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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45화 (45/231)

제45화

“송혜선이라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친구인데, 들어오자마자 바로 광고 하나 잡힌 거 있지?”

엄마가 아빠에게 종알거렸다.

“자기 보는 눈 있네.”

“사실은 나는 그냥 그랬는데, 미영 언니랑 성국이가 완전 찬성이었어.”

아빠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성국이 이 녀석, 사람 보는 눈도 있네.”

“성국이도 이번에 바나나 우유 광고 찍고, 또 바로 하나 들어왔어.”

[아빠,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광고에 복귀한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물밀듯이 광고가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내 이미지를 고려해서 광고를 선택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얼른 통장을 꺼내 내 눈앞에 내밀었다.

“성국아, 이게 얼마인 줄 알아?”

“4억!”

나는 소리쳤다.

“이제 성국이가 숫자 세는 건 놀랍지도 않네.”

아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유치원 이제는 다닐 만해?”

“네에!”

나는 엄마, 아빠 걱정시키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다.

여전히 서열은 존재했고, 나 같은 평민을 향한 그들의 시선은 동정에 가까웠다. 그래도 여전히 영어와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저녁 8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아빠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양 비서님. 지금이요?”

아빠는 전화를 끊더니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성국아, 옷 좀 입자.”

“왜요, 아빠?”

“미진이가 내일모레 일찍 출국하는데, 내일 너 촬영 때문에 유치원 빠진다고 인사하고 싶대.”

[하아. 정말 전미진….]

전미진 덕분에 유치원 생활 편하게 한 것도 있었으니, 마지막 인사쯤이야 해주지.

엄마는 얼른 내 겉옷을 챙겨서 나왔다.

“자기야, 난 민국이 보고 있을게.”

“응. 나랑 성국이랑 빨리 다녀올게. 들어오는 길에 맥주 사올까?”

“좋지.”

[난 바나나 우유!]

“이 녀석, 뭐라 종알거리는 거야. 성국아, 어서 가자.”

나는 마지못해 아빠 손에 끌려 나갔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누가 봐도 이 동네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었던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내가 아빠랑 손잡고 뛰듯이 걸어가자 차 뒷문이 열리더니 전미진이 한껏 꾸민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이미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울지 마. 더 못생겨 보여.]

“성, 성국아. 크응.”

전미진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혼자 훌쩍였다.

[난감한데.]

“성국아!!!”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나를 향해 뛰어왔다. 이때, 바닥에 넘어지는 바람에 흰 스타킹 무릎에 구멍까지 나고 피도 흘렀다.

[칠칠맞긴.]

양 비서가 얼른 뒤따라와 전미진을 일으켜 세웠다.

뒷문이 열리더니 의외의 인물이 내렸다. 바로 철의 여인이었다.

나는 전미진보다는 철의 여인이 이 밤에 이런 자리까지 쫓아온 게 신기했다. 철의 여인도 엄마이다 보니 아이들을 케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밤에는 비즈니스 미팅으로 바빴기 때문이다.

전미진은 아픔도 꾹 참고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며 내게 걸어왔다.

아빠가 은근히 내 손을 놨다.

“성국아, 너도 가봐.”

[아빠, 지금 혹시 내가 전미진에게 달려가 안아주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 떠올리는 거야?]

아빠는 내 등을 슬며시 밀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전미진에게 걸어갔다.

전미진은 아픔도 잊고 다시 뛰더니 나를 왈칵 안았다.

“성국아, 나 미국 가.”

[전미진, 이러는 거 아니야. 우리 전에 가족이었어. 그것도 아주 사이 나쁜 가족.]

“성국아, 나 너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성국아, 나 잊지 마. 알았지?”

“그래.”

예의상 대답은 해줬다.

떠나는 마당에 가슴에 대못 박을 필요도 없었고, 전미진의 성격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일주일만 지나면 브래드 피트 닮은 남자애한테 빠져서 나는 잊어버릴 게 뻔했다.

