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소영아, 성국이가 화성에 땅 사고 싶대.”
“성국이는 역시 남달라. 성국아, 화성에 땅 사서 뭐 할 건데?”
[뭐 하긴, 몇 배 부풀려서 팔아먹어야지. 판교 쪽도 괜찮지.]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왜, 성국아?”
“성국이 주식 하고 싶어요.”
“주식도 하고 싶다고?”
“네에!”
이미 나는 모델료 대신 받은 삼전 전자의 주식을 보유 중이었다. 물론 이 주식은 장투다. 단타로 수익을 낼 생각은 없었다.
아빠는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내심 걱정되는 눈치였다.
“소영아, 성국이가 여전히 경제에만 관심 갖는 거 같아서 걱정이야.”
“자기야, 우린 이제 성국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라.”
[역시 엄마 쵝오!]
나는 엄마의 등을 두 번 도닥였다.
“자기야, 봤어? 성국이 또 등 두 번 두드렸어.”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하고 만 행동이다.
“성국이 이 녀석, 아주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속에는 전 삼전 그룹 후계자 전성국이 들어 있지.]
엄마, 아빠와 티키타카 하는 동안에 비행기는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번 생의 첫 제주도였다.
* * *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는 곳으로 향했다.
아빠는 유독 사방을 돌아보며 엄마와 민국이 그리고 나를 챙겼다.
“소영아, 민국이 안고 가. 나는 성국이 챙길게.”
“응, 알았어.”
아빠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성국아, 아빠 손 절대 놓치면 안 돼.”
[아빠, 걱정 마. 나 전성국이야. 여기서 길 잃어도 서울 집까지 찾아갈 수 있어.]
“아빠는 말이야. 어릴 적에 그런 생각 했거든. 우리 부모님이 날 버린 게 아니라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날 놓치고 못 찾은 게 아닌가.”
울컥.
[이 집안은 왜케 없어도 되는 사연이 많은 거야.]
나는 아빠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해야만 아빠가 안심을 할 것 같았다.
“어, 성국이잖아.”
근처에서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국이 여전히 스타네.”
아빠가 뿌듯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아, 성국아.”
[귀찮게 왜들 이렇게 부르나. 얼굴이 팔리니 좀 불편하네. 앞으로 광고 좀 줄여야겠어.]
이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사생인가?]
“안녕하세요.”
[어, 이 목소리는?]
나는 얼른 뒤를 돌았다. 정희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정희예요. 예전에 태국이 생일에 성국이 봤어요.”
정희는 아빠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엄마도 정희를 알아봤다.
“어머, 예전에 삼전 호텔에서 성국이랑 놀아주던 아이 맞지? 어떻게 여기서 만나지?”
“정희야!”
뒤에서 정희의 아빠가 정희를 불렀다.
나도 고개를 돌려서 정희의 아빠를 쳐다봤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부진 건설의 대표.
부산 지역의 유지로 정관계와의 두터운 인맥으로 사업을 넓힌 전형적인 지역 기업인이었다. 좋은 말로 기업이지 모든 게 주먹구구식이었고 인맥에 의존했다.
정희의 외모는 아무래도 어머니 쪽에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부진 건설의 대표이자 정희의 아버지인 이성두 대표는 작은 키에 두꺼비 같은 인상이었다. 남편의 큰 목소리에 놀란 정희의 어머니가 총총걸음으로 와서는 정희의 손을 잡았다.
“정희야, 아빠가 부르시잖아.”
“엄마, 얘가 성국이야.”
“어머, 얘가 그 유명한 성국이야? 많이 컸구나.”
정희의 어머니는 단아한 미인이었다. 정희가 어머니를 쏙 빼닮은 건 한눈에 봐도 선명했다.
정희의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정희의 손을 꼭 잡았다.
“정희야, 아버지가 바쁘시니까 성국이랑은 나중에 또 인사하자.”
“네.”
정희는 옆으로 멘 작은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쿠키였다.
“성국아, 이거. 만나서 반가웠어.”
“나두 반가웠어.”
나는 정희가 내민 쿠키를 받아 들었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건 왜일까?
정희는 까만 머리를 찰랑거리며 아빠에게로 뛰어갔다. 그러곤 곧 공항을 빠져나갔다.
“성국아, 우리도 가자.”
“네, 아빠.”
나는 아빠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아빠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 * *
호텔은 중문에 있는 삼전 호텔이었다.
