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48화 (48/231)

제48화

아빠의 얼굴을 얼핏 봤다. 귀까지 붉게 타오른 게 보였다.

[아빠, 내가 해결해줄게.]

내가 문을 열려는 순간, 아빠가 나를 잡았다.

“쉿!”

아빠는 소란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국이가 미국으로 전학 간 학교로 우리 정희도 따라 보내야지. 타지에서 외로운데, 서로 의지하면 얼마나 좋아. 내 다시 전화 걸겠네.”

곧 전화를 끊는 정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희 아버지가 손을 씻고 나간 이후에도 한참을 아빠는 조용히 있다가 나갔다.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빠는 세면대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물끄러미 바라봤다.

“성국아, 나쁜 이야기 들었어?”

상처받은 아빠의 얼굴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물을 틀더니 얼른 손을 씻고 내 귀를 닦기 시작했다.

“성국아, 나쁜 이야기는 이렇게 잊는 거야. 아빠, 엄마가 욕먹는 건 괜찮은데… 성국이가 아빠 때문에 욕먹는 건 진짜 참을 수가 없어.”

[아빠가 고아가 되고 싶어서 된 거 아니잖아. 내 얼굴 좀 팔아먹고 살면 어때? 나 이렇게 잘나게 태어난 거 다 아빠, 엄마 덕분이잖아.]

나는 수많은 말 대신 아빠의 등을 도닥거렸다.

“아빠, 기운 내라고?”

“아빠, 힘내세요! 성국이가 있잖아요.”

나는 예전에 들어온 어느 노래까지 따라 불러줬다.

아빠는 애써 웃으며 나를 안아 들었다.

“기분이다. 식당까지 아빠가 안고 갈게.”

“아빠, 나 무겁지?”

“나중에 성국이가 아빠보다 무거워지면 그땐 성국이가 아빠 이렇게 해줘야 해.”

“네에!”

아빠는 붉어진 눈시울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 * *

한식당 안쪽으로 마련된 룸에 정희네 가족과 엄마와 민국이가 앉아 있었다.

민국이는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형아!”

아빠는 어느새 웃으며 정희네 식구에게 인사했다.

“성국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요. 죄송합니다.”

“애들이 다 그렇죠.”

정희 어머니는 편하게 아빠를 대했다.

정희는 나를 보더니 옆 의자를 손으로 통통 쳤다.

“성국아, 여기 앉아.”

“아빠, 나 저기 앉아도 돼요?”

“당연하지.”

나는 정희 옆으로 가서 앉았다.

정희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집안의 자식이랑 어울리는 게 못마땅한 게 보였다.

동생이 없는 정희는 나를 마치 동생 다루듯 식기까지 챙겨줬다.

“성국아, 이걸로 먹어.”

“응, 누나.”

누나라는 말에 정희가 끔뻑 죽었다.

정희의 아버지는 기분 나쁜 티가 역력했다. 정희 어머니가 몸이 약해 딸인 정희 이후로 아이가 없자, 밖에서 아들까지 낳아 들어온 사람이었다.

“술 하시죠?”

정희 아버지가 아빠에게 대뜸 물었다.

“네.”

“한 병 하죠.”

정희 아버지는 소주를 한 병 시켰다.

“그래, 성국이 아버지는 뭐 하십니까? 저희 집은 부산에서 대대로 건설을 했거든요.”

“저는 작은 보쌈 가게 합니다.”

“여러 개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요. 딱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장사는 잘되십니까?”

정희 아버지는 아빠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아빠는 얼른 소주를 받고 정희 아버지의 빈 잔에 따랐다.

“입소문이 나서 요즘은 웬만큼 매출이 나오네요.”

“그 전에는 뭐 하셨는데요?”

“보쌈집에서 일했습니다.”

“점원으로요?”

“네.”

아빠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정희의 아버지는 소주를 쭉 들이켰다.

“성국이가 아버지보다 더 잘 벌겠네요.”

나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앙 쥐었다.

[정희 아버님, 지금 해보자는 거야?]

나는 정희 아버지의 약점이란 약점은 모두 알고 있었다. 거기다 곧 있을 IMF에서 어떻게 되는지도.

“남편은 보쌈 만들고 파는 일밖에 못 해서요. 제가 성국이 기획은 맡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에 임선미 씨랑 송혜선이라고 요즘 뜨는 배우도 한 명 있어요.”

엄마가 나섰다.

