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44화 (44/231)

제44화

양 비서는 소주를 마저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국이의 유학을 다시 한번 추진해 주시면 어떨까요? 이번 미국 일정 동안 사실 성국이가 테스트 하나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영재교육 단체에서요. 그쪽에서 결과가 오늘 나왔는데, 성국이를 한번 공부시켜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비용은 저희 쪽에서 다 후원해 드리겠습니다.”

“흠….”

성국이 아빠는 잠시 고민했다.

성국이 녀석이 똑똑한 만큼 고집도 있었다. 뭐든 한번 아니라고 하면 아닌 아이였다.

“집사람이랑 성국이랑 다시 이야기해 볼게요.”

“그러셔야죠. 아마 성국이가 자신의 수준과 맞지 않는 아이들과 다니는 게 싫어서 유치원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성국이 아빠는 상념에 잠겼다.

정말 그런 걸까?

* * *

나의 대답은 분명하고 간결했다.

“아빠, 시러요.”

“성국아, 양 비서님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다 후원해 주신다고.”

“시. 러. 요.”

[아빠, 진짜로 내가 원하는 건 삼전 그룹이랑 인연을 끊는 거라고. 그 사람들이 주는 돈 꼬박꼬박 받아서 공부해봤자, 그 사람들을 위한 부품이 되는 거라고!]

나는 손을 앙 쥐었다.

“성국아, 알았어. 근데 유치원은 계속 다니는 게 어때? 친구들도 있잖아.”

[친구는 앞으로도 여러 기회로 사귈 수 있어.]

내가 삼전 그룹의 유치원을 다니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저번 생에서 나에게 진정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릴 적부터 같은 유치원과 학교를 다닌 비슷한 환경의 아이라면 친구라 여겼지만,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철저히 계산적인 것뿐이었다.

나는 등 뒤에서 내가 계획한 것을 아빠에게 내밀었다.

“아빠! 이거요.”

아빠는 물끄러미 내가 내민 종이를 봤다.

“계획서?”

“네에!”

크레파스로 삐뚤삐뚤 써진 내 인생의 계획서였다. 이런 것쯤은 보여줘야 엄마, 아빠도 내 의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전성국 인생 계획서

1. 유치원 자퇴 후 주식과 부동산 투자

2. 스무 살 이전에 재벌이 된다.

아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빠, 왜 그래? 스무 살 이전에 재벌이 되겠다는 내 계획, 끝내주지 않아?]

“소영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엄마는 민국이와 놀아주다가 다가와서 계획서를 보고는 놀란 눈치였다.

“자기야, 성국이가 쓴 거 맞아?”

“소영아, 아무래도 성국이 삼전 유치원 다니는 거 그만두는 게 맞는 것 같아.”

[역시 아빠는 내 뜻을 알았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기야, 성국이도 다섯 살인데 유치원은 다녀야지.”

“평범한 동네 유치원 알아보자. 애가 그 유치원에서 재벌 집 애들이랑 어울리더니 완전 돈밖에 모르잖아. 이게 어떻게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할 말이야!”

아빠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어, 이건 내가 원한 반응이 아닌데. 아빠, 나 원래 재벌 집 출신이라 돈밖에 몰라. 우린 내가 가진 돈을 어떻게 지키고 불릴 것인지에 대해서만 평생 배웠다니까!]

“자기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성국이한테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긴 한데, 성국이가 알게 모르게 거기서 차별받은 거 같아. 당장 다른 유치원 알아볼게. 성국이가 모아둔 돈도 많으니까, 성국이한테 맞는 교육은 우리가 시키면 되지.”

“그렇게 하자. 우리가 너무 그동안 삼전 그룹에 의존한 거 같아. 아무리 우리가 가난한 부모라 해도, 성국이를 돈밖에 모르는 애로 키울 수는 없잖아.”

[아빠, 엄마. 인생 기승전돈이라고!]