아빠와 엄마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여기 TV에서만 봤는데….”
[엄마, 내가 앞으로 더 좋은 데 데리고 다닐게. 입 좀 그만 닫는 게 어때.]
근데 옆을 보니 아빠도 마찬가지 얼굴이었다.
“소영아, 여기 엄청 비싼 데 아니야?”
[제주도에서 제일 비싼 호텔이야. 내가 맡고 나서야 리모델링을 했었는데… 지금은 좀 촌스럽네.]
나는 오래전의 삼전 호텔을 눈으로 훑었다.
리모델링 전의 제주 삼전 호텔은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에는 가족들과 종종 오곤 했는데, 어느새 외국 나갈 일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발걸음이 줄었다.
나는 익숙하게 엄마와 아빠를 데스크로 끌고 갔다.
[엄마, 아빠, 호텔 체크인 해야지.]
아빠는 내 손에 잡혀 끌려오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아빠, 정신 차려. 진짜 아빠가 날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아빠를 잃어버리겠네. 쯧쯧.]
“성국아, 천천히.”
“체크인 하시려고요?”
“아, 네.”
친절한 직원이 나타나서 다행히 아빠는 무사히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키를 받아 든 아빠는 여전히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소영아, 403호래. 바다 전망이고.”
“바다 바로 보이는 건가 봐.”
[삼전 호텔에서는 바다 그렇게 가까이 안 보여. 좀 멀리 있어. 그래도 보이는 게 낫지.]
개인적으로는 바다 쪽보다는 한라산 전망을 예전에 왔을 때는 더 선호했다. 산이 주는 안정감 때문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방 호수를 따라 복도를 걸어가는데, 앞쪽에서 또 익숙한 일행이 걸어왔다. 바로 정희네 가족이었다.
“성국아! 엄마, 성국이 또 만났어.”
내 주머니에는 공항에서 정희가 준 쿠키가 아직 그대로였다.
정희가 웃으며 나를 향해 달려오자 다시 내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 심장이 안 좋은데….]
아빠는 이제 정희에게 익숙하게 인사도 한 번 했다.
“또 보네.”
“아저씨, 성국이도 여기 묵어요?”
“응. 우리도 여기 묵어.”
정희는 얼른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엄마, 아빠. 성국이네도 여기 묵는대.”
정희의 아버지가 근엄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우리 가족을 위아래로 훑는 게 느껴졌다. 딱 봐도 정희의 아버지는 하수였다.
진짜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은 저렇게 대놓고 사람을 훑지 않는다. 시선 하나에도 주가가 요동치고, 사내 게시판이 터져 나가기 때문이다.
정희 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성국이 얘기는 오는 내내 정희한테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따가 저녁 같이 하시죠. 여기 한식당이 괜찮습니다.”
“그래도 될는지….”
아빠는 당황했다.
이런 초대에 익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얼른 아빠의 손을 당겼다.
[아빠, 저 집 조만간 망해. 미래에 내가 더 부자 될 테니 쫄지 좀 마.]
“그러시죠, 그럼.”
아빠는 내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얼른 대답을 했다.
“그럼, 7시에 한식당에서 뵙죠.”
“성국아, 잘됐다. 이따 같이 저녁 먹자.”
“으응. 누나.”
나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걸 엄마가 보는 게 느껴졌다.
정희네 집 일행이 지나가고 나서, 엄마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정희 좋아해?”
“아니야, 그런 거.”
“근데 왜 볼은 빨개지는 거야?”
“아니야.”
나는 괜히 툴툴거렸다.
“성국이가 저렇게 툴툴거리는 거 처음 보는데….”
아빠까지 거들었다.
나는 괜히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머니에 손을 앙 집어넣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주머니에는 여전히 정희의 쿠키가 만져졌다.
저번 생에 좋아한 거지, 아직 이번 생은 아닌데….
나는 정희의 잔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 * *
샤워를 마친 나는 캐리어를 뒤지기 시작했다.
최근 찍은 아동복 화보 덕분에 협찬 옷이 꽤 많아졌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옷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베레모도 한 번 썼다가 캡으로 바꿨다가, 셔츠를 입었다가 간단한 티셔츠를 입었다가 벗었다.
뒤에서 엄마와 아빠가 큭큭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뒤를 흘깃 쳐다봤다.
“성국아, 아빠는 말이야. 남자가 그렇게 옷에 신경 쓰는 거 아니라고 본다.”
[아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재계에서 베스트 드레서 뽑으면 나였다고!]