갑자기 전미진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성국아, 우리 다시 만나면.”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결혼하자.”

“싫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국아, 뭐라고?”

전미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시 묻자 뒤에 서 있던 철의 여인이 얼른 전미진을 제어했다.

“미진아, 성국이 얼굴만 보고 간다고 했잖아.”

“엄마, 성국이가 내 프러포즈 거절했어요.”

“대답을 안 한 거 아니야?”

“아냐. 분명 싫어라고 했어요.”

철의 여인이 나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성국아, 진짜로 그랬니?”

“미진아, 한국에 돌아오면 생각해보자.”

“진짜지, 성국아?”

전미진은 또 내 말 한마디에 환하게 웃었다.

[정말 저번 생의 동생만 아니었어도….]

나는 손을 앙 쥐었다.

철의 여인은 전미진의 어깨를 쥐고는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우리는 이제 미국으로 떠날 거야.”

아이들 교육 때문에 철의 여인도 같이 가는 모양이었다.

“나랑 약속 하나 해줄래?”

“…….”

오늘따라 삼전 그룹 여자들은 내게 뭔 약속을 계속 바랐다.

나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국아, 삼전 그룹 회장인 아저씨 알지? 나 없는 동안….”

끄덕.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저씨랑은 따로 만나지 마. 알았지?”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삼전의 후원을 거부할 생각이지만 전재형 회장을 굳이 안 볼 이유도 없었다.

아빠가 뒤에서 걸어오자 철의 여인은 온화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미진이가 인사하고 싶다고 해서요.”

“둘이 엄청 사이가 좋다고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아빠, 그 무슨 가짜 뉴스야. 전미진이 일방적으로 나 좋아하는 거지.]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아빠는 철의 여인 뒤에다 대고 90도로 인사를 했다.

나는 철의 여인이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저번 생의 엄마였다. 지금의 엄마처럼 살가운 엄마는 아니었지만, 자식들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긴 했다. 여전히 내가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철의 여인을 등졌다.

[철의 여인,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 마세요. 이번 생에서 내 목표는 삼전의 도구가 되는 게 아니라 삼전을 뛰어넘는 거예요.]

* * *

1997년 9월 12일.

나의 일곱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9월 12일이 하필 아빠가 제일 바쁜 금요일이어서 내 생일은 아빠가 쉬는 월요일 저녁에 하기로 했다.

민국이 녀석이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고 내 옆에서 얼쩡거렸다. 이 녀석도 이제 더럽게 말 안 듣는 다섯 살이 됐다.

<끝사랑> 이후로 아동 관련 광고를 종종 찍고는 있었지만, 지 밥벌이 겨우 하는 수준이었다.

“형아, 형아.”

“왜 불러?”

“형아, 오늘 우리 짜장면 먹으러 가?”

“형이 사는 거야.”

“와아! 신난다. 밍구기는 짜장면 조아.”

짝. 짝. 짝. 짝. 민국이 녀석은 세상 해맑게 박수를 쳤다.

민국이의 가장 장점은 언제나 해맑다는 것이었다.

이모님이 내게 재킷을 입으라고 건네줬다. 엄마가 생일 선물이라고 백화점에서 간만에 돈 좀 써서 사준 재킷이었다.

잠실에 이사 온 지난 2년 동안 우리 집 형편도 꽤 좋아졌다.

아빠의 <원아저씨 보쌈> 잠실점은 꾸준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아직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입소문을 타고 웬만한 대기업 과장보다는 많이 벌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민국이, 임선미와 송혜선이 소속된 SKJ 기획의 활약은 더 대단했다. 임선미가 지는 해라면 송혜선은 뜨는 해였다. 시트콤까지 진출해서 요즘 여자들의 워너비가 되고 있었다.

소속 연예인들의 활약으로 SKJ 매출도 점점 커져 기획이란 이름을 떼고 SKJ 엔터테인먼트로 사명도 바꿨다.