나는 엄마, 아빠의 뜻밖의 반응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방으로 걸어갔다.

“똑똑한 아이라 오냐오냐 사달라는 책 다 사줬더니, 죄다 경제 관련 책이고. 다섯 살짜리가 이렇게 자라면 안 되지.”

“앙 돼!”

나는 얼른 달려가서 아빠를 가로막았다.

“성국아, 아빠 화낸다. 어서 비켜.”

“앙 돼!”

“성국아, 아빠 정말 화 많이 났어. 비켜.”

“시러!”

“성국아!”

“아빠, 미워!”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엄마에게 맡겼다.

“소영아, 성국이 꼭 안고 있어.”

“자기야, 성국이가 좋아하는 책인데, 책은 천천히 없애자.”

아빠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엄마에게 안겨 울먹였다.

“어, 엄마. 나 다시 TV 나가고 싶어.”

“성국아, 진짜 다시 나가고 싶어?”

“응! 크응-.”

나는 코를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원 자퇴가 안 먹힌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아빠, 미워!”

나는 엄마에게 이르듯 말하고는 따뜻한 엄마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으어엉! 으어어엉!”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서럽게 울어댔다.

“자기야, 성국이가 TV 다시 나가고 싶어서 그런가 봐.”

“암튼 그 유치원은 더는 다니면 안 되겠어. 성국이 이제 여섯 살인데, 애가 애답게 커야지. 돈밖에 모르는 애로 자라면 되겠어?”

“자기야, 알았어. 성국이 좀 달래봐.”

그럴수록 난 더 엄마의 품을 파고들며 억울한 눈으로 아빠를 힐끔 쳐다봤다.

아빠가 다가오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그때, 아빠가 나를 품에 꼭 안더니 등을 두드렸다.

“성국아, 아빠가 화내서 미안해. 책은 안 건드릴게. 근데… 난 성국이가 평범한 애들처럼 친구들이랑 뛰어놀면서 자랐으면 좋겠어.”

[아빠, 제발 나의 특별함을 인정하라고. 평범한 건 좋은 게 아니야.]

잠시 후, 엄마와 아빠는 나를 앞에 앉혀두고는 팔짱을 꼈다.

아빠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성국아, 인생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아빠, 그건 나도 알아. 삼전 전자 후계자일 때도 그랬다고.]

“아빠와 엄마는 그 나이 때 맞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게 입장이야. 유치원에 다닐 나이 때는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초등학교에 다녀야 하는 거야.”

[아빠, 어서 본론을 말하라고. 나 좀 졸려.]

나는 하품을 쩌억 했다.

아이들은 본능적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국아, 아빠는 네가 계속 어떤 식으로든 유치원을 다녔으면 좋겠어. 그 대신 방송 출연도 허락할게.”

나는 턱을 매만졌다.

졸음은 계속 밀려왔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자기야, 성국이 졸린가 봐.”

“녀석, 아까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더니.”

“우선 오늘은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 소영아. 우리는 애들 재우고 맥주나 한잔하자.”

“알았어.”

엄마는 나를 안고 내 방으로 향했다.

엄마 품에 안기니 잠이 더 쏟아졌다.

유치원과 방송이라….

[아빠도 거래 좀 하네.]

나는 잠으로 스르륵 빠져들었다.

* * *

오랜만에 내 소속사인 SKJ 사무실에 앉아 바나나 우유를 쭉 들이켰다.

엄마와 김미영이 회사 일로 바쁜 사이, 잠깐 회사 소파에 앉아 여러 가지 브로셔를 들춰봤다.

내가 일을 그만둔 후 임선미의 1인 기획사처럼 돌아가다 요즘 민국이도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신인 연기자 모집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앳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여기 SKJ 기획사죠?”

거기에는 앳된 얼굴의 송혜선이 서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까지 번쩍 들었다.

[혜선아, 오랜만이야.]

“어머, 너 성국이 아니니?”

