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퍼스트 클래스에 올라탔다.
삼전 그룹 자제가 있는데, 비즈니스는 말도 안 됐다.
간혹 보여주기식으로나 서민 체험을 위해서 일반석을 탄 기억이 있었지만, 일회성일 뿐이었다.
저번 생에서는 마일리지 야무지게 쌓아 올려 퍼스트 클래스 타는 서민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기본적으로 혼자 타는 것을 즐겼었는데….
나는 익숙하게 손에 꼭 쥔 티켓을 제시하고 양 비서의 인솔에 따라 비행기에 들어갔다.
[내 좌석이 어디지?]
내가 두리번거리자, 양 비서가 티켓을 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성국이는 여기.”
“감사합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담당 스튜어디스가 와서 짐과 안전벨트를 정리해줬다. 다행히 전미진은 내 앞자리였다. 그래도 연신 뒤돌아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성구가, 내 옆에 앉아.”
[응, 거절할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양 비서가 얼른 전미진을 도닥였다.
“아가씨, 애니메이션 틀어 드릴까요?”
“스누피요.”
“잠시만요.”
양 비서가 전미진의 시선을 돌려준 덕분에 나는 배치된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1996년은 IMF 이전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기사 어디에도 경제 위기를 의식하는 내용은 없었다.
손이 작으니 다음 장 넘기기가 어려웠다.
“아저씨가 해줄게.”
[양 비서 아저씨 목소리는 아닌데, 누구지?]
전재형 회장은 신문을 넘겨주고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설마, 일부러 내 옆자리에 앉은 건가?]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 많지는 않지만, 굳이 내 옆자리에 앉을 이유도 없었다.
양 비서가 오더니 얼른 전재형 회장의 짐을 마저 챙기고, 각종 신문과 경제 전문지를 세팅했다. 그리고 파일을 내밀었다.
“회장님, 미국 일정입니다.”
전재형 회장은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괜히 긴장이 돼서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번 생의 아버지. 이번 생의 남과 함께 LA까지 오랜 시간 비행을 해야 한다니 조금 긴장이 됐다.
비행기 이륙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나는 안전벨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전재형 회장은 나를 보더니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만졌다.
“성국이는 비행기 처음이라면서?”
“네에.”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고 차갑게 대답했다. 말을 많이 섞고 싶지 않았다.
저번 생에서 전재형 회장은 이렇게까지 나를 챙겨주지 않았다. 칭찬에도, 애정에도 인색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 나에게 이렇게 친절한 것은 왜일까? 결국, 내가 삼전에 필요한 인재이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조용히 이륙했다.
안전벨트를 풀라는 사인이 뜨자 전재형 회장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시켜주고는 자신은 샴페인을 마시며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나는 곁눈질로 전재형 회장의 일정을 슬쩍 살폈다.
삼전 전자의 해외 행보가 적혀 있었다.
이때는 한창 반도체를 키울 때라 대부분은 그쪽 관련 기업들과의 미팅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는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기업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전재형 회장은 고민을 잠시 하더니, 뒤쪽에 앉은 양 비서를 불렀다.
“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일정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여기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들 만나는 자리 있잖아. 오전에 반도체 관련 업체들 미팅인데, 너무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이번 일정에서는 빼지.”
[삼전이 그러니 덩치만 크지, 새로운 분야 진출이 더딘 거야. 전기차, 이런 거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성국아, 왜 그러니?”
[지금 나 본 건가.]
전재형 회장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방긋 웃었다.
“벤처 조아요.”
“성국아, 벤처가 뭔지 알아?”
“잡스도 벤처로 시작한 거자나요.”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성국아, 잡스도 알아?”
“녜에! 새로운 생각이 세상을 바꾸잖아요.”
전재형 회장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양 비서를 쳐다봤다.
“이 일정 그대로 하지.”
“네, 회장님.”
“참, 그날 참석할 벤처기업 명단과 분야 설명서 좀 두 개만 주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나는 가만히 신문을 넘겼다.
이때, 전재형 회장이 아들 전태국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태국은 막 애니메이션을 보다 호출당해서 싫은 티가 역력했다.
“아빠, 왜요?”
