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49화 (49/231)

제49화

촤아아-.

파도가 밀려왔다.

까르르르. 민국이는 바짓단이 젖는지도 모른 채 파도가 밀려오면 도망 오고, 밀려가면 쫓아가는 짓을 1시간 넘게 하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서로 손을 잡고 신혼부부처럼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나는 아빠가 만들어놓은 모래성을 깔고 앉아 세 사람을 바라봤다.

이제 나도 벌써 일곱 살이었다.

외모도 격변하고 있었고, 이제 천재 소리 듣는 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게 뻔하다. 저번 생에 배운 것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대한민국에 외환 위기가 닥친다.

아빠의 보쌈 가게도 걱정이 됐고, 엄마와 김미영이 운영 중인 SKJ 엔터테인먼트도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자영업인 아버지도 타격이 있겠고, 광고 업계도 모델료 깎기에 들어갈 것이다.

올해 코스피는 300대까지 내려갈 것이고, 내년 중반에는 200대 중반까지 찍고 상승하기 시작할 것이다.

IMF의 위기는 나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땐 10대 후반이었고, 삼전 그룹 역시 IMF 구조 조정을 피해가지 못했다.

재벌 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가장 큰 뇌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삼전 그룹도 30프로 이상의 구조 조정을 해야만 했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성국아, 거기서 혼자 뭐 해?”

[앞으로 먹고살 걱정 했지.]

엄마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는 척하더니 나를 안아 들었다.

[엄마, 왜 이래?]

“성국아, 바다까지 왔는데 바다에 발도 안 넣으면 안 되지!”

[엄마, 나 짠물 싫어!]

나는 발버둥을 쳤다.

“시로! 시로!”

아빠가 달려와서 나를 안아 들었다.

“성국이 이 녀석, 바다까지 와서 뭔 생각을 그리해? 바닷물에 발 한번 담그자.”

“아빠, 시로.”

“형아! 형아! 이리 와!”

민국이도 가세했다.

아빠는 나를 안아 들고는 바다에 던질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자, 전성국 바다에 빠진다.”

“아빠. 아빠!”

아빠는 나를 바다에 휙 던지듯이 하더니 얼른 끌어안았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재밌는데?]

아빠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성국아, 재미있지?”

“…….”

나는 입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좀 전까지 바닷가에 앉아 바닷물에서 유치하게 노는 민국이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 녀석, 재미있는데도 말 안 하네. 자, 다시 한번!”

아빠가 나를 내던지기도 전에 나는 이미 까르르 웃고 있었다.

민국이가 아래서 깡총깡총 뛰었다.

“아빠, 나두 나두.”

“형 먼저 해주고.”

아빠는 나를 몇 번 바다에 던질 듯 말 듯 흔들고는 모래사장 위에 내려놨다. 이번에는 민국이 차례였다.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민국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모래사장을 오갔다.

[흠… 애처럼 노는 것도 재미나네.]

얼마 남지 않은 여유를 누릴 때였다.

* * *

1997년 11월 21일.

9시 뉴스의 앵커 목소리에 우리 가족은 모두 시간이 멈춘 듯 화면을 응시했다.

- 시청자 여러분. 대한민국이 국가 부도를 선언했습니다. 경제 우등생이라는 한국의 신화를 뒤로하고, 정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말 뼈아픈 하루였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두 눈만 끔뻑였다.

“자기야, IMF가 뭐야?”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약자야, 엄마. 국제통화기금이라는 건데, 나라를 상대로 하는 은행인데, 엄청 간섭 많이 하는 은행이야.]

IMF는 대한민국의 경제 체계를 완전히 바꾸게 될 많은 요구를 한다. 첫째, 금리를 올릴 것. 둘째, 구조 조정을 할 것. 셋째, 공공재를 영리화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게 바로 IMF 후이다. 그만큼 IMF는 많은 것을 바꿨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어.”

나는 중얼거렸다.

“성국아, 뭐라고?”

“엄마, 아냐. 나 졸려. 잘래.”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나의 자산은 모두 은행에 있었다. 다행히 아빠가 만든 통장은 IMF에도 생존하는 은행이라 중간에 바꾸지는 않았다.

오늘은 책도 보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둘씩 생각했다.

현재의 자산으로 내가 할 일은 딱 두 가지였다. 주식과 부동산.

나의 목표는 이제 5년 안에 30억 부자가 되는 것이다.

5억을 여섯 배 이상 부풀리는 게 될 것 같냐고?

물론 된다!

지금은 IMF의 시작이니까. 그리고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IMF를 빨리 잘 극복한다.

* * *

“대한민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 어, 이거… 성국이가 어제 한 말인데….”

신문을 보던 엄마는 등교 준비 중인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혹시… 아니다. 오늘은 유치원 끝날 때 엄마가 데리러 갈게.”

“응,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얼른 배꼽 인사를 하고 유치원 스쿨버스로 향했다.

오늘 유치원은 꽤나 어수선할 것 같았다. 물론 특별반은 관심 없겠지만….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전히 아이들은 시끄럽게 뛰어다녔다.

[일곱 살이나 먹어서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아서 어제 토마스에게 부탁해서 빌린 원서를 마저 읽었다.

서여림이 다가오더니 나를 툭 쳤다.

“성국아, 같이 놀자.”

전미진이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로 서여림과 이세희가 나를 두고 경쟁했지만, 난 누구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 책 볼래.”

“나도 책 봐야지.”

서여림은 내 옆에 동화책 한 권을 들고 앉았다. 몇 장 휘릭 넘기더니 턱을 괸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성국아, 너 초등학교 어디로 가?”

“그건 왜 물어?”

