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오디션이 모두 끝났다.
곽 감독이 직접 나와서 오디션에 참여한 부모와 아이들이게 인사를 했다.
“멀리까지 와주셔서 다들 감사합니다. 오늘 오디션에서 메인 모델 한 명이랑 서브 모델 세 명을 뽑을 거거든요. 우선 메인 모델로는 전민국.”
“녜에!”
민국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번쩍 손을 들었다. 그 바람에 대기실 안은 웃음이 터졌다.
“그래. 네가 메인 모델이야, 민국아.”
재희의 엄마는 대놓고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다음은 서브 모델인데요. 김서준, 최다해 그리고 이재희입니다. 후보 모델들은 조연출이 따로 연락드릴 겁니다.”
재희의 엄마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재희를 쳐다봤다.
“재희야, 네가 됐어.”
재희는 나를 흘금 쳐다보면서 눈을 찡긋했다. 고맙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인사는 무슨. 앞으로 이 바닥에서 잘 견뎌봐.]
나는 조용히 손을 흔들어줬다.
“혀엉.”
민국이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민국이가 헤벌쭉 웃고 있었다.
“혀엉, 바아갑 해떠.”
“민국아, 뭐라는 거야? 바아갑. 그게 무슨 의미야?”
[엄마, 민국이가 밥값 한단 소리야.]
곽 감독이 다가와서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이 이 녀석.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저희 성국이 많이 컸죠?”
“성국이 진짜 더는 아역 안 시키실 거예요? 이젠 드라마 나와도 될 것 같은데요.”
[곽 감독. 나 공부하느라 바빠.]
“성국이가 공부에 재미가 들려서요.”
“감독님, 성국이 영어랑 프랑스어도 해요.”
엄마 대신 김미영이 내 자랑을 대신 해줬다.
“진짜요?”
“김 대표님, 자랑은 창피해요.”
“뭐가 창피해요. 삼전 그룹에서 성국이 후원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다 했어요.”
“정말 대단하네, 이 녀석. 어릴 적부터 워낙 똘똘해서 똑똑한 줄은 알았어요. 성국아, 너 성공하면 나 잊으면 안 된다.”
[당연하지, 곽 감독. 나를 처음 데뷔시켜준 은인인데. 난 은혜는 꼭 갚아. 그러니 건강만 하라고.]
곽 감독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 좋은데, 제가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촬영 날 끝나고 다 같이 식사하시죠.”
“스케줄 비워둘게요.”
김미영이 대답했다.
* * *
“자, 형아가 오늘부터 교육할 거야.”
나는 민국이를 앞에 앉혀놓고 힘을 팍 주어 이야기했다.
“형아, 겨우융!”
“그래! 오늘부터는 내 말만 듣는 거야. 밍구기.”
“녜에!”
민국이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이미 엄마가 받은 콘티를 다 외운 후였다.
세제 광고는 간단했다. 서브 모델인 아이들 셋이 음식, 땀, 흙 등 각종 오염을 옷에 묻혀 온다.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임선미.
그때 세제가 생각나고, 각종 오염에 노출된 옷을 그대로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넣는다.
세탁 후에 깨끗해진 옷들. 그리고 드디어 민국이 차례이다.
그 깨끗한 옷들 위에서 뒹구르르 구르다 코를 박고 잠이 들면 된다.
임선미는 잠이 든 민국이 옆으로 와서 웃으면서 속삭인다. “깨끗해요.”
[이 광고는 뭐, 껌이네. 뒹구는 거랑 잠자는 포즈만 우선 연습시키면 되겠어.]
나는 민국이를 엄한 눈으로 바라봤다.
“밍구기! 고대로 있어.”
“녜에, 형아.”
나는 얼른 안방으로 달려가서 옷장을 열고 얇은 이불을 손에 잡히는 대로 끄집어냈다. 그 이불들을 거실 바닥에 조르륵 깔았다. 나는 이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밍구기, 올라가.”
“녜에.”
밍구기는 아장아장 이불 위로 올라갔다.
나도 이불 위로 올라갔다.
“밍구가, 이제부터 형아가 하는 거 고대로 따라 해봐.”
“응!”