송혜선은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짧은 단발머리에 동글동글한 눈. 오뚝한 콧매와 일자로 뻗은 입술이 역시 자연미인이었다.

송혜선은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와, 진짜 예쁘게 생겼구나.”

송혜선은 교복을 입은 채였다.

[아직 고딩인 모양이네.]

김미영이 송혜선을 보고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뽑는다고 해서 왔습니다. 송혜선이라고 합니다. 여기 포트폴리오요.”

“네, 잘 볼게요. 완전 신인 아니죠?”

“교복 모델 몇 번 했습니다.”

“보고 연락드릴게요.”

송혜선은 나가다가 말고,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릴게요. 저 정말 성국이 팬이거든요. 그래서 이 회사랑 같이 꼭 일해보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우리도 포트폴리오 잘 볼게요.”

송혜선은 나에게 손을 흔들며 나갔다.

나중에 삼전 그룹 광고를 몇 개 해서 같이 여러 번 밥도 먹고, 시상식 같은 데서도 여러 번 만났다. 송혜선이라고 하면 어쨌든 청순가련의 대명사를 잇는 여배우가 된다.

“성국아, 바나나 우유 다 먹었어?”

“네에!”

엄마가 다가왔다.

“맛이 어때?”

“마시서요.”

“성국아, 이번에 광고할 거야. 어때?”

[잠깐만. 바나나 우유 광고를 내가 한다고?]

나는 어깨춤을 췄다.

“엄마, 조아요!”

여태까지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는 한 게 없는데, 바나나 우유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빠와 나는 삼전 유치원을 계속 다니는 조건으로 대신 광고 촬영만 하기로 했다. 아빠는 민국이는 유치원 안 다니는 아기라 상관없지만, 어느 곳을 다니는 이상 결석이 많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제안에 타협을 했다.

어쨌든 수준 안 맞는 유치원생들 만나는 것보다야 삼전 그룹 유치원 특별반에서 각종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나았다.

김미영이 포트폴리오를 한가득 가지고 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성국이 엄마, 이번 주에만 들어온 포트폴리오예요. 여기서 한번 추려봐요. 이만큼은 간단한 경력이 있는 모델들이고요, 나머지는 아무 경력도 없는 친구들이에요.”

방금 전에 포트폴리오를 두고 간 송혜선의 파일도 보였다.

엄마와 김미영은 포트폴리오를 쭉 훑어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엄마와 김미영이 다 본 포트폴리오를 쑥 훑었다. 하지만 송혜선만큼 눈에 들어오는 배우는 없었다.

“언니, 이 친구 어때요?”

엄마는 늘씬한 미인의 포트폴리오를 김미영에게 내밀었다.

“괜찮은 거 같은데, 너무 미인이라 전형적인 역할만 들어올 거 같기도 하고요.”

[역시 김미영 매니저가 뭐 좀 아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주인공 하려면 미스코리아보다 송혜선처럼 예쁘고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가 나아.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먹힌다고.]

엄마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미인대회 출신이기도 하네요.”

“아, 맞다.”

김미영은 생각난 듯 포트폴리오를 뒤적이더니 송혜선 파일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좀 전에 온 친구거든요. 학생 같은데, 실제로 봐도 괜찮았어요. 화면발도 잘 받을 거 같고, 이미지도 좋구요.”

“키가 너무 작지 않아요?”

엄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송혜선은 키가 작아도 그에 못지않은 아우라가 있어.]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찬성!”

“성국아, 지금 뭘 찬성한다는 거야?”

김미영이 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송혜선의 얼굴을 꾹 눌렀다.

“차안성!”

“성국이 엄마, 성국이도 송혜선 이 친구가 마음에 드나 본데요.”

[김 매니저, 이건 사심이 아니야. 송혜선은 앞으로 엄청나게 돈을 벌어다 준다고.]

엄마가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엄마가 언제는 세상에서 제일 좋다며?”

“엄마가 제일 조아!”

나는 엄마를 꼭 껴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