전재형은 양 비서가 건넨 벤처기업 명단을 전태국에게 넘겼다.
“태국아, 이거 쭉 훑어보고 투자할 만한 기업 있는지 체크해 봐.”
“지금요?”
전태국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나라면 좋다고 받아서 체크할 거였다.
“어서.”
“네, 아빠.”
전태국이 자리로 돌아가고, 전재형은 나에게도 벤처기업 명부를 건넸다.
“성국아, 이거 한번 볼래?”
테스트인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파일을 건네받았다.
“성국아, 이거 보고 재미난 회사 있으면 동그라미 쳐볼래?”
“네에!”
나는 손에 볼펜을 꽉 쥐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펼쳤다.
명단의 절반 이상을 꼼꼼히 읽어 내렸지만, 눈길을 끄는 회사는 없었다. 파일의 거의 끝에 가서야 내 눈을 확 잡아끄는 회사를 발견했다. 바로 T.com!
나는 얼른 T.com에 동그라미를 몇 번이고 쳤다.
T.com은 간편 결제 시스템인 페이썬의 전신이고,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일론 머스트가 세운 벤처기업이다.
[일론 머스트도 오나?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삼전 그룹의 부회장일 때도 일론 머스트와는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더 괜찮은 회사 또 있나.]
나는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겼다. 그리고 T.com만큼이나 대단한 대어를 하나 더 발견했다.
“구굴.”
나는 중얼거리면서 동그라미를 치고 또 쳤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세상을 지배하고 바꿀 두 개의 기업을 여기서 보다니!
확실히 90년대 후반은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등장했고, 이 한 손 안에 잡히는 핸드폰은 후에 모두가 포터블 컴퓨터를 손에 들고 다니는 효과를 만든다.
페이썬과 구굴은 손안의 세상의 중심이 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면서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회사들이 상장하는 날, 내가 할 일은 주식을 사들이는 일이었다.
“성국아, 다 봤어?”
“네에!”
나는 뿌듯한 심정으로 파일을 전재형 회장에게 넘겼다.
T.com과 구굴을 알아본다면 전재형 회장의 안목도 눈여겨볼 만했다.
[전재형 회장, 이제부터 테스트는 내가 하는 거야.]
만약 내가 고른 두 회사의 가치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면, 삼전 그룹의 미래도 뻔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전태국은 1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명단을 가져왔다.
시간만 때우다 온 게 너무 역력해 보였다.
[어릴 적부터 한심했네, 전태국.]
“아빠, 여기요.”
“태국아, 아빠가 첫날은 같은 호텔에 묵을 거거든. 같이 저녁 먹자.”
“네에, 아빠!”
전태국은 같이 저녁을 먹는다는 말에 기뻐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평소 자는 시간보다 더 늦은 시각이긴 했다.
다섯 살짜리들의 비행이니만큼 양 비서뿐 아니라 전담 유모도 모두 동행했다. 삼전 그룹이 아닌 개인 유모들이었다. 유모들은 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 아이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챙겼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는 일등석 자리에 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근데 왜 자꾸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을까. 거기다 민국이는 왜 보고 싶을까.
엄마, 아빠는 내 캐리어를 싸면서 제주도도 못 갔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당연 비행기도 한번 못 타봤다고 했다.
[통장에서 돈 좀 인출해서 제주도라도 가야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LA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전미진과 전태국은 미리 도착해 있던 철의 여인과 만나 스위트룸으로 먼저 올라갔다.
양 비서는 방을 배정하면서 미국 일정표를 나눠줬다.
양 비서가 나눠준 일정표에는 첫날은 휴식을 취한 뒤 다음 날 바로 유니버설 스튜디오 견학이 있었다.
[여러 번 가서 재미없는데.]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일정표를 봤다.
처음 맞는 인생이라면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재미있겠지만, 저번 생에서 이미 지겹도록 간 곳이었다.
내가 진짜로 가고 싶은 곳은 전재형 회장이 가는 벤처기업 박람회였다.
양 비서는 성국이를 챙겼다.
“성국아, 성국이만 유모가 안 오셔서 나랑 방을 같이 쓸 거야.”
“네에!”
물론 혼자서도 충분히 잘 수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가 짧아서 좀 불편하긴 했다.