임선미와 송혜선이라는 알 만한 배우 이름이 나오자 정희 아버지도 주춤했다.

[엄마, 나이스!]

정희 아버지는 소주를 들이켰다.

“엄마가 일하면 그럼 애는 누가 봅니까?”

“성국이 세 살 때까지 제가 봤고요, 그 이후에는 가족처럼 지내는 이모님이 돌봐주고 계세요.”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그럼 쓰나.”

정희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했다.

“여보, 그만해요.”

“와! 내 말이 틀렸나. 당신은 시집 잘 와서 꽃같이 집에서 우리 이쁜 정희만 키운 거 아이가.”

정희 아버지의 목소리가 올라가니 정희 어머니와 정희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됐다. 정희 아버지는 손버릇이 나쁜 사람이었다.

외도와 폭력.

최악의 남자였다.

정희가 저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사귀는 내내 힘들어했었다.

룸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정희 어머니는 몇 술 뜨지도 않더니 숟가락을 내려놨고, 정희 역시 엄마 눈치를 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놨다.

정희 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놨다.

“우리 집 식구들은 다 먹은 거 같네요. 더 드시려면 더 드시죠.”

[이렇게 무례할 수가! 초대한 사람이 먼저 자리를 뜨는 경우가 어디 있어!]

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정희 아버지를 쳐다봤다.

“계산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뭐, 가정 형편 들어보니 호텔도 처음 온 거 같으니.”

정희 아버지는 끝까지 우리를 무시했다.

“정희 아버님, 오늘 식사는 저희가 사겠습니다.”

[아빠?]

나는 놀란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담담한 얼굴로 정희 아버지를 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가 아들 얼굴 팔아먹고 돈을 좀 벌어서요. 이 정도 저녁은 살 수 있습니다. 부인께서나 따님께서도 거의 안 드셨는데, 저희 아들들은 밥 잘 먹거든요. 그러니 저희가 내야죠. 그만 가보시죠. 바쁘신 것 같으니까요.”

“뭣이?”

“그리고 저희가 부모 없이 자라긴 했지만 초대한 사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저희보다 많이 가지셨고, 많이 배우셨을 텐데 오늘 자리에서는 예의가 무척 없으시네요.”

아빠는 쐐기를 박았다.

나는 아빠를 다시 봤다.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도 잘 안 하고, 나와 민국이가 싸워도 회초리 한 번 든 적도 없는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나는 맞은편에 앉은 정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별게 다 기분 나쁘게 하네. 자식 얼굴 팔아 돈 버셨다니, 한번 돈 내시오. 가자, 정희야.”

정희 아버지는 정희와 어머니를 데리고 룸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엄마가 아빠를 빤히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야. 그거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소영아, 나 안 떨었어?”

아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응! 완전 시원했어!”

나도 아빠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빠, 멋있었어!”

“우리는 이제 밥 좀 먹자. 정희 어머니랑 정희도 정말 안됐어. 돈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저런 아버지 밑에서 힘들 것 같아.”

“자기가 사는 거니까 배불리 먹어야지. 이게 얼마야. 반찬 하나도 남기면 안 되겠는걸.”

“소영아, 나 용돈 가불해 줄 거지?”

“자기 비상금으로 사.”

“소영아~.”

아빠는 엄마에게 애원해서 다행히 용돈 가불을 받았다.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언제나 철없고, 어리기만 한 것 같은 엄마와 아빠가 어느새 조금 성장한 느낌이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정희 아버지처럼 돈 있다고 돈 없는 사람들 우습게 보는 사람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앞에 놓인 흰밥을 숟가락으로 가득 펐다.

엄마, 아빠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사는 비싼 밥인데 한 톨도 남길 수 없지!

“성국아, 천천히 먹어.”

“엄마, 맛있어!”

“소영아, 성국이 입맛이 너무 고급인 거 같아. 짜장도 삼전 호텔 짜장만 좋아하고. 한식도 삼전 호텔이라니….”

[아빠, 내가 저번 생에 여기 거 많이 먹어서 그래. 입맛이 변하지를 않네.]

“자기야, 우리 돈 정말 많이 벌어야겠어.”

“소영아, 너도 많이 먹어.”

“자기두.”

어느새 엄마, 아빠는 서로의 반찬까지 챙겼다.

나는 슬그머니 민국이 녀석 밥 위에 불고기를 얹어줬다.

[한우야. 먹어둬.]

민국이는 이제 나만큼 밥도 고기도 잘 먹었다.