“엄마가 난 영성 초등학교 갈 거라고 했거든.”

영성 초등학교는 1년에 학비만 천만 원이 넘게 들어가는 사립 초등학교였다.

“아직 생각 안 해봤어.”

사실 초등학교는 다닐 생각도 없었다.

삼전 유치원이야 아빠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고,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릴 게 많지만 일반 초등학교는 갈 생각도 없었다. 아마 삼전 측에서는 나의 사립학교 비용을 대준다고 하겠지만, 더는 후원도 받고 싶지 않았고 더는 학교도 다니고 싶지 않았다.

“성국아, 너도 영성 초등학교 같이 가자. 세희랑 현중이랑 주성이랑 다 영성 초등학교 간대.”

[그러니까 더 싫지. 너희들을 보는 건 여기까지면 족해.]

“생각해볼게.”

[흠, 이게 사회성이라는 건가?]

나는 어느새 싫은 말에 적당히 둘러대는 법도 배웠다.

재벌 시절 못 배운 사회성까지 다 배웠으니, 정말 이번 생에서는 학교는 더는 다닐 필요가 없었다.

“자, 첫 수업 준비하자.”

이지은 선생님이 들어와서 천방지축 뛰어노는 아이들을 한 명씩 책상에 앉혔다.

[오늘 수업은 특강이라고 했는데….]

종종 특별반에서는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관계자들이 와서 특강을 하고는 했다.

스르륵. 유치원 앞문이 열리면서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크지 않은 키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얇은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나는 그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로 삼전 증권의 투자 전문가 제이슨 리였다.

나는 입술을 슬쩍 올렸다.

[제이슨, 정말 오랜만이야.]

IMF 구제금융 요청이라는 뉴스가 뜨자마자 제이슨 리를 유치원 특강 강사로 보내다니…. 역시 삼전 그룹다웠다.

* * *

전재형 회장은 정신이 없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삼전 내부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여파는 더 심각했다. 준비하지 못하거나, 설마 했던 기업들의 줄도산은 눈에 보이듯 뻔했다.

삼전도 구조 조정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구조 조정 TFT가 꾸려졌다. 삼전 내부에서도 엘리트로만 이뤄진 팀이었다.

전재형 회장이 TFT를 이끄는 배진영 부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전체적인 그룹의 구조 조정은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해야 하나?”

“최대 30프로까지 구조 조정 해야 할 것 같습니다.”

30프로나?

삼전 그룹의 30프로는 단순히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30프로에는 해당하는 가장과 그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3개월 동안 명예퇴직 신청을 받겠습니다.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다음에 구조 조정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지.”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삼전 자동차입니다.”

전재형 회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삼전 자동차는 시작부터 골칫덩어리였다. 선대 회장이었던 아버지 전주신 회장의 평생소원이 삼전 마크 달린 자동차를 타는 것이었다.

삼전 그룹 자체의 기술력으로는 힘든 일이라 돈으로 외부의 기술을 사와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거기다 국내 자동차 하청 업체들은 기존 회사와의 유대 관계 때문에 삼전 전자에 제품을 납품할 수 없었다.

고육지책으로 삼전이 선택한 게 일본의 자동차 회사에서 부품을 모두 수입하는 거였다.

그런데 외환 위기가 터졌으니, 수입 물품의 대금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달러가 2천 원에 육박하고 있었다.

“TFT 팀 분석은?”

“매각입니다.”

“매각….”

전재형 회장은 허리를 쭉 폈다. 솔직히 전재형 회장에게 삼전 자동차는 만들수록 적자만 쌓이는 분야였다. 이 기회에 팔아버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조용히 알아보게.”

“네, 알겠습니다.”

배진영 부장이 나가고 양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회장님, 벌써 3일째 집에도 안 들어가셨습니다. 삼전 호텔 스위트에라도 가셔서.”

“됐네. 이 와중에 내가 어떻게 잠을 자겠어. 제이슨이랑 약속은 어떻게 됐나?”

“오늘 삼전 유치원 특강이 있어서 끝나고 런치입니다.”

“삼전 유치원?”

“네, 회장님.”

전재형은 딸 미진이의 유학 이후 성국이에 대한 관심도 조금 멀어졌었다. 자신의 후원도 모두 거부하고, 거기다 유치원까지 그만두겠다는 것을 겨우 말려서 유치원은 다닌다는 것만 전해 들었다.

전재형은 자신이 준 만큼 받을 수 없다면 돈이든 애정이든 거두어들이는 편이었다.

“알았네, 이동하지.”

“네, 회장님.”

* * *

제이슨 리는 제일 먼저 신문 사설을 우리에게 읽어줬다.

“아시아의 용이라고 불리며 초고속 성장을 하던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설을 읽은 제이슨 리는 아이들을 훑어봤다. 이들 중 저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들 뉴스 봤어요?”

모두 고개를 저을 때, 나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 리의 눈이 내게 머물렀다.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이슨 리는 전형적인 검은 머리 외국인이었다. 한마디로, 미국 시민권자로 대한민국 태생인 것을 앞세워 우리나라에 빨대 꽂는, 겉모습만 한국 사람이었다.

삼전 증권이 IMF 때 사라진 것도 다 이 인간 때문이었다.

제이슨 리가 나를 지목했다.

“거기, 이름이 뭐예요?”

“전성국입니다.”

“성국이는 IMF가 뭔지 알아요?”

“International Monetary Fund요.”

제이슨 리는 제법이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럼,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단 말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국가가 부도났다는 말이요.”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지금을 사는 모두에게 IMF 외환 위기는 이제 시작된 일이지만, 나에게 IMF는 지나간 역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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