 같은 거 잘 안 하는 성국이가 실수하니까, 성국이도 아직 애기지. 그런 생각도 들고, 난 좋더라고.”

[애기 아니거든.]

나는 짜장면을 후루룩 먹곤 입을 앙다물었다.

“그럼, 성국이 아버지는 성국이 유학 반대 입장이신 거네요?”

“지금은 좀 이르지 않나 싶어요. 겨우 다섯 살이잖아요. 입는 거, 씻는 거 다 돌봐줘야 하는 나이라고요. 아무리 삼전 그룹에서 보조해 주신다고 해도 부모만 못하잖아요.”

[아빠, 내가 말을 안 했나 본데. 저번 생에서는 다섯 살 때부터 외국 수없이 왔다 갔다 했어. 엄마, 아빠는 당연히 없었고. 의전팀이 있긴 했네.]

“성국이 아빠는 그런데, 나는 이 기회 놓치기가 아깝고 그래요, 언니.”

“두 사람 마음 다 이해되네.”

나는 호로록 짜장면을 먹었다.

김미영이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는 어때?”

[흠….]

나는 이성을 다잡고 저번 생의 전성국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미 저번 생에서 다 경험한 유학이라 선뜻 내키지 않는 게 속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천재도 아니었다.

저번 생의 경험치가 누적되어 무척 뛰어난 아이일 뿐이었다.

미국의 영재교육 시스템 아래에서 아마 그들은 내가 노벨상 하나쯤 탈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냉철한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안락한 엄마, 아빠 품에서 유년기를 보내는 게 맞지 않을까? 짜장면이나 실컷 먹으면서. 뭐,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 민국아! 민국아, 왜 그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민국이가 사라졌다.

엄마가 얼른 안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민국이 녀석,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이때, 안방에서 민국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아앙- 형아- 형아-.”

[왜 나를 찾고 그러는 거야. 귀찮게.]

“민국아, 왜 그래?”

“형아. 형아.”

엄마가 달래도 민국이는 울 뿐이었다.

[내가 나서야 하는 건가.]

나는 짜장면 먹던 포크를 놓고 안방으로 걸어갔다.

민국이가 울면서 내 옷이 든 옷장 서랍을 헤집고 있었다.

엄마가 민국이를 말렸다.

“민국아, 왜 그래. 그거 형아 옷이야.”

“으아아앙-.”

[참 시끄럽게 우네.]

민국이는 옷장에서 연신 내 옷을 빼다가 이불 아래에 숨기고 있었다.

[민국아, 네가 숨기는 거 다 보여.]

엄마는 민국이를 제지했지만, 민국이는 엄마마저 밀어버리고 옷을 계속 숨겼다.

나는 얼른 민국이한테 다가갔다.

[너, 손님도 와 있는데 떼쓰면 형아가 혼낸다.]

민국이의 얼굴은 이미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형아.”

[형아 왜 찾아?]

민국이는 갑자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손으로 나를 꽉 안았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힘이 세졌지?]

“놔아, 민국아.”

내가 몸을 틀수록 민국이는 나를 더 세게 안았다.

“형아. 가디 마.”

“어?”

“형아. 가디 마.”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형, 미국 유학 가지 말라고?]

“형아. 밍구기랑 여기 사라. 가디 마.”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이 녀석이 내 옷을 숨긴 것은 내가 떠날까 싶어서였다.

민국이는 나를 꽉 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하도 울어도 쉰 목소리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형아. 가디 마. 밍구기랑 여기 사라. 가디 마.”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또 감동시키는 건데!]

저번 생에서 짧은 연수나 유학을 갈 때에도 동생들은 울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경쟁자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눈치들이었다.

“크응-.”

민국이는 코를 쭉 들이켰다.

[더럽게.]

나는 한 손으로 휴지를 집으려고 했지만, 민국이 때문에 손이 닿지 않았다.

“밍구가, 이거 놔.”

“시로, 형아. 어디도 못 가.”

[정말 이 녀석.]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밍구가, 형아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

“진따?”

밍구기는 눈물을 뚝 그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형아, 진따야?”

“응. 형아 안 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 * *

삼성동의 전재형 회장의 집은 한남동의 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한남동이 철의 여왕의 취향에 맞춰서 프렌치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추구했다면, 이곳은 전재형 회장의 취향이 그대로 묻어났다.