민국이는 지 밥값 하는 정도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전히 아동 모델 중에서 모델료 톱을 달리고 있었다.

통장에는 이미 5억이 넘는 금액이 있었다.

이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 때는 1억이 목표였는데, 1억 목표를 이루고 났을 때는 너무 아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일곱 살이다.

의사 표현도 정확하게 할 수 있었고, 그동안 쉼 없이 본 경제 뉴스와 책 등으로 지금 시대의 분위기도 대충 파악했다.

이제 어떤 이에게는 위기, 또 어떤 이에게는 기회가 되는 일명 IMF. 대한민국 최대의 외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잘 차려입은 나와 민국이를 번갈아 봤다.

“와, 둘 다 너무 멋있네. 저녁 먹을 준비 됐어?”

“네에!”

“녜에!”

나와 민국이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 * *

삼전 호텔의 중화요리 전문 레스토랑.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짜장면을 파는 곳에서 나의 일곱 번째 생일 파티가 열렸다.

이제는 어엿한 엔터테인먼트사의 대표가 된 김미영과 나와 민국이를 돌봐주시는 이모님, 이제는 한 회사 식구인 임선미. <원아저씨 보쌈> 원조 사장님까지. 여덟 명이 작은 룸에 모였다.

김미영이 미리 준비한 삼전 호텔의 딸기 케이크까지 세팅된 채였다.

돌 때 생각이 나서 갑자기 눈앞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수유의 그 작은 원룸에서 천애 고아로 태어난 엄마, 아빠와 함께한 생일.

아빠는 슈퍼에서 산 일회용 카메라로 나를 찍기 바빴고, 엄마는 정말 별것 없는 돌상을 차렸었다.

그 시절 원룸 건물의 주인이던 김미영은 월세를 올려달라고 왔다가 내 돌잔치에 고기까지 들고 와서 함께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의 우리가 있었다.

비록 부모도 없는 천애 고아인 엄마, 아빠이지만 이제는 김미영과 임선미, <원아저씨 보쌈> 원조 사장님 그리고 우리를 돌봐주는 이모님까지 있었다.

임선미가 케이크에 7이라고 새겨진 초를 꽂았다.

“성국아, 짜장면 오기 전에 우선 케이크 불 끄자.”

“네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성국, 정말 7년 동안 열심히 살았어.]

“이제 불 붙일게요.”

“네에, 아빠!”

아빠는 얼른 불을 붙였다.

동시에 모두들 생일 노래를 불러줬다.

정말 처음 이 집에 태어났을 때는 상상도 못 한 광경이었다.

내가 다시 삼전 호텔에서 생일 파티를 하게 될 줄이야…. 비록 레스토랑 룸 하나 빌린 거지만.

“사랑하는 성국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동시에 아빠가 내게 속삭였다.

“성국아, 어서 소원 빌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내가 지난 7년 동안 바란 그 미래에 대한 소원을 빌려는 순간, 눈앞에 엄마와 아빠 그리고 민국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김미영과 임선미, 이모님과 보쌈집 사장님까지.

이들을 생각하자 뭔가 마음에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올라왔다.

그 순간, 내 생일 소원이 바뀌고 말았다.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민국이랑,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영원히 함께하게 해주세요.]

“성국아, 소원 다 빌었어?”

나는 눈을 뜨고 엄마를 바라봤다.

“네에!”

“그럼, 초 끄자!”

“후훅-.”

나는 있는 힘껏 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음식이 들어왔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사는 거예요. 성국아, 누나한테 뽀뽀해줘.”

[선미 누나보다는 이제 이모지.]

하지만 나는 배시시 웃으며 임선미의 뺨에다가 뽀뽀를 쪽 해줬다.

임선미는 테이블 아래 숨겨둔 선물까지 꺼냈다.

“성국이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또 가슴이 뛰었다.

[또 없는 티 낸다.]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선물 포장을 뜯었다.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 들어 있었다.

“선미 씨,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엄마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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