나는 과거 톱 모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불 위를 뒹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표정이었다. 깨끗한 옷에 뒹굴면서 행복감으로 까르르 웃는 아이 천연의 웃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이불 위를 뒹굴며 행복감에 젖은 얼굴로 까르르 웃어젖혔다.
짝. 짝. 짝. 민국이가 손뼉을 쳤다.
“형아, 쵝오!”
[민국아, 네가 모르나 본데. 한때 대한민국 광고는 딱 두 가지였어. 전성국이 나오는 광고와 안 나오는 광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민국이를 쳐다봤다.
“밍구가, 이렇게 해봐.”
“응, 형아!”
민국이는 나를 따라 뒹굴었다.
하지만 뒹굴면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엔. 지! 그건 아니징.”
나는 민국이에게 다시 데구루루 구르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연기를 선보였다.
“밍구가, 웃는 게 뽀인트. 알았어?”
“녜에!”
민국이는 두 주먹을 앙 쥐더니 이불 위를 구르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어색했다.
“밍구기 다시!”
밍구기는 또다시 이불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구를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였다.
나는 뒷짐을 진 채 교관처럼 민국이를 쳐다봤다.
[흠…. 나에 비해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끈기는 있네.]
하지만 나는 완벽을 원했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고,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민국이도 아역 모델로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밍구기 다시!”
“녜에!”
민국이는 다시 데구르르 구르며 미소까지 지었다.
그렇게 구르기를 열두 번째.
나의 코칭으로 드디어 민국이는 완벽한 구르기 자세와 미소를 터득했다.
“밍구기 그만!”
“형아. 그만?”
“잘했어.”
민국이는 내 말 한마디에 다시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마저 연습하자.”
“녜에!”
나는 민국이에게 뒤에 숨겨둔 바나나 우유를 내밀었다.
민국이는 목이 말랐는지, 바나나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전민국.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
비록 얼굴도 나보다 못하고, 머리도 나보다 나쁘지만 근성이 보였다. 저번 생의 남동생 전태국과 다른 점이었다. 전태국은 뭐든지 쉽게 포기하고, 쉽게 싫증을 냈다.
나는 민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르기 몇 번 했다고 얼굴이 핼쑥했다.
나는 얼른 부엌으로 가서 이모님의 바지를 당겼다.
“성국아, 민국이랑 다 놀았어? 뭐 필요해?”
“밍구기 간식이요.”
“민국이 배고프대?”
“네!”
“알았어. 아침에 사온 카스텔라랑 바나나 가지고 갈게. 민국이랑 마저 놀고 있어.”
잠시 후, 이모님이 가져온 카스텔라와 바나나를 모두 민국이 앞으로 밀었다.
민국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슬쩍 봤다.
“형아는?”
“형아 배불러. 밍구기 먹어.”
“진따?”
“응. 어서 먹어.”
“응!”
민국이는 카스텔라와 바나나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민국이는 나와 달리 볼살이 좀 없는 편이었다. 아역은 볼살이 있어야 화면에서 오동통하니 귀엽게 나왔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도 그런 거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와 민국이는 콘티를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서 연습 그리고 또 연습을 했다.
드디어 대망의 촬영 날이 다가왔다.
유치원이 쉬는 주말이라 나도 촬영장에 따라나섰다.
촬영장은 내가 처음 광고를 촬영한 남양주의 세트장이었다.
엄마와 민국이가 대기실로 먼저 들어가고, 나와 김미영 대표가 천천히 뒤따라갔다.
“성국아, 너두 촬영하고 싶지 않아?”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거 싫었던 거야?”
“아니요.”
“그럼, 다시 서고 싶지 않아?”
“공부가 더 재미있어요.”
나는 촬영장에서 대기하면서 볼 영어 원서 두 권을 챙긴 상태였다.
“성국아, 다시 이 일 하고 싶으면 언제든 이모한테 말해.”
“녜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 김 대표. 이제 IMF 고작 1년여 남짓 남았다고. 그동안 공부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공부를 해야 제대로 된 투자를 한다고.
* * *
촬영이 시작됐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고, 민국이의 단독 샷이 시작됐다.
민국이는 나와 함께한 7일 동안 매일 구르고 웃으며 이 한 장면을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곽 감독이 모니터를 보면서 소리쳤다.