근데 아빠가 저리 말할 정도면 너무 신경 쓰나….
아빠 말대로 나는 좀 무심한 스타일을 골랐다.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소매를 두 번쯤 걷으면 딱 적당할 것 같았다.
“성국아, 이거 입을 거야?”
“네, 엄마.”
“엄마가 머리 다시 만져줄게.”
“네.”
나는 차분히 엄마의 손길을 기다렸다. 평소에는 드라이 바람 싫다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지만, 꿋꿋하게 뜨거운 드라이 바람도 참고 견뎠다.
민국이도 옆에서 내가 펼쳐놓은 옷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민국아, 너는 아빠가 입혀줄게.”
[아빠, 그건 좀….]
아빠는 정말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얼굴과 키가 다 살려준 거였다.
“소영아, 민국이 이거 입힐까?”
“안 돼!”
“안 돼!”
엄마와 내가 동시에 소리쳤다.
아빠가 든 것은 노란색 멜빵바지였다.
[내가 나서야지, 안 되겠네.]
나는 얼른 머리를 마무리하고는 민국이 옷을 챙겼다. 민국이는 너무 신경 쓰지 않은 듯 보이지만 멍청함을 가리기 위해 아이비리그 스쿨룩으로 완성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 셔츠를 입히고, 나와 다르게 네이비색 조끼까지 챙겨 입혔다.
[나보다는 인물이 안 되니 옷이라도 더 빵빵하게 입혀야지.]
“형아, 나 이뽀?”
“봐줄 만해.”
민국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나는 얼른 민국이의 엉덩이를 두 번 토닥였다.
“이뽀.”
“진따지?”
“형은 거짓말 안 해.”
“형, 조아.”
민국이는 금세 신이 나서 머리를 매만졌다.
이때 엄마의 경악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그 옷을 왜 가지고 왔어?”
“여행할 때는 편한 게 제일이지.”
아빠가 막 입은 옷은 가게 나갈 때도, 쉬는 날 마트를 갈 때도 입는 무릎이 다 나온 추리닝 바지였다.
[그건 아니지, 아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야, 그래도 처음 뵙는 분들이랑 밥 먹는 자리인데 이건 아닌 거 같아. 자기도 청바지에 성국이랑 민국이처럼 이 흰색 면 셔츠 입자.”
“평소에 안 입는 건 불편한데.”
아빠는 투덜거렸지만, 엄마가 한 번 쏘아보자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아빠와 나, 민국이는 침대에 앉아서 엄마가 욕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계는 벌써 7시 10분 전이었다.
“소영아, 10분 전이야. 이제 내려가야지.”
“응. 다 됐어.”
그 말과 동시에 욕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우리 세 남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아!”
“성국아, 민국아, 엄마 어때?”
엄마는 하늘하늘한 핑크빛 원피스에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곱게 화장까지 했다. 정말 임선미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미모였다.
우리 세 남자가 입만 떡 벌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엄마는 불안한 눈치였다.
“왜, 이상해?”
“아, 아니야. 진짜 이쁘다, 소영아.”
“진짜? 거짓말 아니지?”
엄마는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다.
나는 민국이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엄마, 최고!”
민국이가 얼른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도 따라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소영아, 늦었어. 어서 가자.”
“나 립스틱만 바르고.”
엄마는 핑크빛이 도는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와 민국이 손을 잡았다.
“우리 아들, 같이 가볼까?”
“네에!”
“녜에!”
나와 민국이는 동시에 대답했다.
* * *
“엄마, 쉬야.”
나는 발을 살짝 굴렀다.
[정희 보려니 나도 긴장했나.]
“자기야, 성국이 화장실.”
“응. 성국아, 아빠랑 화장실 가자. 소영아, 먼저 들어가 있어. 우리 기다리시겠다.”
“알았어. 난 민국이랑 먼저 들어가 있을게.”
엄마와 민국이가 식당으로 들어가고, 나는 아빠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빠는 빈칸에 들어가서 내 바지를 벗겼다.
“성국아, 쉬!”
[아빠, 나 일곱 살이야. 이젠 그런 거 안 해도 돼.]
이때, 밖에서 정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정희가 좋아하기에 같이 저녁 먹으려고. 어떤 집인지는 대강 알아야지…. 뭐? 부모 둘 다 고아라고? 애 얼굴 팔아서 먹고사는 집안이잖아.”
[지금 우리 집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는 얼른 지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