김주성이 으스대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만 왜 15층이야? 우린 다 17층인데.”
[나는 완전 땡큐지. 너희들 안 마주쳐도 돼서.]
특별반에서 나의 위치는 이제 은따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의 천재성 때문에 나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조용히 모든 일에서 나를 따돌렸다. 그럴 때마다 전미진이 화를 냈지만, 이게 난 더 귀찮았다. 애들과 노는 것이 인생 사십까지 살다 온 나에게 재미있지도 않았고, 혼자인 게 더 편했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양 비서는 핸드폰을 받더니 끊고 내게 다가왔다.
“성국아, 회장님이 같이 저녁 먹자고 하시네. 우린 올라가서 준비할까?”
“네이!”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대체 왜 같이 밥을 먹자는 거지?]
전재형 회장의 마음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당황한 사이에 김주성은 유모에게 칭얼거렸다.
“저희는요? 배고파요.”
“저희는 원래 계획대로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할 겁니다, 도련님.”
“룸서비스 시켜도 되죠?”
“제가 시켜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쯧쯧. 철없는 것들.]
* * *
양 비서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성국아, 회장님이랑 여기서 식사를 할 거야.”
“네.”
나는 이제는 남인 저번 생의 아버지를 자주 보는 게 조금씩 마음에 걸렸다.
문이 열리고 나는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곳이었다.
LA에 오면 이 호텔 스위트룸에 항상 머물렀다.
“쟤는 또 왜 나타난 거야.”
이번 저녁에는 전태국도 함께였다.
[진짜 내가 할 말을 하고 있네.]
“성국아, 이리 오렴.”
전재형 회장의 부름에 따라 나는 얼른 식탁에 가서 앉았다.
“성국이는 햄버거 좋아할 것 같아서 아저씨가 도련님 거랑 함께 시켰어.”
[양 비서 아저씨, 저 스테이크 좋아해요.]
하지만 다섯 살이 스테이크 주문하는 건 무리였다. 햄버거나 먹는 수밖에.
음식이 준비되고, 막 비즈니스 통화를 마친 전재형도 식탁으로 왔다.
전재형의 손에는 비행기에서 나눠줬던 두 개의 명단이 있었다.
“자, 배고프지? 저녁 먹자.”
전재형은 자리에 앉더니 먼저 포크를 집어 들었다.
나와 전태국은 기다렸다 햄버거를 두 손에 쥐었다. 앙- 입을 크게 벌리고 햄버거를 씹기 시작했다.
전재형은 스테이크를 몇 조각 먹더니 나와 전태국을 번갈아 봤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번 생 아버지, 대체 무슨 꿍꿍이야?]
전재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너희들을 데리고 식사하니 기분이 좋네.”
“아빠, 엄마랑 미진이랑도 다음에는 함께해요. 성국이는 빼고요.”
“남은 일정 알아볼게.”
저 말은 철의 여인과 식사 자리는 없을 거란 의미였다.
“참, 너희들이 비행기에서 체크해준 명단, 다 흥미롭게 봤어. 우선 태국이는 재미있는 회사들을 많이 골랐더라.”
전재형 회장은 전태국의 명단을 휘리릭 넘겼다. 그만큼 볼만한 게 없다는 의미였다.
“아빠, 제가 찍은 회사들 재미있죠?”
“태국이는 투자에 대해서 기본기가 아주 좋아.”
[그럴 리가….]
“벤처 같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흥미이거든. 이 분야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발전 가능한지. 그걸 보는 게 아주 중요해.”
“헤헤.”
전태국은 헤벌쭉 웃었다.
전재형 회장의 지금 말은 전태국의 장점을 찾고 찾아 겨우 말하는 거였다.
“그리고 성국이는… 딱 두 회사밖에 안 골랐는데, 이유 물어봐도 되니?”
“요즘 뉴스 보니까요, 앞으로는 핸드폰으로 모든 걸 할 거 같아요. 은행도 가고… 음… 정보도 찾고요.”
나는 최대한 다섯 살답게 대답했다.
전태국 때와 달리 전재형 회장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자, 다시 식사하자.”
뭐지? 칭찬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구굴과 T.com을 고른 내 안목을 무시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