“민국아, 잘하자. 자, 그럼 고!”
짧은 외침과 함께 카메라가 돌아갔다.
민국이에게 연기 지도를 하는 조연출이 앞에서 민국이가 해야 할 행동을 보여줬지만, 이미 민국이는 콘티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내 덕분이었다.
민국이는 완벽하게 구르더니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컷!”
곽 감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김미영을 쳐다봤다.
“김 대표님, 민국이 연기 지도 받아요?”
“콘티는 미리 알려 줬습니다.”
“이 집은 뭐, 연기 재능이 핏줄로 흐르나 봐요. 거의 오케이 컷인데. 그래도 몇 컷 더 가보자.”
카메라는 다시 돌아갔다.
그때마다 민국이는 완벽한 연기를 했고, 늘 똑같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흠…. 배운 건 잘하는데 그 이상은 어렵군.]
나는 냉정하게 민국이를 평가했다.
민국이는 나와 연습한 구르기와 미소,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완벽하게 구현했지만 현장에서의 애드리브는 없었다.
선생으로서 나는 민국이를 냉정하게 파악했다.
다음 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곽 감독과 관계자들의 눈에는 완벽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완벽한 모사에 가까웠다.
“자, 민국이 끝났으니 서브 모델들 준비시켜요.”
민국이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줬다. 부족한 재능으로 저기까지 한 게 대견해서였다.
“성구가.”
뒤에서 이재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재희는 새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콘티에 나와 있는 옷에 케첩이 튀는 연기를 하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재희야, 할 말 있어?”
“나 연기 좀 도와줘.”
재희는 나에게 조심스레 도움을 요청했다.
“저번에 네가 알려줘서 합격했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이는 모두 포용하는 게 내 원칙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 도와줘?”
“이때 표정을 잘 모르겠떠.”
재희는 케첩이 옷에 튈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했다.
“케첩이 옷에 튀면 엄마한테 혼날 걸 떠올려봐. 재희야.”
“아하….”
재희는 한 번에 알아듣고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고마워, 성구가.”
“홧팅!”
“응!”
재희는 그길로 촬영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덕풍 제지 며느리는 오늘도 저번 날과 같은 유행 지난 명품 옷과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엄마 그늘 아래에서 주눅 든 재희였기 때문에, 내 말은 재희의 연기를 100프로 끌어올릴 것이다.
곽 감독이 김미영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민국이는 모델 일 계속할 생각이 있는 거죠?”
“오늘 끝나고 가서 상태를 좀 봐야 할 것 같긴 해요. 아직 아기잖아요. 처음이고요.”
“혹시 괜찮으면 주말극에 주인공 남자 아들로 나올 세 살쯤 되는 아이를 찾고 있거든요. 민국이네만 관심 있다면 한번 지원해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한번 민국이 어머니랑 상의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다음 주 수요일 오디션이니까, 늦어도 화요일에는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곽 감독은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촬영장으로 급히 들어갔다. 아직도 남은 촬영이 많았기 때문이다.
민국이가 아장아장 걸어와서 내 손을 꼭 쥐었다.
“형아, 나. 잘했떠?”
“응.”
나는 민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민국이는 주말극에 나올 아역 오디션에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민국이가 촬영장을 즐거워했고, 그 이후로 계속 엄마를 쫓아다니면서 광고의 한 장면을 수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탠드를 켜고 주말드라마 <끝사랑>의 대본을 펼쳤다.
극 중반에 나오는 남자의 첫사랑 여자가 몰래 낳은 자식 역할에 민국이가 응시했다.
그림을 그리는 재능은 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공장을 다니는 남자 주인공은 부유한 집안의 대학생인 여자 주인공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안 여자 주인공 집안에서는 깡패를 시켜서 남자 주인공을 죽이려고도 하지만, 여자 주인공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난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과 헤어진 후 그림은 때려치우고, 카지노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대표의 눈에 들어 대표의 딸과 혼인까지 약속한다.
유학을 떠난 여자 주인공은 집안이 쫄딱 망하는 바람에 다시 돌아오지만, 그녀에게는 남자 주인공 사이에서 낳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거 완전 막장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