“형아!”

민국이는 밥숟가락을 내밀었다.

“또 달라고?”

“응!”

나는 민국이의 밥숟가락 위에 다시 불고기를 얹어줬다. 엄마는 얼른 내 입에 불고기를 넣어줬다.

“성국아, 너도 먹으면서 민국이 챙겨.”

[엄마, 그러기엔 민국이 속도가 장난이 아니야.]

문득 내가 저번 생에서도 동생들을 이렇게 챙겼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을 챙길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것은 풍족하다 못해 넘쳐났다.

아빠는 엄마를 챙기고, 엄마는 다시 나를 챙기고. 나는 민국이를 챙기는 지금의 가족.

항상 뭔가 부족하지만, 이렇게 부족한 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형아, 꼬기!”

[민국아, 많이 먹어라. 밥값은 꼭 하는 거다!]

* * *

조식을 야무지게 먹고 나오는 길에 정희도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게 보였다.

정희는 엄마에게 뭐라고 하더니 나에게 달려왔다.

“성국아, 어제 먼저 가서 미안했어.”

“아냐, 누나. 누나, 어제 괜찮았어?”

나는 속 넓은 남자처럼 대범하게 정희를 안심시켰다. 정희는 살짝 감동한 눈치였다.

“성국아, 내가 미국 가서 편지할게. 집 주소 좀 알려줘.”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호텔 데스크로 가서 펜과 종이를 부탁했다. 그리고 지금의 주소를 적어줬다.

“여기. 누나.”

“성국아, 꼭 편지할게.”

정희는 얼른 주소를 챙겨서 다시 엄마에게 갔다. 정희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정희는 가는 내내 손을 흔들었다.

IMF 외환 위기가 터져도 정희네 집 정도면 정희 유학은 무리 없이 계속 진행할 것이다. 머리 나쁜 태국이라면 아마 정희네 집과 사돈 맺기도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태국이는 원래 야망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리고 이미 후계자 자리에서는 멀어졌으니까.

나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이번 생에서는 정희를 지켜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머리는 차갑게 돌아갔다.

집안 재산만 믿고 주먹구구식으로 사업하는 정희 아버지. 거기다 강약약강의 전형적인 인간.

이번 생에서 더 중요한 건 저번 생에 못 이룬 사랑보다 누구보다 날 아껴주고 사랑하는 내 가족이었다. 내 가족을 무시한 집안과는 엮일 이유가 없었다.

엄마가 얼른 나를 챙겼다.

“성국아, 정희 누나가 너 엄청 좋아하네.”

[당연하지. 엄마 아들인데.]

나는 얼른 엄마의 치마폭에 매달렸다.

“난 엄마가 제일 좋아.”

“치, 지금은 엄마가 제일 좋지. 몇 년 후에도 그 말 하나 보자.”

“소영아, 나도 네가 제일 좋아.”

“나두!”

아빠와 민국이까지 모두 엄마에게 달려들자 엄마는 웃으면서 우리들을 떼어냈다.

“정말 전씨 남자들은 저리들 좀 가. 나도 정희처럼 이쁜 딸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어.”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엄마, 아빠… 설마, 셋째 가지는 거 아니지?]

“소영아, 나도 딸 하나만 더 있으면 소원이 없긴 하겠는데… 네가 너무 힘들잖아.”

[그렇지! 역시 아빠는 이성적이네. 민국이 이제 겨우 자기 밥값 하는데, 동생은 무리야.]

“성국이랑 민국이 닮으면 우리 딸도 정말 똑똑하고 이쁠 거 같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아서 나 같은 아들도 나온 거고, 민국이도 이만하면 태국이보다는 천 배는 나았다. 하지만 전미진 같은 여동생은 절대 사양이었다.

“소영아,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자.”

“알았어. 오늘은 성국이랑 민국이랑 어디 가볼까?”

[엄마, 제주도에 오면 요트 정도는 띄워줘야 하는데. 바닷바람 맞으며 샴페인 마시면 천국이 따로 없어.]

“소영아, 애들 데리고 바다 가자. 나 모래사장에서 모래성 만들고 파도 밀려오면 달려가고 하는 거 진짜 하고 싶었어.”

“자기야. 나두! 성국아, 민국아, 좋지?”

나는 맥없이 엄마 손을 잡았다.

[그래, 난 저번 생에서 다 해봤으니 이번 생에서는 엄마, 아빠 하고 싶은 거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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