모던한 가구들과 전재형 회장이 선호하는 잭슨 폴의 작품들이 곳곳에 보였다.

잭슨 폴의 그림은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구하기 힘들었다.

전재형 회장은 막 위스키를 따르던 참이었다.

양 비서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남동 자택에서와 똑같은 것은 양 비서밖에 없었다.

양 비서 역시 전재형 회장을 따라서 인근으로 이사를 온 터였다.

“회장님 취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인테리어네요.”

“한남동 집은 너무 안락해서 영 내 취향이 아니었어.”

“잭슨 폴 작품을 이번에 많이 구매하셨는데, 꽤 마음에 드시나 봐요?”

“난 고전보다는 모던한 게 취향이거든.”

전재형 회장은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라 양 비서에게 내밀었다.

“이사하느라 양 비서도 수고했어.”

“제 일인걸요.”

양 비서는 잔을 받으며 낮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오늘은 보고할 일이 있었다.

“태국 군과 미진 양 유학은 잘 진행 중입니다. 사모님께서도 초기에는 같이 가셔서 적응할 때까지 같이 계실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태국이 사고 안 치게 주의 좀 기울이게.”

“걱정 마십시오. 동기 중에 태국이 친구들도 몇 명 심어뒀고, 모두 저희에게 보고할 것입니다.”

전재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유학 시절에도 그랬다. 돌아가신 아버지 전주신 전 회장 역시 전재형 회장이 유학하는 곳곳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몇 명을 심어두고 보고를 받았다.

지금 전재형 회장이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성국 군은….”

전재형 회장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더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성국 군은 이번에 같이 안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의외인데….”

전재형 회장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됐다.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리다니.

“혹 성국이 부모들이 말린 건가. 평범한 사람들은 항상 그렇잖아. 가족이 더 중요하고, 아이를 끼고 자신들이 돌보아야 한다고 말이야.”

“물론 성국이 부모님의 입장은 그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국이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유학을 꽤 진지하게 고민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으셨거든요.”

“그런데?”

“성국이가 결정한 일이라고 합니다.”

“겨우 다섯 살한테 결정을 맡겼다는 말인가?”

“가족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흠….”

전재형 회장은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정말 납득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생의 단계를 점프할 수 있는 이런 소중한 기회를 날려 버리다니.

“성국이가 뛰어난 아이이긴 하지만 아직 다섯 살이라 부모들의 손이 많이 갈 나이 아니겠습니까. 성국이 정도면 앞으로도 충분히 지켜보다 유학을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겠지. 다섯 살. 어리긴 하지.”

전재형 회장은 아쉬움을 삼켰다.

삼전 그룹을 이끌 차세대 인재라면 당연히 앞으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 * *

유학 이야기가 오간 이후로 민국이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옷을 갈아입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형아. 응아해?”

“보면 몰라?”

내 인내심도 점점 바닥이 나고 있었다.

끄응.

나는 마지막 힘을 주고는 얼른 변기의 물을 내렸다.

“형아, 밍구기도.”

“너도 응아 마렵다고?”

“응.”

나는 밍구기를 끌고 유아용 변기에 앉혔다.

“힘줘.”

“으응. 형아.”

민국이는 힘을 주면서도 내 손을 꼭 쥔 채였다.

[경쟁자 녀석이 이젠 껌딱지가 되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녀석 덕분에 이성적으로 판단을 다시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겨우 민국이가 날 붙잡고 오열해서 유학을 포기한 것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민국이와 손을 잡고 잔 그날, 나는 내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삼전 그룹이었다.

만약 지금부터 삼전 그룹의 후원까지 받아 유학까지 간다면 나는 이번 생에서도 삼전 그룹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

내가 원한 진짜 삶은 이번 생에서 나 스스로 대한민국 최고가 되는 일이다.

“형아, 응아 끄읕.”

민국이가 나를 향해 엉덩이를 내밀었다.

[지금 뒤도 닦아달란 거냐?]

“형아.”

“하아….”

단전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 정말 유학 포기한 거 잘한 거지?]

나는 한 손으로 코를 잡고, 휴지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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